2006.02.26 00:41, 김천어 근서

담임꽃

오늘도 또 우리 학생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원서를 쓰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네이스로 접속하려니까 메신저에서 찌르릉 찌르릉 하고 창의 잡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창을 바꿔 보니 아니나 다르랴 교감이 또 얼리었다.

점선생반 학생(언수외가 잘뜨고 똑 스카이가게 생긴 놈)이 언수외 낮은 우리 학생을 2순위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2년제 하고 점수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지방대하고 내신을 쪼았다.

[중략]

나흘 전 고대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여선생이 원서을 내러 가면 갔지 남 원서 내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고대내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체만척체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선생이 남 일하는 놈 보구….

"그럼 혼자 내지 떼루 내듸?"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내신 계산하기 좋니?"

또는,

"2학기 성적이나 나오거든 하지 벌써 수시를 쓰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등록 요강이 풀리더니 이 놈의 여선생이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네이스를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프린터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뽑았는지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배치표 세 장이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반엔 샤대 없지?"

하고 생색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테니 여기서 얼른 원서를 써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모의지원이 잘 맞는단다."

"난 모의지원 안써준다. 너나 써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배치표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은 근 삼년째 되어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선생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배치표를 다시 집어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제 자리로 횡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교감이이,

"너 얼른 원서를 써 줘야지?"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쓸 때 되면 어련히 쓸라구!"

이렇게 천연덕스레 받는 점선생었다. 본시 부끄럼을 타는 계집애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등어리를 파이프로 한번 모질게 후려쌔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배치표를 안 받아보는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반엔 샤대 없지.'는 다 뭐냐. 그러잖아도 저희는 특반이고 우리는 그 반에서 남은 학생을 나눠 쌈을 붙이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중략]

"예이 낮다! 낮다!"

"낮은 걸 널더러 입때 끼고 있으랬니? 망할 여선생 같으니"

하였다. 그리고 나의 등뒤를 향하여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이 바보 담임아!"

"애! 너 무능담탱이지?"

그만도 좋으련만,

"얘! 너 느 반 실장이 2년제라지?"

"뭐 울 실장이 그래 2년제야?"

할 양으로 열벙거지가 나서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더니 그때까지 모니터 위로 나와 있어야 할 점선생의 대가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다 돌아서서 오자면 아까에 한 욕을 모니터 옆으로 또 퍼붓는 것이다. 욕을 이토록 먹어 가면서도 대거리 한 마디 못하는 걸 생각하니 책상끝에 채이어 발톱 밑이 터지는 것도 모를 만큼 분하고 급기야는 두눈에 눈물까지 불끈 내솟는다.

그러나 점선생의 침해는 이것뿐이 아니다.

[중략]

"이놈아! 너 왜 남의 원서를 찢어 버리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반 원선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봉급이 떨어지고 자리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선생이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원서 찢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오엠알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선생! 점선생! 이년이 자습 감독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교감이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선생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복도를 살금살금 기어서 교무실로 내려간 다음 나는 도서관을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자습실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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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yuptogun.tistory.com BlogIcon 엽토군
    2008.03.20 11:37 신고 삭제 겹댓글 주소

    엄해!
    설마 했지만 엄해!

  2. Favicon of http://fearghoul.egloos.com BlogIcon 제절초
    2008.08.26 07:03 신고 삭제 겹댓글 주소

    노란 오엠알;ㅂ; 노란 오엠알이라니요...;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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