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05 21:47, 김천어 근서

농담에서 한자의 역할에 대하여

천어
2008. 6.

제1장 서론

농담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탄생 이래로 지속되어 온 것이다.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이래로 수십만 년동안 이루어진 농담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 그리고 21세기의 지식농담시대에 들어서 끊임없는 진보와 발전을 이루어 왔다.

21세기의 지식농담사회에서는 창조적인 농담이 중심이 될 것이다. 농담의 정보화는 인류가 지난 역사에서 수행해 온 농담을 체계적이고도 과학적으로 분류하는데에 크나큰 물결을 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농담의 시대를 맞아, 예로부터 깊은 농담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농담의 시대를 이끌 새로운 농담의 창출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경향이 깊다.

이러한 경향의 원인으로는 지난 한국의 역사에서 펼쳐진 농담을 되돌아보고 성찰하여, 이를 새로이 창조해 나아가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움직임이 크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 서구 문명의 경우에는 현대 영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제국의 농담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르네상스를 일구어낸 르네상스 농담, 그리고 심지어는 구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히브리어 농담까지 연구·비판하여 새로운 자세를 만들어내는 형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개화기 이후 개화(開化)의 물결 속에서 서구의 농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또한 해방(解放) 이후에는 미국식의 농담을 무차별적으로 수입하면서 지난 농담의 시간을 겸허하고도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경향이 크다. 가깝게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의 농담, 대표적으로 정다산의 농담에 대한 연구 또한 근래에 들어서야 조금씩 수행되고 있는 형편임을 생각한다면, 고려 또는 그 이전의 삼국 시대의 농담에 대해서야 오죽이랴.

본 고(考)에서는 이러한 전반적인 사정에 대한 기점(起點)을 이루고자 하는 의미에서, 한국어 농담에서 한자가 가지는 그 비중을 탐색하고 또한 그 전환점을 모색하는 데에서 그 의의(意義)를 찾을 것이다.


제2장 한자를 이용한 농담의 현황

한자를 이용한 농담의 경우 지금도 그 사례는 상당한 편이다. 이를테면 굿데이의 기사 제목에서 사용된 「유럽 후궁문화 꽃피운 性君」의 경우에는 ‘성군’(聖君)과의 음적(音的) 동일성을 이용한 훌륭한 농담의 예가 될 수 있다[각주:1].

뿐만 아니라 신문윤리위원회가 비공개로 경고(했다는데 이미 다 까진)한 대상으로 「弗어나는 오일머니」, 「濠好 아줌마」, 「칼의 노래를 佛러본다」 등도 독음(讀音)이 같다는 이유로 사용된 낮은 단계의 농담에 해당한다.

이렇듯 신문 기사에서 한자를 한글과 섞어쓰는 것은 기사의 함의를 보다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독자의 눈길과 함께 익숙한 표현으로 다가갈 수 있는 큰 효과를 가진다. (다만 억지조어라는 이유로 언어체계를 파괴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낮은 단계의 말장난적 농담 이외에도 순수하게 한자를 이용한 농담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힘은 하나일 때에는 하나이지만, 협력하면 넷이 된다.”는 식의 농담이다. 이것은 힘을 나타내는 한자 ‘력’(力)에서는 ‘력’(力)이 하나가 나타나지만, ‘협력’(協力)의 경우에는 ‘력’(力)이 네 차례 나타난다는 것에서 유래한 농담이다.

이렇듯 한자어를 사용하는 농담의 경우 간단하고 1차적인 농담뿐만 아니라, 그 한자의 내용을 이용한 2차적인 농담, 그리고 그 이상의 3차적인 농담도 가능하다.

1차적인 농담과 2차적인 농담의 구분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학설이 갈린다. 20세기 말까지 유행하던 학설의 경우에는 1차적 농담과 2차적 농담의 구분에 대하여 그 함의(含意)를 기준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 현재는 주장하는 학자가 없다.

21세기에 들어서 유력하게 제기되는 견해로는 양자의 구분에는 한자의 사용이 주(主)가 되느냐, 부(副)가 되느냐로 구분하자는 견해와 함께 재미의 농도가 빅재미(Big在美)인 경우 2차적인 농담이나 사소한 재미인 경우에는 1차적인 농담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양 학설 또한 앞에서 언급한 학설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비판이 가능하다.

마지막 견해로 농담의 1·2차적 구분에는 실익이 없으니,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학설이 있다. 그러나 농담의 차수(次數)를 구분하는 것은 농담학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또한 농담학을 더욱 쓸데없는 농담에 치중하는 것을 지향하게 하는 큰 효과가 있으므로 실익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에 한자의 사용이 주(主)인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제2설이 타당하다. 다만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으나, “농담은 인간이 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다”[각주:2]라는 지적을 생각한다면 구분 기준의 모호성에 대하여는 새삼 지적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제3장 결론

이상과 같이 농담에서 한자의 역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끝이다.


각주
  1. 다만 저 기사는 억지조어라는 이유로 경고를 먹었다. [본문으로]
  2. 김천어, 농담이란 무엇인가 : 쓸데없는 농담을 중심으로, 2008년, 농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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