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7 17:15, 김천어 근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1952년 7월 15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5선 중의원 의원이다.

참의원 의원과 제5·6·7대 환경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 담당)을 역임했으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국가안전보장문제 담당), 제2대 방위대신을 역임했다.

효고 현 아시야 시 출신이다. 1971년 9월에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를 중퇴했다. 고베에서 의류 관련 무역상을 하던 부친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의 신당 결성 움직임에 발맞춰 중의원 선거에서 효고 2구에 입후보 했지만 낙선하자, 일가가 모두 이집트로 건너간다.

“아랍어가 유엔 공용어가 된다”는 신문기사를 계기로,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 Of Cairo)에서 아랍어를 배워 카이로 대학에 진학했다. 1976년 10월에 카이로 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공시키는 등의 활동으로 이름을 높였다.

1992년 7월에 일본신당 비례구에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93년 7월의 총선거에서 다시 효고 2구에서 출마해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여러 정당의 분열·통합이 이루어지자 신진당으로 이동해 “신진당의 결성은 페리, 맥아더에 이은 제3의 구로후네(黒船)다”라고 평했지만, 이후에 자유당과 보수당을 거쳐 2002년 12월 27일에는 자유민주당으로 이동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아베 신조(安倍晋三) 등의 권력자나 실력자가 있는 정당으로 이동해왔으며, 이 때문에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환경대신

자민당에 입당한 뒤에는 총재의 파벌인 세이와(淸和) 정책연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환경대신으로 입각했다. 2003년의 총선거에서는 긴키 블록에 비례대표로만 명부에 3번으로 등록되어서 당선되었다. 2003년 2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입장과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연명으로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출범과 함깨 환경상으로 유임되었고, 2005년 여름에는 가벼운 복장을 입자는 쿨 비즈 캠페인의 선도자가 되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고바야시 고키(小林興起)의 대항마로 도쿄 10구에서 입후보했다. 이 지역은 이전까지는 자민당의 고바야시 고키와 민주당의 사메지마 무네아키(鮫島宗明)의 대결장이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가 같고 도쿄 대학을 졸업한 전 관료 사이의 싸움이었던 점에 착안한 고이케 유리코는, 고바야시의 낙선을 노린 이른바 자객 후보로 나서면서 도쿄 10구(도시마 구)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자민당 비례대표에서 비례 명부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당선에 대해 확신한 고이케는 선거구에서의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상위 우대를 거부하고 낮은 순위로 명부에 올랐다.

우정 민영화를 바탕에 깐 우정 선거라는 순풍과 함께 사메지마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고바야시의 자멸로 고이케는 쉽게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에는 온난화 대책이라는 명목으로 환경세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제를 도입한다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반대가 많아 보류되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으로 2005년에 피로로 입원하게 되면서, 2006년 4월 6일의 『슈칸신초』(週刊新潮)에서는 “나가타초(永田町)에서는 위독설이나 자살미수설이 흐르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햇지만, 4월 14일에 퇴원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고이케는 복귀 회견에서 “여성의 경우 남성의 10배 정도의 결과를 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고 발언했다.


방위대신

아베 내각의 발족과 함께 국가안전보장문제를 담당하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으로 취임했지만, 2007년 7월 3일에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상이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발언으로 방위대신 직을 사직하면서, 다음날인 4일에 그 후임으로 방위대신에 취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군사역사상 여성이 방위담당각료가 된 것은 처음이다.

방위대신에 취임한 이후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연장과 관련해 민주당이 주장하는 자위대 파견에 대한 국회의 사전 승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2007년 8월에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 문제로 아베 총리나 아소 다로(麻生太郎) 등이 일미관계에 주던 마이너스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167회 국회를 결석하고 미국을 전격 방문해 딕 체니(Dick Cheney) 부통령과 로버트 게이츠(Robert M. Gates) 국방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고이케는 일본의 야당이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연장에 반대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인도양에서 자위대의 급유 활동에 대해 “앞으로 계속 역할을 다하고 싶다”며 연장 의사를 밝혔다. 이 방미에 대해서 국회를 결석하면서까지 행한 것에 대한 비판이나, 아베 내각 개조내각에서 방위대신으로 유임하거나 외무대신으로 전임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냐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고이케는 수상 보좌관 시대부터 숙원으로 하던 방위성의 정보보안 시스템 확립을 위해 모리야 다케마사(守屋武昌)를 대신해 경찰청 출신의 니시카와 도오루(西川徹)를 사무차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 사실이 매스컴에 누설되고 또한 모리야가 아베 총리나 시오자키 야스히사(鹽崎恭久) 내각관방장관에게 인사안의 철회를 직소한 사실도 매스컴에 누설되는 바람에 이 인사를 둘러싼 스캔들이 매스컴에 의해 불거졌다. 이로 인해 고이케 인사안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아베 총리와 시오자키 관방장관은 제3의 대안을 고이케에게 요구해 사태의 수습을 꾀하고자 했다. 결국 고이케와 모리야간의 교섭을 통해 모리야는 2007년 9월 1일자로 퇴직하고, 고이케가 추천한 니시카와 대신에 방위성 출신인 마스다 고헤이(増田好平)를 사무차관으로 임명하는 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고이케와 모리야 사이의 마찰이 매스컴에 보고된 일이나 고이케와 시오자키 사이의 마찰이 불거진 점, 수상 관저의 리더십 및 위기관리능력의 부재 등이 드러난 것 등으로 고이케와 시오자키, 아베 총리에게 가해진 데미지는 상당했다.

2007년 8월 27일에 발족할 아베 개조내각을 두고 고이케의 진퇴가 주목되었지만, 고이케는 8월 24일에 인도 뉴델리의 호텔에서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방위성 내에서 (2007년 5월에 고이케가 수상보좌관으로 있을 때 발각된 사건으로, 방위대신으로 방미했을 때에도 지적된 일본 방위성의 정보보안에 대한 우려를 낳은 원인이 된 이지스 함 기밀 정보 누설 사건의) 책임을 어느 분도 지시지 않습니다만, 이 점에서 (일찍이 국가안보담당보좌관으로 지금은 방위대신인) 제가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라고 밝히고, “정보보안이라는 큰 과제가 정말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빈틈없는 체제를 구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맡길 수 있는 다른 분이 대신직을 맡으셨으면 한다”고 발표했다. 8월 27일의 마지막 각의 이후의 회견에서는 “국정에서 가장 중요한 국방이라는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은, 정말로 여자의 숙원이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국방에 관해서는 ‘아이 쉘 리턴(I shall return·반드시 돌아오겠다)’의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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