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헌법사 소고(日本憲法史 小考)



Ⅰ. 메이지(明治) 헌법


1. 총설

 (1) 봉건제도의 해체

  1) 막부정치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모든 정치권력을 쥐고 260년 동안 봉건적·쇄국적 체제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구미(歐美) 자본주의국가의 개국 요구나 강해진 도막운동(倒幕運動), 그리고 경제체제의 모순 등의 격증에 의하여 급속하게 권위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막부는 게이오(慶応) 3년(1867년) 10월 14일을 기하여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즉 정권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朝廷)에 다시 돌렸고, 이후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대호령(大号令)을 발하여 이에 천황 친정(親政)의 체제가 부활하였다.

  2) 번제(藩制)의 폐지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는 우선 번(藩, 당시 263개 이상의 번이 있었다.)을 폐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메이지(明治) 2년(1869년)에는 드디어 「판적봉환」(版籍奉還), 즉 번의 영지와 그 주민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되 그 관리의 담당은 번의 주인이던 다이묘(大名)들이 지번사(知藩事) 혹은 번지사(藩知事)의 형태로 맡게 되었으며, 이어 메이지 4년(1871년)에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게 되었다.

  3) 신분제도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신분은 공경(公卿)·제후(諸侯)·사(士)·농(農)·공(工)·상(商) 등의 계급이 나누어져, 각각의 신분에 의하여 엄격한 차별을 받는 원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신분제도를 폐지하는데 착수하였으나, 개혁은 불완전한 채로 끝났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이른바 화족(華族, 공경이나 제후가 변한 것)·사족(士族, 신하)·평민(농·공·상·민)의 3종의 신분을 새로이 만들었다. 결국 「사민평등」의 사상은 그림의 떡처럼 변했고, 역으로 인종적인 편견이나 부라쿠(部落) 차별 등의 차별을 오늘날까지 남기는 원인이 되었다.

 (2) 근대 민족국가로의 움직임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움직임을 내딛은 것은 1860년대에서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정치사상이나 헌법제도등의 많은 움직임이 있던 시기이다.

  1) 「공의사상」(公議思想)
  「공의사상」(公議思想)은 막부에서 메이지 유신에 걸쳐 일본의 지식층에서 탄생한 정치사상으로, 그 목적은 도쿠가와 막부의 군사적 독재정치에 저항하여 정치의 무대에 공경이나 제후 및 무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상을 명시하게 된 것이 게이오 4년(1868년)의 「5개조의 어서문(五ヶ条の御誓文)이다.

  2) 민선의회(民選議會)의 설치
  민선의회 설치의 움직임은 문명개화의 소리가 급속하게 높아지던 근대 유럽의 사상과 제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庶民)의 정치적 자각이 높아지면서 나타났다. 정한론(征韓論)에서 진 소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이 사쓰마(薩摩)의 번벌(藩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의 전제에 대항하여 1874년에 「민선의회설립의 건백서」(民選議会成立の建白書)를 정부에 주장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3)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와 흠정헌법(欽定憲法)
  민선의회를 개설하여 헌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정부 내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로 대표되며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급진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대표되며 프러시아의 군주주의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점진론」이 그것이다. 두 주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어전회의」(御前会議)에서 점진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자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면직되었다(이른바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다.). 그리고 메이지 14년(1881년) 10월 12일에 칙유(勅諭)가 내려졌고, 정부가 이를 받아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며 천황이 헌법을 제정하는 것 등을 발표하였다.

  4) 메이지 헌법의 제정과 공포
  메이지 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태도를 굳히고, 이토 히로부미를 각국의 헌법조사를 위하여 유렵으로 파견한다. 그는 주로 독일계의 헌법이론을 배우고, 군권(君權) 중심의 입헌제를 지지할 의지를 굳혀 귀국한다. 메이지 헌법 제정을 위한 구체적 작업은 1886년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와 함께 헌법과 관계법령안을 준비하여 1889년에 안이 완성되어 주상(奏上)하였다.
  이 안은 추밀원(枢密院)에서 심의하여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에 천황이 「대일본제국헌법」(이른바 메이지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는 일본의 첫 성문헌법이다. 그리고 1890년 7월에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어 제1회 제국의회(帝国議会)가 개설되었고, 메이지 헌법도 그 날부터 시행되었다.


2. 메이지 헌법의 성격

 (1) 개설(槪說)

  메이지 정부는 한편으로는 선진 여러 국가의 입헌주의 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적인 권력구조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서로 모순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메이지 헌법은 그러한 상황에서 제정된 헌법이므로, 그 성격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리, 그리고 군주주의의 원리의 타협의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제적인 성격이 강한 헌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적인 원리와 제도

  1) 의회제도
  법률이나 예산의 성립에 대하여 의회의 관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의회주의제도의 성격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①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원 행사를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은 점, ② 정당이나 군부, 관료의 힘을 억제할 수 없었던 점, ③ 천황은 많은 명령을 단독으로 발하는 것이 인정된 점 등은 불완전한 의회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대신(大臣)의 조언
  천황의 국무상의 행위에는 모든 대신의 보필(輔弼)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군통수권(軍統帥權)과 황실에 관한 사무 등은 대신의 조언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충분한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3) 신민(臣民)의 권리보장
  메이지 헌법도 근대입헌국가와 같이 「신민권리의무」(臣民權利義務)라는 표제로 일련의 자유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와 자유는 천황이 신민에 대하여 은혜적으로 준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연법사상에서 생긴 인권의 관념은 아니었다. 또한 그 보장에 있어서도 행정권이 아닌 입법에 의한 제약에는 어떠한 보장수단이 없었으므로, 「법률의 범위 내」에서의 보장에 지나지 않았다.

  4) 권력분립
  메이지 헌법도 「권력분립」(權力分立)을 위하여 국가권력을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으로 나누고, 제국의회와 재판소(裁判所)·내각(內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천황이 입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국무대신은 천황이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보필하는 지위」였으며, 재판소 또한 「천황의 이름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었던 등 모두 천황대권을 보좌하는 기관으로서의 분립제에 지나지 않았다.

  5) 사법권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사법권 독립의 원칙」을 취하여 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재판관의 신분보장을 두었다. 단 행정사건에 대하여는 별도의 행정재판소의 설치를 인정하고, 군인·화족 등 특별한 신분이나 사건에 대하여는 특별재판소의 설치도 허용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법권의 독립은 메이지 헌법 하의 민주적 여러 제도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실현을 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3) 반민주적인 원칙과 제도

  1) 천황주권(天皇主權)
  메이지 헌법은 「천황주권」을 근본원칙으로 하여 특이한 천황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정치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천황이라고 하는 천황주권의 근거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칙(神勅)」에 바탕한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처럼 무궁함)」에 있다는 설이다. 또한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감히 범하여서는 아니되는 이른바 천황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2) 대권중심주의(大權中心主義)
  메이지 헌법에 있어서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하는 것에 의하여 최고의 권위자로서 군림하였다.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總攬)한다」는 것은 입법권과 행정권 및 사법권 등의 권력이 결국에는 천황에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천황대권은 범위가 넓고, 특히 의회가 관여할 수 없는 천황의 권능이 크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은 천황제 관료에 의한 행정권 우위의 제도, 즉 「약한 의회에 대하여, 강한 정부」라고 하는 체제를 명실히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통수권(統帥權)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천황이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정하고, 이른바 「통수권의 독립」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용은 참모총장(參謀總長, 육군)과 군령부총장(軍令部總長, 해군) 등의 기관이 조언하여 정부 및 의회에서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별도의 계통의 권한이었다.

  4) 황실자율주의(皇室自律主義)
  천황제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황실에 관한 것은 황실 스스로가 정하도록 하는, 이른바 「황실자율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실시하기 위하여 황실전범(皇室典範)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여 메이지 헌법과 함께 최고의 위치에 두고, 양자의 사이에는 효력상의 우열이 없도록 하였다.


3. 메이지 헌법의 운용(運用)

 (1) 개설(槪說)

  메이지 헌법은 근대입헌주의와 절대주의라는 상반된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실제 정치에서 운용되는 것 또한 여러 가지로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서는 메이지 헌법사를 4가지의 시대로 나누고,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제1기 : 헌법시행(1890년, 메이지 23년)부터 청일전쟁(1894~189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메이지 헌법을 성립시킨 번벌정부(藩閥政府)와 의회가 헌법상의 권능을 근거로하여 격돌한 때이다. 정부는 「천황의 정부」로 어떠한 정당정치에서도 초연(初演)한, 의회에서 컨트롤 할 수 없는 이른바 「초연주의」(超然主義)의 방침이 취해졌다.

 (3) 제2기 : 청일전쟁 이후부터 1912년(메이지 4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정부가 정당과 제휴하는 방침을 취하여 정당도 또한 관료(官僚)·군벌(軍閥)에 앞서, 의회의 의 권한이 높아진 때이다. 정당의 근대화를 외치는 가운데 민주적인 원칙을 추진하자고 하는 움직임은 정당내각의 발전을 가져온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촉진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노동운동도 발전하게 되어 파업 등도 발생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곧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을 제정하여 탄압을 꾀하게 되었다.

 (4) 제3기 : 1912년(다이쇼 원년)부터 쇼와 초기 무렵까지

  이 시기는 자유주의적 세력이 차츰 세력을 넓히고, 정당의 비중이 다소 높아진 이른바 「정당내각」에 의한 정치가 행해진 때였다. 특히 2번에 걸친 「호헌운동」(護憲運動)은 정당내각 확립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성과로서 이른바 「헌정(憲政)의 상도(常道)[각주:1]가 헌법관습으로 인정되고, 정당내각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내각도 재벌(財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군벌관료와 손을 잡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등을 제정하기에 이르러 이 시기의 민주정치의 성격도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5) 제4기 : 쇼와 초기부터 1945년(쇼와 20년)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는 입헌주의의 기능이 절반은 정지한 때이다. 정치는 좌익운동을 강압적으로 끊으려는 방침을 취하고, 우익운동에 대하여는 영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로 인하여 우익은 군벌과 결탁하여 힘을 가지고 약한 의회를 더욱 후퇴시켰으며, 결국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5·15 사건」(1932년)[각주:2]이나 「2·26 사건」(1936년)[각주:3]의 발생과 함께 중일전쟁(1937년)의 격발이라는 어두운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군벌 및 관료의 독재는 「국가총동원법」을 낳았고, 이에 의회의 법률의결권은 실질적인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1940년(쇼와 15년)에는 각 정당이 어쩔 수 없이 해산되었고, 새로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大政翼賛会, 다이세이요쿠산카이)가 결성되는 등 일본의 정당정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부활하지 못했다.



Ⅱ. 일본국헌법의 제정


1. 총설

 (1) 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점령체제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포츠담 선언의 수락은 메이지 헌법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즉 그때부터 일본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바탕으로 위임된 것이 되는, 「간접통치」의 방식이 되었다.[각주:4] 그리고 이러한 점령체제는 「대일평화조약」(對日平和條約)[각주:5]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포츠담 선언은 13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헌법제정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규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우선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을 강화하는 한편 언론과 종교 및 사상과 같은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확립하는 것(제10항), 즉 신격천황제(神格天皇制)를 부정하고,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함과 함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적·평화적인 정치조직을 확립하는 것(제12항), 즉 의회제도와 선거제도의 개혁, 정당의 편성, 지방제도의 개혁 등을 행하는 것이다.

 (2) 헌법개정의 경과

  1) 마쓰모토(松本) 위원회의 조사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시데하라(幣原) 총리가 총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메이지 헌법의 민주화를 포함한 일본의 전통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성을 시사(示唆)하였다. 그에 이어 정부는 마쓰모토 국무대신을 주임으로 하는 「헌법문제조사위원회」(1945년(쇼와 20년) 10월 25일)를 설치하였다. 위원회는 이른바 「마쓰모토 4원칙」을 바탕으로 개정작업을 시작했으며, 다음 해 2월 8일에 총사령부에 제출하였다(이른바 「마쓰모토 안」).

  2) 맥아더 초안의 제시
  그런데 1946년 2월 1일에 마쓰모토 안이 마이니치 신문에 의하여 공개되었고, 총사령부도 이를 알게 되었다. 이를 안 맥아더는 그러한 보수적 감상의 정부에게는 민주적 헌법의 제정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마쓰모토 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방침을 굳혀 총사령부에서 독자적인 헌법초안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맥아더는 총사령부에 대하여 세가지 원칙[각주:6]과 이른바 SWNCC-228[각주:7]을 지침으로 하여 극비리에 작업을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총사령부는 곧 헌법초안을 완성하였고, 2월 13일에 일본정부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헌법초안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작성된 것도 놀랍지만, 당시의 정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혁명적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총사령부의 강한 의향과 국제적·국내적 여러 사정을 고려한 뒤 결국 초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 제국의회의 심의·공포·시행
  정부는 이 초안을 기본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3월 6일에 「헌법개정초안요강」으로 대중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그 초안은 중의원 총선거(4월 10일) 뒤에 열린 제90제국의회(6월 20일)에서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상정되었다. 중의원 및 귀족원은 그 초안을 수정가결하였고, 10월 29일에 추밀원에서 가결된 초안은 천황의 재가를 거쳐 1946년(쇼와 21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으로 공포되어 다음 해 5월 3일[각주:8]에 시행되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法理)

 (1) 개설(槪說)

  일본국헌법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바탕으로 점령통치하에서 총사령부가 원안을 작성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뒤에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를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의 군주주권원리에서 일본국헌법의 국민주권원리로의 이행은 헌법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

  1) 헌법개정무한계설
  헌법개정에는 내용상의 한계는 없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면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천황의 칙명으로 개정안이 발의되어 제국의회의 의결 및 천황의 재가를 거쳐 공포된 형식으로 성립된 것이다. 즉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므로 흠정헌법(欽定憲法)이며, 법적 연통성(連通性)을 가진다."는 것이다.[각주:9]

  2) 헌법개정한계설
  헌법개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견해에서는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의 「8월 혁명설」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통설). 그 근거로 ①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며, "일본의 최종(最終)의 정치형태"는 "일본국민의 자유에서 표명된 의사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메이지 헌법의 근본 바탕인 신권주권(神權主權, 천황주권)을 변경한 것, ② 더욱이 천황주권을 국민주권으로 전환한 것은 일본 정부도 또한 천황의 의사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등에서 그 변혁은 헌법적으로는 「혁명」이라고 한다.[각주:10]


참고문헌
  • 우에다 마사카즈(上田正一),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 사가노쇼인(嵯峨野書院), 2008년.
  1. 「헌정<FONT color=#8e8e8e>(憲政)</FONT>의 상도<FONT color=#8e8e8e>(常道)</FONT>」란 정부에 대하여 중의원의 다수당이 지배권을 갖는 정당내각제를 말한다. [본문으로]
  2. 「5·15 사건」이란 해군청년장교 일부가 수상관저를 급습하여 당시 호헌운동의 우두머리로 불리던 이누카이<FONT color=#8e8e8e>(犬養, 당시 78세) </FONT>총리를 살해하였다. 전전<FONT color=#8e8e8e>(戰前)</FONT>의 정당내각시대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으로, 국가를 전쟁의 늪에 깊이 빠뜨리는 기로로 몰고간 결정적인 요인이다. [본문으로]
  3. 「2·26 사건」이란 황도파<FONT color=#8e8e8e>(皇道派)</FONT> 청년장교가 1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쇼와 유신<FONT color=#8e8e8e>(昭和維新)</FONT>의 단행·존황토간<FONT color=#8e8e8e>(尊皇討奸 :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FONT> 등의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정부 요인을 살해하고 나가타초<FONT color=#8e8e8e>(永田町)</FONT> 일대를 점거한 사건이다. 이후 천황의 토벌명령과 함께 계엄령이 내려졌고, 진압되었다. [본문으로]
  4. 「간접통치」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원칙적으로는 일본정부를 통하여 행사하고, 때로는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5. 「대일평화조약」이란 일본과 49개 연합국이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소련과 인도는 불참하였다. [본문으로]
  6. ① 천황제를 개혁하는 것, ② 전쟁의 방기<FONT color=#8e8e8e>(放棄)</FONT> 및 군비의 불보지<FONT color=#8e8e8e>(不保持)</FONT>, 교전권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③ 봉건제를 폐지하는 세가지 원칙을 말한다. [본문으로]
  7. SWNCC는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FONT color=#8e8e8e>(국무-육군-해군 삼성 조정위원회)</FONT>의 약칭으로, SWNCC-228은 삼성 조정위원회 문서 228호 「일본 통치제도의 개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FONT color=#8e8e8e>(国民の祝日に関する法律)</FONT> 제2조는 이 날을 「헌법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사사키 소이치<FONT color=#8e8e8e>(佐々木惣一)</FONT>, 『일본국헌법론』<FONT color=#8e8e8e>(日本国憲法論)</FONT>, 유히카쿠, 1952년. [본문으로]
  10. 미야자와 도시요시, 『일본국헌법 <FONT color=#8e8e8e>(코멘타르 별책부록)</FONT>』, 315쪽, 닛폰효론샤, 1955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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