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18 23:58, 김천어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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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
 간 나오토(菅直人, 1946년생)
 중의원(10선)·민주당(간 그룹)

 도쿄 공업대학 이학부 응용물리학과(현 물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 전공투나 민청(民青: 일본민주청년동맹日本民主青年同盟, 일본공산당계의 학생운동 단체)와는 선을 그은 전학개혁추진회의全学改革推進会議를 출범시켜 이끌었다. 대학 분쟁으로 자진 유급하고, 1970년에 졸업.

 졸업 후 변리사 자격을 취득하고 특허사무소를 개설했다.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전전과 전후에 걸쳐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도한 정치인)의 선거 사무소 대표를 맡은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 1976년 제34회 중의원 선거에 도쿄 도 제7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이때 에다 사부로江田三郎의 눈에 들어 사회시민연합社会市民連合에 입당했다.

 1977년 제11회 참의원 선거에 사회시민연합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1979년에는 제35회 중의원 선거에 이름을 바꾼 사회민주연합社会民主連合으로 출마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1980년 제36회 중의원 선거에서 첫 당선. 1978년에 부대표, 1985년에 부서기장 겸정책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 총선에서 사회민주연합이 획득한 4석 가운데 사회당 계열 2석, 민사당 계열 2석을 차지했으며 간은 사회당 계열에 속했다.

 1992년 PKO 법안(자위대의 국제평화유지군 파견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많은 반대 속에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통과를 둘러싸고 장시간 연설이나 단상 점거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1993년에 자민당 정권이 붕괴되며 성립한 호소카와細川 비자민 연립정권에서 중의원 외무위원장에 취임했다. 1994년 사회민주연합이 해산되자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

 1996년,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하고 성립한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제74대 후생대신으로 입각했다. 당시 약해藥害 에이즈 사건(1980년대 일본에서 혈우병 환자에게 비가열성 혈액응고 인자제제를 치료에 사용하여 다수의 에이즈 감염자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명백한 과오 없음을 주장하던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행정부의 명백한 과오를 증명하는 파일을 공개함으로써 처음으로 책임을 인정하여 일본 최초로 관료의 설명책임이라는 개념을 가져오고, ‘어카운터빌리티’(アカウンタビリティ/accountability: 관리책임?)라는 말을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6년 8월, O157 사태가 발생하자 “오사카 부의 업자가 출하한 무순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도산 내지는 파산하는 농가나 업자(대부분 자영업 혹은 영세업자)가 속출하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그러자 간은 기자회견장에서 무순 샐러드를 먹으며 안전성을 드러내기도 했다.(이 사건은 나중에 도쿄와 오사카에서 무순업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양쪽 모두 제2심에서 국가가 패소했다.)

 1996년 9월, 신당 사키가케 소속이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민주당(구)을 창당하자 참가하고, 하토야마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소속의원은 55명. 1998년에 신진당이 분당한 후 탄생한 민주우애태양국민연합(民主友愛太陽国民連合/민우련民友連)이 합류하자 민주당을 결성해 대표가 되었다. 당시 소속의원 136명.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하자 오자와 자유당과 일본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후보로 거론되었다. 결선투표에서는 공명당·개혁클럽·사회민주당·신당 사키가케의 지원을 받아 참의원에서는 총리로 지명되었지만, 중의원에서 오부치 게이조가 지명되면서 총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후 1999년 열린 두 차례의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지만, 2000년에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2002년에는 다시 오카다 가쓰야를 꺾고 대표로 취임했다.

 2003년, 오자와 자유당과 합병하고 같은 해의 제43회 중의원 선거에서 ‘고속도로 무료화’, ‘초등학교 저학년의 30명 이하 학급 실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177석을 획득했다. 당시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사퇴하고 소선거구에 출마해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에게 승리.

 고이즈미 내각 각료의 연금 미납이 잇달아 발각되자 강력하게 공격했지만, 나중에 간의 미납기록이 발견되면서 여론의 역풍을 맞아 당 대표 사임.(나중에 후생노동성은 행정착오라는 간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죄했다.) 2005년 제44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도쿄에서 유일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어 열린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의 후임으로 입후보했지만, 젊은 대표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에게 2표차로 지고 마에하라 민주당의 한 병졸로 지원한다고 표명.

 2006년에 호리에 메일 문제로 마에하라 집행부가 퇴진하며 열린 대표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오자와 이치로에게 47표 차이로 패배하며 대표대행으로 취임. 2009년에 오자와가 위법헌금 의혹으로 사임하면서 대표가 된 하토야마 유키오에 의해 계속 대표대행으로 재임했다. 당시 2007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대항마로 거론되었으나 극구 거절.

 2009년 9월, 정권 교체로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정책·과학기술정책 담당)에 취임했다. 또한 부총리급인 ‘세 재정의 골격이나 경제운영의 기본방침 등에 대하여 기획입안 및 행정각부의 소관사무 조정 담당 국무대신’도 담당. 이후 정권의 신 성장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2010년 재무대신 후지이 히로히사藤井裕久가 사임하자 후임으로 취임하였고, 포스트 하토야마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010년 6월, 하토야마 퇴진으로 후임 대표로 당선되어 6월 8일에 제9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고, 9월에 열린 대표선거에서도 오자와 이치로를 꺾고 당선.

* 본인 스스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통합·융합한 제3의 길”을 언급.
* 경제·재정적으로는 ‘증세하더라도 잘쓰면 경기는 좋아진다.’거나 ‘제2의 케인즈 혁명’ 등을 언급.
* 총리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수상이라는 것은 적어도 4년동안은 같은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고 언급.
* 1997년, 국기국가법안 의결 당시 법안에 반대했다. 하토야마 내각 출범 후 첫 기자회견에서는 일부 각료와 함께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 2010년 총리에 취임한 뒤 중의원 본회의의 대표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지금은 언제나 국기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경의를 표하고, 국가 제창도 하고 있다.”고 답변.
* 대표 시절부터 “일본이라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나타내는 새로운 헌법을 만든다.”는 ‘창헌’創憲을 주장.
* 방위 정책적으로는 치안유지활동과 국제협력을 행하는 부대의 창설을 주장.
* 타이완台湾에 대하여는 유엔 가입을 중국이 용인하고, 유엔 가맹국끼리의 문제로 유엔의 장에서 평화적 해결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
* 2010년 8월, 히로시마에서 ‘핵 억지론抑止論’을 주장해 히로시마 시장, 피폭자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 북한에 대하여는 납치피해자 전원의 귀환·핵문제 해결·국교 정상화·경제지원을 한꺼번에 하는 정책을 제창하고 있다.
* 일미관계에 대하여는 “정치적으로는 일미동맹이 맡아온 역할이 크고, 앞으로도 아시아·세계의 안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언급
* 정권 교체 직후 “기지문제는 어쩔 수 없다.”라거나 “이제 오키나와는 독립하는 것이 좋다.”고 언급한 일이 밝혀졌다.


총무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역주권추진 담당)·지역활성화 담당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1951~)
 민간 / 신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원 교수, 돗토리 대학 객원교수, 제14대 총무대신, 돗토리鳥取 현지사(1999~2007). 돗토리 현지사 시절, 관료출신의 개혁파 지사의 대표격으로 알려진 존재. 2004년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78%라는 높은 지지율로, 전국 지사 가운데 1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2007년, 지사 취임 후 1560만 엔 이상의 비밀자금을 만들어 그 가운데 915만 엔 정도를 음식 등에 지출한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법무대신·납치문제 담당
 야나기다 미노루(柳田稔, 1954~)
 참의원(3선, 중의원 2선)·민주당(구 민사당 그룹) / 신임

 가고시마 출신으로, 전력총련의 지지를 받는 ‘미래의 환경·에너지 정책을 생각하는 모임’ 회장. 1973년 도쿄 대학에 입학했지만, 퇴학 후 1981년에 재입학. 1983년 졸업 후 고베 제강소神戶製鋼所에 입사했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 히로시마에서 민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민사당이 해산하자 신진당에 합류하고, 1996년 선거에 히로시마에서 출마했지만 미야자와 기이치宮沢義一에게 완패.

 1998년 참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이후 연속 3선. 2009년, 참의원 후생노동위원장에 취임해 2010년에는 자녀수당 법안의 통과를 주도. 2010년 6월, 민주당 참의원 간사장에 취임.


외무대신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1962~)
 중의원(6선)·민주당(마에하라 그룹) / 이임(국토교통대신)

 교토 출신으로, 교토 대학 법학부 졸업 후 역대 최연소 교토 부의원(당시)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 일본신당에 참여해 1993년 교토에서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6년에 민주당(구)과 1998년의 민주당(신) 창당에 참여했다.

 9·11 테러 전후의 안보 체제의 변화 속에서 외교안보 전문가로 이름을 높여갔다. 2005년 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를 2표차로 꺾고 당선, “일본의 블레어”(아사히 신문)라는 평가도 얻었다. 반대 야당이 아닌 ‘대안 노선’을 주창하고, 노조 의존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자민당의 대미 노선 비판, 중국 위협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인정을 위한 개헌 등을 주장하며 민주당 좌파의 비판을 받았고, 호리에 메일 문제로 결국 2006년 대표직을 사임했다. 이후 오자와와 대립선을 그으면서, 아베 신조 내각에 입각할 것이라는 가능성도 지적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았다.

 정권 교체 이후 하토야마 내각에서 제12대 국토교통대신으로 취임. 취임 직후 얀바八ッ場 댐과 가와베가와川辺川 댐 건설에 대해 “(선거) 공약이었으므로, (사업을) 중지합니다.”라고 명언했지만, 지역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채 무조건 중지를 발표해 비판을 받았다. 나리타成田와 하네다羽田의 구분을 철폐하고, 하네다 공항의 허브 공항화(24시간 운영)를 주장했다.

 2010년 6월,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 색의 불식’, ‘당 인사 쇄신’, ‘일미 협조’를 조건으로 간 나오토를 지지했다. 9월 선거에서도 간을 지지했고, 간 개조 내각에서는 오카다의 후임으로 외무대신 취임.

 중국 위협론이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헌법 제9조 개정, 무기수출 삼원칙 재검토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기국가법안 투표 당시 반대하거나 부부별성제·외국인 참정권 찬성 등 보수적인 색깔이 강하다고는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는 A급 전범의 분리를 통해 천황이나 총리의 참배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정비를 주장하고 있다.


재무대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1957~)
 중의원(5선)·민주당(노다 그룹) / 유임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과 졸업. 마쓰시타 정경숙 1기생으로 졸업 후, 1987년 지바千葉 현의원 선거에 출마. 선거 보도에서 거품 후보 취급을 받았지만, 최연소인 29세로 당선되었다. 1992년, 일본신당 창당에 참가하고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일본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일본신당 해산과 함께 신진당에 참여. 1996년 총선에서는 단 105표차로 자민당의 다나카 쇼이치田中昭一에게 석패했지만, 2000년에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어 복귀했다.

 2002년 대표 선거에 소장파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인지도를 높였다. 2005년 총선에서는 지바에서 유일하게 민주당 후보로 당선(940표 차). 당시 대표선거에서 마에하라를 추천해 대표 승리에 힘을 보탰다. 2008년 대표 선거에서 출마를 표명했지만, 당내에서 찬반이 거세 사실상 입후보를 단념했다. 이로 인해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노다 그룹은 사실상 해산론까지 나올 정도로 분열되었고, 출마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오자와의 분노를 사 사실상 찬밥신세가 되었다.

 정권 교체 후 하토야마 내각에서 방위대신 물망에 올랐지만, 집단적 자위권 주장 등이 의견 대립을 자극한다는 지적이 있어 재무부대신으로 취임했다. 후지이 재무대신이 사임하자 물망에 올랐으나, 간 나오토가 이임. 이후 간이 총리가 되자 승임하는 형식으로 재무대신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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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과학대신
 다카키 요시아키(高木義明, 1945~)
 중의원(7선)·민주당(구 민사당 그룹) / 신임

 야마구치 현립 시모노세키 공고를 졸업 후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 입사한다. 노조 임원을 거쳐 1975년, 나가사키 시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87년, 나가사키 현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0년에 민사당 후보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4년, 신진당에 참가하고, 1998년에는 신진당 분당 후 신당 우애에 참여했다 민주당에 합류. 2005년 마에하라 집행부에서 부대표로 취임하고, 2006년 오자와 집행부에서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취임. 2010년, 간 나오토 개조내각에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


후생노동대신
 호소카와 리쓰오(細川律夫, 1943~)
 중의원(7선)·민주당(간 그룹) / 신임

 1966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1974년 변호사로 등록. 1983년부터 총선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하고, 1990년 총선에 사이타마에서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1996년에 민주당(구)과 1998년에 민주당(신) 창당에 참여했다.

 2009년, 하토야마 내각에서 후생노동부대신으로 취임하고, 2010년 간 내각에서 재임. 간 개조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으로 취임했다.


농림수산대신
 가노 미치히코(鹿野道彦, 1942~)
 중의원(11선)·민주당(하타 그룹) / 재임(2번째)

1965년, 가쿠슈인学習院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총선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81년에 운수정무차관, 1986년에 중의원 운수위원장을 맡았다. 1994년,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 미래新党みらい를 결성, 대표에 취임했다. 12월에 신진당 창당에 참가. 당초에는 오자와를 지지했지만, 1997년 당수 선거에서는 반 오자와의 기수로 입후보해 선전.

 이후 신진당 내의 반 오자와 보수 의원을 모아 국민의 소리国民の声를 창당하고 대표로 취임. 이어 하타 전 총리의 태양당太陽党, 호소카와 전 총리의 프롬 파이브フロム・ファイブ와 함께 하타를 당수로 하는 민정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에 민정당이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 부대표 등을 역임. 그러나 비서 급여 착복 등의 책임을 지고 2002년 탈당했다. 이후 복당하였으나, 제43회 총선에서 자민당의 엔도 도시아키遠藤利明에게 패배해 비례에서 부활, 2005년 총선에서는 다시 엔도에게 졌고 부활하지 못했다. 2009년 총선에서 엔도를 꺾고 9년만에 소선거구 당선. 2009년 9월, 중의원 예산위원장에 취임했다.

 2010년 9월, 간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취임.


경제산업대신
 오하타 아키히로(大畠章宏, 1947~)
 중의원(7선)·민주당(하토야마 그룹) / 신임

 무사시武蔵 공업대학(현 도쿄 도시 대학) 졸업. 1974년 석사 수료후 히타치 제작소日立製作所에 입사했다. 1978년부터 2년간 노조 임원으로 활동하고, 1986년 이바라기 현의원으로 당선. 1990년에 히타치 노조 후보로 중의원 당선. 간 개조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으로 첫 입각.


국토교통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해양정책 담당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1960~)
 중의원(3선)·민주당(무파벌) / 승임

 1982년 요코하마 국립대 토목학과 졸업 후 미쓰이三井 건설 사원, 컴퓨터 관련 상품 제조판매회사 이사(당시 혈족이사 외에는 역대 최연소 상장기업 이사), 북미 법인 최고경영책임자, 문구회사 임원 등을 역임. 2000년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으나, 2003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환경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방재 담당)
 마쓰모토 류(松本龍, 1951~)
 중의원(7선)·민주당(요코미치 그룹) / 신임

 주오中央 대학 정치학과 졸업. 1990년 총선에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할아버지는 부라쿠部落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쓰모토 지이치로松本治一郎.



방위대신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1938~)
 참의원(4선)·민주당(하타 그룹) / 유임

 와세다早稻田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75년 자민당 후보로 나가노 현의원 선거에서 당선.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나가노 현에서 출마해 당선. 1993년 신생당 창당 당시 하타와 함께 행동하고, 하타 내각에서 농림수산정무차관을 맡았다. 이후 신진당, 태양당,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1946~)
 중의원(6선)·민주당(마에하라 그룹) / 유임

 도쿄 대학 재학중이던 196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중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조 사건이나 일교조 관련 사건을 맡았다. 1990년 총선에서 일본사회당 후보도 도쿠시마에서 출마해 당선.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자 탈당해, 시코쿠 시민네트워크 대표를 거쳐 민주당(구)에 참여.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복귀. 하토야마 내각에서 국가공안위원장 등을 맡았다.



국가공안위원장·내각부 특명담당대신(소비자 및 식품안전 담당·저출산 대책 담당·남녀 공동 참여 담당)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1944~)
 참의원(3선, 중의원 2선)·민주당(요코미치 그룹) / 신임

 1962년, 후쿠시마福島 현립 후쿠시마 여고를 졸업하고 라디오 후쿠시마에 입사해 아나운서가 되었다. 1980년 중의원 선거에 일본사회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96년, 사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구) 결성에 참여했다. 1997년 미야기 현 참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2006년, 일본의 전쟁책임을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학습회 ‘일본의 역사리스크를 극복하는 연구회’ 발기인
* 2009년, 1932년 중국 평정산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의원단에 참여.
* 2001년, 참의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 연설에서 ‘과거와 마주할 수 없는 일본’이라는 국제적 이미지 불식을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과거 부정의에 모두 힘써야 한다며 전시戰時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의 촉진에 관한 법률안 성립을 요구했으며, 한국 방문시에 전 위안부 관계자의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다.


Canon | Canon PowerShot G5 | 1/60sec | F/3.2 | 23.0mm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 담당)·우정개혁 담당
 지미 쇼자부로(自見庄三郎, 1945~)
 참의원(초선, 중의원 7선)·국민신당 / 유임

 1970년, 규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규슈 대학 의학부 제1내과에서 활동. 1977년 박사과정 수료 후 의학부 강사등을 거쳐, 1983년 후쿠오카에서 자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

 2005년 총선에서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며 자민당 공천을 얻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자객 후보로 출마한 니시카와 교코西川京子에게 패배했다. 이후 탈당권고를 받아 탈당.

 2006년, 의원 복귀를 목표로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일본의사연맹 비례후보 추천공모에 입후보하지만 낙방했고, 이후 국민신당의 비례후보로 입후보하기로 결정하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민신당 부대표로 취임했고, 간사장 등을 거쳤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 담당·과학기술정책 담당)·우주개발 담당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1949~)
 중의원(5선)·민주당(하토야마 그룹) / 신임

 게이오기주쿠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평론가로 활약했다. 1986년 참의원 선거에 도쿄에서 세금당税金党 후보로 출마하지만 낙선.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4년, 일본신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클럽 시민리그民主新党クラブ・市民リーグ 대표위원을 거쳐, 1996년에 민주당(구) 창당에 참여했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2009년에 다시 당선되었다.


DoCoMo | N905i | F/2.8 | 5.2mm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새로운 공공」 담당)·국가전략 담당 /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郎, 1964~)
 중의원(6선)·민주당(무파벌) / 유임

 1987년 조치上智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91년 후쿠시마 현의원 선거에서 현 역대 최연소인 26세로 당선(자민당 소속)된다. 1993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12월에 소수정당이던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한다. 1996년, 민주당(구) 창당에 참여했고, 그 해의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비례대표로 부활). 2000년 총선에서 자민당 후보였던 호즈미 요시유키穂積良行에게 압승했다.(직후 호즈미는 정계를 은퇴) 이후 지방 분권 정책을 주로 담당했다.

 2005년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를 지지했고, 마에하라 집행부에서 간사장대리에 취임한다. 이후 오자와 집행부의 재임요청을 받았으나, 마에하라 집행부의 책임을 이유로 고사. 하토야마 대표 시절, 정책결정의 정부 일원화를 목표로 정책조사회가 폐지되었으나, 2010년 6월 간 나오토 대표 취임으로 부활하자 조사회장에 취임했고, 간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취임했다.

 민주당 내의 지방분권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행정쇄신 담당)·공무원 제도 개혁 담당
 무라타 렌호(村田蓮舫, 1967~)
 참의원(2선)·민주당(노다 그룹) / 유임(공무원 제도 개혁 담당 추가)

 타이완에서 타이완 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본 국적을 선택하고,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 대학 법학부를 졸업. 대학 재학 중 연예계에 데뷔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에서 활동. 2004년에 민주당 참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간 내각에서 국무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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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alih
    2010.09.23 22:21 신고 삭제 겹댓글 주소

    간 나오토가 입각한 이후로는 관료들 똘마니에다 친미주의자로 전락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더군요. 오자와가 음습해 보여도 오히려 뼛속까지 개혁주의자인데다 동북아 외교관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야 오자와가 낫다는 이야기도..

    뭐, 당장만 하더라도, 간 나오토 때문에, 아이돌 사진집 살 때마다 고혈을 짜낼 판입니다. 100엔에 1400원이라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도 아니고.

    1. Re: Favicon of http://www.7t7l.pe.kr BlogIcon 김천어
      2010.09.24 16:55 신고 삭제 주소

      뭐, 민주당으로서는 간나가 그래도 최상의 선택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엔고를 간나가 아니었다면 잡을 수 있었느냐가 사실 우리같은 서민한텐 가장 큰 문제긴 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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