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31 15:11, 김천어 근서

 번지라고 하는 것은 땅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어서 매겨 놓은 번호나 그 땅을 말한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지번이다. 지번이란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필지에 부여하는 지적공부에 등록한 번호를 말한다. 그 시행령에는 이 지번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되, 임야대장 및 임야도에 등록하는 토지의 지번은 숫자 앞에 “산”자를 붙인다거나 지번은 본번(本番)과 부번(副番)으로 구성하되, 본번과 부번 사이에 “-” 표시로 연결하며, 이 경우 “-” 표시는 “의”라고 읽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도로명 주소론자(?)에 따르면 그야말로 비합리와 혼란의 점철이겠으나, 이제는 도로명 주소가 시행됨에 따라 지번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1번지 이야기에서 발췌]


 일전에도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필지 하나에 번지 하나가 생기게 되고, 지적공부에 따라 일반적으로는 필지 하나에 건물 하나가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필지 하나에 여러 건물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건물 하나가 필지 여럿에 걸쳐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도로명 주소를 부동산 거래에 사용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은 그러한 경우에도 필지랑 건물을 동시에 매매하므로 큰 상관이 없었으나, 이 지방자치라는 것이 생긴 뒤로부터 이제 토지와 건물에 붙는 재산세를 각자가 가져가게 되었으니 필지와 건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유명한 것이 동화면세점 또는 감리교본부로 널리 알려진 세종대로사거리의 광화문빌딩이다. 도심지에는 한 필지에 건물 여럿이 있는 경우도 많고, 여러 필지에 건물 하나가 들어서 있는 경우도 많으나 대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광화문빌딩이라는 건물은 필지가 셋인데, 속한 행정구역 또한 세 곳이고, 관할 구區는 종로구와 중구의 둘이다. 사거리에 접한 측은 종로구 세종로, 새문안로에 접한 측은 종로구 신문로1가, 코리아나호텔에 접한 측은 중구 태평로1가에 속한다. 행정동 또한 종로구 측은 사직동에 속하고, 중구 측은 명동에 속한다.



 이 자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원래 이 자리는 국제극장과 (구)감리회관이 있던 자리이다. 해방 전에는 이왕직제작소 또는 미술품제작소가 있었고, 그 이후에는 국제극장이 들어섰다. 한국 영화역사에 남은 국제극장이 1950년대 후반에 건축되었다. 아직도 이 자리를 국제극장 자리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했고, 건물은 건축가 이승천이 설계하여 세련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건물이 가건물이었으니, 이 자리가 바로 세종로 녹화지대 또는 세종로 광장지였기 때문이다. 서울시의회 회의록을 보면 1957년 9월 28일 본회의에서 김제윤 의원은 "건설국장이 대단히 전지전능한 면을 또 하나 발견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국제극장이 심지어 가건축이라고 내세우기 때문에 우리시민이 볼 때에 저러한 대극장이 가건축에 속하는지 안하는 이 문제 이것은 건축허가 사무규정에 대한 법칙은 잘 몰라 그런데······ 보통상식으로 대단히 어려운 얘기가 아닌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후략)"라고 언급한다. 2층짜리 철근콘크리트 가건물 대극장이 출범한 것이다.


국제극장(1962.4.21.)감리회관(연도불상)


 이것은 물론 (구)감리회관(현 감리교본부와 구분하기 위해 이렇게 쓰기로 하자)도 마찬가지였다. 1958년 10월 2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는 이 감리회관의 문제를 비롯해 조사단을 구성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당시 김수길 의원은 국제극장 옆에 가건축이라는 명목으로 감리관이 지어지고 있는데, 국제극장도 가건축이고 감리관도 가건축이라면서 철근콘크리트로 짓자는 것이 무슨 일이냐며 조사단 구성을 주장했고, 박수형 의원은 조사단을 구성해봤자 국제극장 조사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극장이 여전히 운영되지 않느냐며 반대하는 바람에 조사단은 무산되었다. 역시 감리회관 또한 철근콘크리트의 웅장한 가건물이 된 것이다.


 아래 지도는 1950년대 어느 순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 육군 극동지도국의 서울시가지도 중 도심지 부분 일부를 확대한 것이다. 당시에 이미 국제극장이 들어서 있다. 그 아래 사진은 1983년도의 광화문네거리 가운데 국제극장 부분이다. 앞의 낮은 건물이 국제극장, 뒤에 있는 건물이 바로 위 사진의 감리회관이다.


Phase One | P 45 | 1/125sec | F/22.0 | 80.0mm | ISO-100서울시가지도 중 도심부확대(1950년대?)


광화문네거리(1983)


 이 국제극장과 감리회관은 1960년 이후 광장의 계획면적이 축소되면서 이후  30년 가까이를 이어오다가, 결국 도심재개발에 밀리어 철거를 면치못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태어난 것이 바로 지금의 광화문빌딩(동화면세점/감리교본부)이다. 1976년 당시의 신문로 재개발계획은 국제극장을 비롯한 건물을 모조리 철거해 지하 2층 지상 16층 규모의 건물을 짓고, 감리회관은 존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다시 감리회관을 포함해 모조리 헐어버리고 국제극장(제1지구), 감리회관(제2지구)에 15층 높이의 건물을, 지금의 세종로파출소가 있는 자리(제3지구)에 10층 규모의 건물을 짓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1980년의 일이었다.


1976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1980년 3월 15일자 경향신문198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그런데 이것이 어느순간에 합쳐지게 되었으니, 혹자는 대통령의 말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하고 서울시의 권유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물론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당초에는 건물만 하나요, 출입구는 둘이며 주차장도 둘이라는 이상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아래 기사 참조), 현재는 물론 하나의 빌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와중에 제3지구를 맡았던 한남관광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이 광화문빌딩 건설과 관련해서는 당시 범롯데가였던 동화면세점의 대주주인 롯데관광개발 김기병 회장의 증언이 있는데, 서울시가 불러서는 꼭 상업건물로 짓되 종교건물은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건설비도 없고 땅도 뒤쪽인 감리교를 배려하여 빌딩도 상층부를 주고, 돈도 일단 롯데에서 융통하고, 허가와 건설도 롯데가 책임지고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돈을 대려니 롯데관광개발 또한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동화면세점을 끌어들여 동화면세점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1985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1986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여기에서 이 빌딩의 특기성이 드러난다. 바로 필지가 여럿인데, 관할구역이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건물이 위치한 곳은 수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이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서로의 재산세를 둘러싸고 관할문제가 벌어졌으니, 그 해답이 바로 지금과 같이 같이 걷어 같이 나누는 식이 된 것이다. 이것도 처음에는 각자 걷어가던 식이었는데, 크게 발전했다고 할 만 하다. 대개 1층에서 11층은 종로구, 12층부터 20층까지는 중구가 관할하고 있으나 바로 국제극장과 감리회관의 관할에 따른 것이다.


1993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



 참고로 지금 이 건물은 동화면세점이 지하1층을, 1층과 2층은 동화투자개발과 감리회유지재단이 각각 3:2 비율로, 3층부터 11층까지는 동화투자개발이, 12층은 감리회 교역자은급재단이, 13층부터 20층까지는 감리회유지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주소는 대체로 종로구 세종대로로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2 카더라로 이 건물에 원래는 감리교본부라는 간판(?)이 없었는데, 롯데가 롯데 간판을 달겠다고 했더니 동화면세점이 그럼 감리교 의사를 물어봐야한다고 답하여 롯데가 그럼 이참에 감리교도 간판을 다는게 어떠냐 하여 달렸다는 전설(?)이 있다.


 쓴지가 오래되어 급하게 소품을 하나 써보았다. 사진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자료거나 국가기록원 자료거나 어디서 줏은 사진이다. 출처를 잊은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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