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06 00:26, 김천어 근서

천어(天漁)


급장이란, 반장(班長)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2학년에 한 급장이 살았다. 이 급장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담임이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교무실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급장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학교의 급식비 지원을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끼에 이르렀다. 교육청 감사(監使)가 각급학교(各級學校)를 순시하다가 그 학교에 들러 급식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해서,

“어떤 놈의 작자가 이처럼 급식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급장을 잡아 가두게 했다. 담임은 그 급장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가 없었다.

급장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학모(學母)가 역정을 냈다.

“너는 평생 모의고사만 좋아하더니 학교의 급식비를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구나. 쯧쯧 실장, 실장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학교에 사는 한 학생이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급장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대의원회의도 못하고, 급장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청소당번 지시를 받는데, 빗자루를 땅에 대고 실내화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그 급장이 가난해서 타먹은 급식비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급장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급장을 사서 가져보겠다.”

학생은 곧 급장을 찾아가 보고 자기가 대신 급식비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급장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그래서 학생은 즉시 급식비을 은행에 가져가서 급장의 스쿨뱅킹에 넣었다.

담임은 급장이 급식비를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담임이 몸소 찾아가서 급장을 위로하고, 또 급식비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급장이 빗자루를 들고 교실을 쓸고 짧은 걸레를 빨고 창문에 엎드려 ‘학생’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담임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너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는가?”

하고 말했다. 급장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본 학생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급장을 팔아서 급식비를 갚았읍지요. 학교의 부자 학생이 급장이올습니다. 제가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급장을 모칭(冒稱)해서 급장 행세를 하겠습니까?”

담임은 감탄해서 말했다.

“모범생이로구나 학생이여! 급장이로구나 학생이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급장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학생으로 증인을 삼고 임명장을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 교사가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담임은 교무실로 돌아가서 학교 안에 대의원(代議員) 들을 모두 불러 교정(校庭)에 모았다. 학생은 단상의 오른쪽에 서고, 급장은 단상의 아래에 섰다.

그리고 임명장을 만들었다.

위에 명문(明文)은 급장을 팔아서 급식비를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끼분이다.
오직 이 급장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학습도우미라 하고, 학생회에 나아가면 대의원이 되고, 학식이 있으면 모범생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담임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다섯시만 되면 일어나 교실에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눈은 가만히 책을 보고 발꿈치를 교실바닥에 모으고 앉아 수학정석(數學定石)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답만 부르는 짓을 하지 아니하되, 암산·풀이를 한다. 소매자락으로 책상을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발표할 때 허리를 굽히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학생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슬리퍼를 땅에 끈다. 그리고 성문영어(成文英語), 이비애수(理非哀愁)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공책 한 페이지에 백 자를 쓰며, 오직 총무회계를 시키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특기적성비를 묻지 말고, 더워도 양말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옆으로 급식소에 앉지 말고, 아이스크림을 먼저 훌쩍 훌쩍 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지 말고, 음주를 하지 말고, 우유를 들이켠 다음 입술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교복에 냄새가 배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교실벽를 발로 차지 말고, 성내서 펜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교실 빗자루를 괜히 뜯어 버리지 말고, 교실 컴퓨터를 욕하되 관리담당을 욕하지 말고, 아파도 보건실에 가지 말고, 조회 할 때 대리을 청해다 앞에 세우지 말고, 추워도 난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게임을 말고, 돈을 가지고 판치기를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급장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임명장을 가지고 행정실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

담임 2학년 모반 누구. 행정실장 학년부장 증서(證書)


이에 연구부장이 탁탁 학교장 직인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소리와 마주치매 학교마크가 종으로, 학교 도장이 횡으로 찍혀졌다. 학생은 교무부장이 임명장을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머엉하니 있다가 말했다.

“급장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급장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임명장을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교장이 학교를 세울 때 학생을 넷으로 구분했다. 학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학생회 임원이니 이것이 곧 급장이다. 급장의 이익은 막대하니 청소도 안 하고 명상의 노트도 작성 않고 약간 공식을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수시 합격이요, 작게는 정시 가산점이 되는 것이다. 실장의 임명장은 길이 20센치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수시자루인 것이다. 리더십특기자가 날 칠월에 처음 수시 1차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합격자가 되고, 잘 되면 SKY로 일류대를 맡게 되어, 집에 가는 시간이 세시가 되고, 수업시간에 운전면허 준비를 하며, 교실에는 책상이 만화책으로 가득차고, 사물함에 판타지 소설을 기른다. 궁한 실장이 교실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펜을 끌어다 먼저 자기 노트 필기를 하고 교실의 청소당번을 잡아다 자기 책상 밑의 쓰레기를 치우게 한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피크닉을 들이붓고 가방 끄덩을 희희 돌리고 필통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은 임명장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정치인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학생은 평생 다시 급장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천어집天漁集>


▶ 핵심 정리
갈래 : 한글 소설. 단편 소설. 풍자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발단 - 전개 - 결말의 3단 구성
문체 : 번역체. 산문체. 문어체
배경 : 시대적(현대). 공간적(학교). 사상적(천어사상)
주제 : 실장들의 공허한 관념, 비생산적, 특권 의식에 대한 비판

▶ 작품 해설
천어의 소설 중에서 그의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고학년 후기 실장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여기서 풍자의 일차적인 대상은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학생회 임원이다. 그리고 실장의 참된 도리를 생각하지 못한 채, 실장 신분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학생의 망상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투철한 천어 정신의 표현일 뿐 아니라, 문학이 경험적 사실성을 넘어서는 허구의 장치를 통해서도 진실을 드러낸다는 좋은 본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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