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거는 한국과 같이 후보자가 기재된 투표용지에 기표용구로 기표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자서식 투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 다들 후보자의 이름을 제대로 적는 것은 아니고, 잘못 적기도 하고 낙서를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어떻게 처리하게 되는가.


국가 단위의 선거에서는 중앙선거관리회가, 지방 단위의 선거에서는 각 지방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사무를 담당한다. 양 쪽 모두 정치적 중립이 보장되어 중앙선관회는 총리대신으로부터, 지방 선관위는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독립된 조직과 지휘계통을 가지고 있다. 각 위원은 공정한 식견을 가진 유권자 가운데에서 의회의 승인을 거쳐 임명된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 전부터 나올 법한 오기誤記 등 표의 유·무효 판단에 대한 기준을 각 개표소에 통지한다. 그러나 통지된 기준으로도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각 개표소에서 개표입회인의 의견을 참고로 하여 선거장이 유·무효를 판단한다.


만일 성씨가 같거나 이름이 같은 후보자가 2인 이상 존재할 때, 이를테면 다치하루 다이키치(立春大吉)와 다치하루 고키치(立春小吉)라는 후보가 있을 때 "다치하루立春"라고만 기재한다면 어느 쪽에 투표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권자가 투표한 것은 확실하므로, 같은 성씨를 가진 두 후보자에게 0.5표씩 부여(안분按分)한다. 유권자는 각자 1표 씩을 1명의 후보자에게 투표함에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에서 소수점 단위의 득표수가 나오는 것은 이때문이다.


[오기재]

후보자의 이름을 잘못 기재하더라도 해당 후보자의 이름을 적으려다 오자나 탈자가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면 유효표로 판단한다. 다만, 상식적으로 보아 오자의 범위를 넘어서 본래의 후보자를 가리키는지 의심스러울 때에는 무효이다. 판단이 애매한 경우 구체적으로 선거장이 각 투표입회인의 의견을 들어 판단한다.


과거 돗토리 현 지즈 정(智頭町)의 정의원 선거에서 '오카라オカラ'라고 쓴 표가 입후보자인 오카다 가즈히코(岡田和彦)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유효라고 판단하였으나, 이후 이의신청 심사를 통해 무효가 된 사례가 있다.


[별명, 통칭, 예명 등]

별명이나 통칭, 예명을 쓴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무효이다. 다만 그 별명이나 통칭이 유권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유효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유·무효 여부는 최종적으로 각 개표소의 선거장이 판단한다.


과거 라이브도어의 전 사장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가 출마한 중의원 선거에서 '호리에몬ホリエモン'이라고 쓴 표가 유효로 판단된 사례가 있다. 또 프로골퍼인 요코미네 사쿠라(横峯さくら)의 아버지 요코미네 요시로(横峯良郎)가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사쿠라 파파さくらパパ'라고 쓴 표도 유효로 판단되었다.


예능인이 입후보했을 때 사전에 이름과 함께 예명을 통칭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고 승인을 얻은 경우에는 해당 통칭으로도 선거운동이나 투표가 가능하다. 전 오사카 부지사 요코야마 노크(横山ノック)나 이와테 현의원 더 그레이트 사스케(ザ・グレートサスケ) 등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해당한다.


투표용지에 후보자 이름과 함께 쓸 수 있는 것은 정당명, 경칭, 주소, 직업에 한정한다. 그 밖의 사항을 기재했을 때에는 '타사기재他事記載'라고 하여 이름을 제대로 쓰더라도 모두 무효로 판단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후보자가 있을 때 각 기표내용에 따른 유·무효 여부를 살펴보자.


정당: 민주자유당

이름: 다치하루 다이키치(立春大吉/たちはるたいきち)

주소: 아와시마 (粟島県) 기치토 (吉東市) 기치토 1-2-34

직업: 소설가


立春大吉

또는 たちはるたいきち

또는 立春たいきち

또는 たちはる大吉

한자로 쓰건 히라가나로 쓰건, 또는 일부를 한자나 히라가나로 쓰건 후보자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유효하다.


立春 또는 たちはる

성만 쓰더라도 다른 후보 중에 "立春" 또는 "たちはる"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없다면 유효하다. 만약 동일한 성을 쓰는 후보가 있는 경우에는 안분한다.


大吉 또는 たいきち

이름만 쓰더라도 다른 후보 중에 "大吉" 또는 "たいきち"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없다면 유효하다. 만약 동일한 이름의 후보가 있는 경우에는 안분한다.


たち

다른 후보의 이름에 "たち"라는 글자가 포함된 사람이 없다면 유효하다. 만약 있다면 안분하거나 무효로 판단한다.


立春太吉

大와 太를 잘못 적은 것이 명백하므로 유효하다.

立春体吉
体吉는 大吉와 일본어로 발음이 동일하다. 따라서 大吉을 잘못 쓴 것이 명백하므로 유효하다. 다만 体吉이라는 이름을 쓰는 후보가 있거나 그런 이름의 유명인이나 예능인이 있는 경우에는 무효로 본다.

立春某某
某某라는 이름을 쓰는 후보자나 예능인, 유명인이 있다면 무효로 본다.

りっしゅんたいきち
이름을 잘못 읽고 쓴 것인지 애매하므로 무효로 본다. 다만 사전에 저러한 이름을 통칭 사용한다는 신고를 제출한 경우에는 유효하다.

민주자유당

정당명만 기재한 경우 무효이지만, 같은 정당의 다른 후보자가 없는 경우에는 선거장이 판단한다.


다치하루 다이키치 님

경칭을 기재하더라도 유효하다.


다치하루 다이키치 (둥글둥글한 글씨)

글씨체와 관계없이 상식적으로 보아 문자로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면 유효하다


다치★하루★다이★키치

'★'는 이름의 일부나 경칭이 아닌 타사기재에 해당해 무효이다.


대머리 아저씨 또는 뚱보 아저씨

신체적 특징은 타사기재에 해당해 무효이다.


다이쨩

별명은 어느 후보자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무효이다. 다만 유권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선거장의 판단 등에 의하여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사전에 통칭 사용의 신고를 한 경우에는 유효하다.


기치토 시 기치토 1-2-34 다치하루 다이키치

이름과 함께 주소를 기입하더라도 유효하다. 다만 기입한 주소가 틀린 경우에는 무효이다.


소설가 다치하루 다이키치

이름과 함께 직업을 기입하더라도 유효하다. 다만 기입한 직업이 틀린 경우에는 무효이다.


소설가

직업만 적은 경우에는 무효이지만, 같은 직업을 가진 다른 후보자가 없는 경우에는 선거장이 판단한다.


글쟁이 다치하루 다이키치

'글쟁이'는 속어로 정식 직업명이 아니므로 무효이다.


다치하루 다이키치에게 투표합니다.

다치하루 다이키치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다치하루 다이키치 바보

다치하루 다이키치 힘내라

'에게 투표합니다'를 비롯해 사례 모두 타사기재에 해당해 무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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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26년(オ) 제1023호 손해배상청구사건

헤이세이 27년(2015년) 12월 16일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

平成26年(オ)第1023号 損害賠償請求事件, 平成27年12月16日 大法廷判決



주 문

 본건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비용은 상고인들의 부담으로 한다.



이 유

 상고대리인 사카키바라 후지코榊原富士子의 상고이유에 대하여



제1 사건의 개요


1.

 본건은 상고인들이 부부가 혼인한 때에 정하는 바에 따라 부 또는 처의 성씨를 칭하도록 정한 민법 제750조의 규정(이하 '본건 규정'이라 한다.)은 헌법 제13조, 제14조 제1항, 제24조 제1항 및 제2항 등에 위반한다고 주장하고, 본건 규정을 개폐하는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였다는 입법부작위의 위법을 이유로 피상고인에 대하여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에 근거하여 손해배상을 구한 사안이다.


2.

 원심이 적법하다고 확정한 사실관계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상고인 X1(성) x1(명)(호적상의 성명은 「Ax1」이다.)은 Aa와 혼인 시에 부의 성씨를 칭한다고 정하였으나, 통칭의 성씨로 「X1」을 사용하고 있다.
  2. 상고인 X2x2와 상고인X3x3은 혼인 시에 부의 성씨를 칭한다고 정하였으나, 협의상의 이혼을 하였다. 상고인들은 그 후 다시 혼인신고를 제출하였으나, 혼인 후의 성씨의 선택이 되지 아니하여 불수리되었다.
  3. 상고인 X4x4(호적상의 성명은 「Bx4」이다.)는 Bb와의 혼인 시 부의 성씨를 칭한다고 정하였으나, 통칭의 성씨로 「X4」를  사용하고 있다.
  4. 상고인 X5x5(호적상의 성명은 「Cx5」이다.)는 Cc와의 혼인 시 부의 성씨를 칭한다고 정하였으나, 통칭의 성씨로 「X5」를  사용하고 있다.



제2 상고이유 가운데 본건 규정이 헌법 제13조에 위반한다고 한 부분에 대하여


1.

 논지는 본건 규정이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된 인격권의 한 내용인 '성씨의 변경을 강제 받지 아니할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여 헌법 제13조에 위반한다고 하는 것이다.


2.

(1) 성명은 사회적으로 보면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식별하여 특정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지만, 동시에 그 개인으로부터 본다면 사람이 개인으로서 존중받을 기초이고, 그 개인의 인격의 상징으로 인격권의 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最高裁昭和58년(オ) 第1311号 同63年 2月 16日 第三小法廷判決・民集42巻 2号27頁 참조).


(2) 그러나 성씨는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의 일부로서, 법률이 그 구체적인 내용을 규율하고 있는 것이므로, 성씨에 관한 상기 인격권의 내용도 헌법상 일의적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취지에 따라 해석할 때에 정해진 법제도를 먼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법제도를 분리하여 성씨가 변경되는 것 자체를 가지고 즉시 인격권을 침해하고, 위헌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상당하지 아니하다.


(3) 따라서 민법에 있어서 성씨에 관한 규정을 통람通覽하면, 사람은 출생 시에 친생자[親生子, 일본 민법상 적출자摘出子]에 대하여는 부모의 성씨를, 친생자가 아닌 자에 대하여는 모의 성씨를 칭하도록 하는 것에 의하여 성씨를 취득하고(민법 제790조), 혼인 시에 부부의 일방은 타방의 성씨를 칭하도록 하는 것에 의하여 성씨가 바뀌며(본건 규정), 이혼이나 혼인의 취소 시에 혼인에 의하여 성씨를 고친 자는 혼인 전의 성씨를 회복한다(동법 제767조 제1항, 제771조, 제749조)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양자는 입양 시에 양부모[養親]의 성씨를 칭하도록 하는 것에 의하여 성씨가 바뀌며(동법 제810조), 파양이나 입양의 취소에 의하여 입양 전의 성씨를 회복한다(동법 제816조 제1항, 제808조 제2항) 등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성씨의 성질에 관하여, 성씨는 이름과 같이 개인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는 것이나 이름과는 분리된 존재로서 부부 및 그 사이의 미혼의 자나 양친과 양자가 동일한 성씨를 칭하도록 하는 것에 의하여 사회의 구성요소인 가족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은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초적인 집단단위이므로, 그러한 개인의 호칭의 일부인 성씨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하나로 정하고 있는 것도 합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본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혼인이라는 신분관계의 변동을 스스로의 의사로 선택하는 것과 함께 부부의 일방의 성씨를 고친다는 모습이 있는 것이고, 스스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씨를 고치도록 하는 것이 강제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씨는 개인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고, 이름과 함께 사회적으로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식별하고 특정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스스로의 의사만으로 자유롭게 정하거나 또는 고치거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본래의 성질에 따른 것이 아니고, 일정하고 통일된 기준에 따라 정하며, 또한 바꾼다고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취급이라고 할 수 없는 점, 상기와 같이 성씨는 이름과는 분리된 존재로서 사회의 구성요소인 가족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는 점을 본다면 성씨가 친자관계 등 일정한 신분관계를 반영하고, 혼인을 포함한 신분관계의 변동과 함께 바뀌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성질상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상과 같이 현행의 법제도의 아래에서 성씨의 성질 등에 비추어 보면 혼인 시에 "성씨의 변경을 강제받지 아니할 자유"가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인격권의 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본건 규정은 헌법 제13조에 위반하지 아니한다.


3.

 무엇보다도 상기와 같이 성씨가 이름과 더불어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식별하고 특정하는 기능을 가진 것 이외에 사람이 개인으로서 존중되는 기초이며, 그 개인의 인격을 일체로서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 따라 성씨를 바꾸는 자에게 그에 따른, 이른바 아이덴티티의 상실감을 가진다거나, 종전의 성씨를 사용하다가 형성되어 온 타인으로부터 식별되고 특정되는 기능이 저해되는 불이익이나 개인의 신용, 평가, 명예감정 등에도 영향이 미친다는 불이익이 생길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특히 최근에 만혼화晩婚化가 진행되고 혼인 전의 성씨를 사용하는 중에 사회적인 지위나 업적이 구축된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으므로 혼인과 더불어 성씨를 고치는 것에 의하여 불이익을 입는 자가 증가하여 온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혼인 전에 구축된 개인의 신용, 평가, 명예감정 등을 혼인 후에도 유지하는 이익 등은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된 인격권의 한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뒤에서 쓴 대로 성씨를 포함한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의 본질을 검토하면 상당히 고려해야 하는 인격적 이익이라고는 할 수 있고, 헌법 제24조에서 인정하는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는 것인가 아닌지를 검토할 때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제3 상고이유 가운데 본건 규정이 헌법 제14조 제1항에 위반한다고 한 부분에 대하여


1.

 논지는 본건 규정이 96% 이상의 부부가 부의 성씨를 선택한다는 성차별을 발생시켜 대부분 여성만 불이익을 입게 되는 효과를 가진 규정이므로, 헌법 제14조 제1항에 위반한다는 것이다.


2.

 헌법 제14조 제1항은 법 앞의 평등을 정하고 있고, 이 규정은 사안의 성질에 따라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한 것이 아닌 한, 법적으로 차별적 취급을 금지하는 취지의 규정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당 재판소가 설시한 바와 같다(最高裁 昭和37年(オ) 第1472号 同39年 5月 27日 大法廷判決・民集18巻 4号 676頁,最高裁 昭和45年(あ) 第1310号 同48年 4月 4日 大法廷判決・刑集27巻 3号 265頁 등).


 따라서 검토하면 본건 규정은 부부가 부 또는 처의 성씨를 칭하도록 하고 있고, 부부가 어느 쪽의 성씨를 칭할 것인가를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 사이의 협의에 맡기고 있으므로, 그 문언상 성별에 근거하여 법적으로 차별적인 취급을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본건 규정이 정하는 부부동성제[夫婦同氏制] 그 자체에 남녀 간의 형식적인 불평등이 존재하지는 아니한다.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 사이의 개개의 협의 결과로서 부의 성씨를 선택하는 부부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본건 규정의 존재 자체에서 생기는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본건 규정은 헌법 제14조 제1항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3.

 무엇보다도 성씨의 선택에 관하여 지금까지 부夫의 성씨를 선택하는 부부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 현상이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 쌍방의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에 의한 것인가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것이고, 가령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적인 의식이나 관습에 의하여 영향이 있는 것이라면 그 영향을 배제하여 부부간에 실질적인 평등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은 헌법 제14조 제1항의 취지에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성씨를 포함한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의 존재 의의를 검토하면 마땅히 고려하여야 할 사항의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다음에서 쓴 헌법 제24조에서 인정하는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은 것인가 하는 검토에서 마땅히 고려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제4 상고이유 가운데 본건 규정이 헌법 제24조에 위반한다고 한 부분에 대하여


1.

 논지는 본건 규정이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의 일방이 성씨를 고치도록 하는 것을 혼인신고의 요건으로 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혼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국회의 입법재량의 존재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본건 규정은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헌법 제24조에 위반한다는 것이다.


2.

(1) 헌법 제24조는 제1항에서 “혼인은 양성兩性의 합의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부부가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기본으로 하며, 상호의 협력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혼인을 할지 말지, 언제 누구와 혼인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당사자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취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본건 규정은 혼인의 효력의 하나로 부부가 부 또는 처의 성씨를 칭하는 것을 정하는 것으로, 혼인을 하는 것에 대하여 직접적인 제약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의 내용의 의미에 따르지 아니한 것을 이유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택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상기 법제도를 정한 법률이 혼인을 하는 것에 대하여 헌법 제24조 제1항의 취지에 따르지 아니한 제약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법제도의 내용에 따라 혼인을 하는 것이 사실상 제약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는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의 내용을 정함에 있어서 국회의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어선 것인지 아닌지 검토할 때에 고려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2) 헌법 제24조는 제2항에서 “배우자의 선택, 재산권, 상속, 주거의 선정選定, 이혼과 혼인 및 가족에 관한 그 밖의 사항은 법률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입각하여 제정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혼인 및 가족에 관한 사항은 관련한 법제도에서 그 구체적 내용이 정해진다는 것이므로, 당해 법제도의 제도 설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 헌법 제24조 제2항은 구체적인 제도의 구축을 제1차적으로는 국회의 합리적인 입법재량에 맡긴다는 점과 함께 그 입법에 있어서 동조 제1항도 전제로 하면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요청, 지침을 나타내는 것에 의하여 그 재량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헌법 제24조가 본질적으로 다양한 요소를 검토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입법작용에 대하여 입법상의 요청, 지침을 명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요청, 지침은 단순히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된 인격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양성의 형식적인 평등이 보장된 내용의 법률이 제정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 직접 보장된 권리라고는 할 수 없는 인격적 이익까지도 존중하여야 한다는 점, 양성의 실질적인 평등이 보장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 혼인제도의 내용에 따라 혼인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부당하게 제약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 등에 대하여도 충분히 배려된 법률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 부분에서도 입법재량에 한정적인 지침을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1) 다른 한편으로 혼인 및 가족에 관한 사항은 국가의 전통이나 국민감정을 포함한 사회상황에서의 다양한 요인을 포함하고 있고,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 부부나 친자 관계에 대한 전체적인 규율을 고려한 종합적인 판단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헌법상 직접 보장된 권리라고는 할 수 없는 인격적 이익이나 실질적 평등은 그 내용으로 다양한 것이 고려되며, 그 실현의 본질적인 모습은 그때마다의 사회적 조건, 국민생활의 상황, 가족의 본질적 요소 등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렇다면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된 인격권을 부당하게 침해하여 헌법 제13조에 위반하는 입법조치나 불합리한 차별을 정하여 헌법 제14조 제1항에 위반하는 입법조치를 취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점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고, 헌법 제24조의 요청, 지침에 따라 구체적으로 어떠한 입법조치를 취할 것인가의 선택결정이 상기 (1)과 같이 국회의 다방면에 걸친 검토와 판단에 맡겨져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를 정한 법률의 규정이 헌법 제13조, 제14조 제1항에 위반하지 않는 경우에 다시금 헌법 제24조에도 적합한 것으로서 인정되는지 아닌지는 당해 법제도의 취지나 동 제도를 채용하게 된 것에 따라 생기는 영향에 바탕하여 검토하고, 당해 규정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의 요청에 비추어 합리성을 잃고 국회의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인가 아닌가하는 관점에서 판단하여야 한다는 점이 상당하다.


4.

 이상의 관점에서 본건 규정의 헌법 제24조 적합성에 대하여 검토한다.


(1)

가. 혼인과 더불어 부부가 동일한 성씨를 칭하는 부부동성제는 구 민법(쇼와 22년(1947) 법률 제222호에 의한 개정 전의 메이지 31년(1898) 법률 제9호)이 시행된 메이지 31년(1898)에 우리나라의 법제도로서 채용되어, 우리나라의 사회에 정착하여 온 것이다. 전기前記와 같이 성씨는 가족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는 바, 현행의 민법 아래에서도 가족은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초적인 집단단위로 이해되며, 그 호칭을 하나로 정하는 것에는 합리성이 인정된다.


 그리고 부부가 동일한 성씨를 칭하는 것은 상기의 가족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공시하고, 식별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혼인의 중요한 효과로서 부부간의 자가 부부의 공동친권에 복종하는 친생자라고 하는 점, 친생자인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자가 양친 쌍방과 동일한 성씨로 구성될 것을 확보하는 것에도 일정한 의의가 있다는 점이 고려된다. 또한 가족을 구성하는 개인이 동일한 성씨를 칭하는 것에 따라 가족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있다는 점을 실감하는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바이다. 더욱이 부부동성제의 아래에서는 자의 입장으로서 어느 부모도 같은 성씨를 동일하게 가진다는 점에 의한 이익을 향유하기 쉽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기前記와 같이 본건 규정이 정하는 부부동성제 그 자체에 남녀 간의 형식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부부가 어느 쪽의 성씨를 칭할 것인지는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 사이의 협의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고 있다.


나. 이에 대하여 부부동성제 아래에서는 혼인과 더불어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의 일방은 반드시 성씨를 고치도록 하는 점, 혼인에 의하여 성씨를 바꾼 자에게 그에 의하여 이른바 아이덴티티의 상실감을 가진다거나 혼인 전의 성씨를 사용하는 도중에 형성된 개인의 사회적인 신용, 평가, 명예감정 등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성씨의 선택에 관하여 부夫의 성씨를 선택하는 부부가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현상에서 본다면, 처가 되는 여성이 상기의 불이익을 받을 경우가 많은 상황이 생기고 있는 것을 추인追認할 수 있다. 또한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의 어느 한 쪽이 이러한 불이익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오히려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부동성제는 혼인 전의 성씨를 통칭通稱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최근 혼인 전의 성씨를 통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바, 상기의 불이익은 이러한 성씨의 통칭 사용이 확대되는 것에 의하여 일정정도 완화될 수 있는 것이다.


다. 이상의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본건 규정에 채용된 부부동성제가 부부가 다른 성씨를 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기와 같은 상황 아래 직접적으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의 요청에 비추어 합리성을 잃은 제도라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본건 규정은 헌법 제24조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2) 또한 논지로는 부부동성제를 규제라고 파악한 뒤 이에 따라서 규제의 정도가 작은, 성씨에 관계된 제도(이를테면 부부별성을 희망하는 자에 이를 가능하도록 하는 이른바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채택할 여지가 있는 점에 대한 지적을 하는 부분이 있는 바, 상기 (1)의 판단은 그러한 제도에 합리성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기와 같이 부부동성제의 채용에 대하여는 친생자 제도 등 혼인제도나 성씨의 본질적 요소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 의거하는 바가 적지 않고, 그러한 상황에 관한 판단을 포함하여 그러한 종류의 제도의 방향은 국회에서 논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5 그 나머지 상고이유에 대하여


 논지는 헌법 제98조 제1항 위반 및 이유의 불비不備를 말하지만, 그 실질은 단순히 법령 위반을 말하는 것으로 민사소송법 제312조 제1항 및 제2항에 규정된 사유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아니한다.


제6 결론


 이상에 따르면 본건 규정을 개폐하는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입법부작위는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적용상 위법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상고인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논지는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재판관 야마우라 요시키山浦善樹의 반대의견 외에 재판관 전원 일치의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또한 재판관 데라다 이쓰로寺田逸郎의 보충의견, 재판관 사쿠라이 류코櫻井龍子, 재판관 오카베 기요코岡部喜代子, 재판관 오니마루 가오루鬼丸かおる, 재판관 기우치 미치요시木内道祥의 각 의견이 있다.


재판관 데라다 이쓰로의 보충의견은 다음과 같다.


 오카베 재판관 및 기우치 재판관의 각 의견에서의 헌법적합성의 논의에 비추어 다수의견의 제4의 4.의 기술을 부연하는 취지로 보충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본건에서 상고인들이 주장하는 것은 성씨가 같은 부부만이 아니라 성씨가 다른 부부를 법률상의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으로, 이른바 법률관계의 메뉴에 바람직한 선택지가 준비되지 아니한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현행 제도의 불비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헌법적합성 심사에서 재판소가 적극적으로 평가를 하는 것은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다.


(1) 대개 사람끼리 어떤 연결을 가지고 생활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유롭게 정하여야 함이 마땅한 일이다. 헌법에서도 그것을 제13조에 따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법률제도로 보면 혼인부부와 같은 형태 위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더라도, 가족제도의 일부로 구성된 가까운 제3자만이 아니라 넓게 사회에 효과를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위치지어 진다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현행 민법에서도 친자관계의 성립, 상속에서의 지위,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거래상의 의무 등에 대하여 부부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형태의 부부관계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한 법률제도로서의 성격이나 현실로 부부, 친자 등으로 구성된 가족이 넓게 사회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되어 있다는 사정 등에서 법률상의 구조로서의 혼인부부도 기타의 가족관계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구성원 일반으로부터 보더라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규격화된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개별 당사자의 다양한 의사에 따라 변용되는 것에 대하여는 억제하고 있다. 민사상의 법률제도로서 당사자의 의사에 의하여 법률관계를 변용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는 그 밖에 법인제도(회사제도)나 신탁제도 등이 있으나, 가족제도는 그들과 비교하더라도 사회 일반에 관한 정도가 큰 것이라고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세가 한층 강하다고 생각된다.


(2) 현행 민법에서 혼인은 상기와 같이 상속관계(제890조, 제900조 등),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거래관계(제761조) 등 당사자 상호의 관계에 그치지 않는 의의·효력을 가진 것이지만, 남녀 간에 인정되는 제도로서의 혼인을 특징짓는 것은 친생자 제도(제772조 이하)를 둔 것밖에 없고, 그 제도가 혼인제도의 효력으로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주). 현행 민법 아래에서는 부부 및 그 친생자가 가족관계의 기본을 이룬다고 하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 것도 그러한 구조의 이해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혼인과 결합되어 있는 친생자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사회학적으로 보더라도 불합리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고, 헌법 제24조와의 정합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부의 성씨에 관한 규정은 바로 부부 각각과의 동일한 성씨를 칭하는 등의 연결을 가진 존재로서 친생자가 의의지어지고 있는 점(제790조 제1항)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는 다수의견에서도 같은 취지이다(다만, 이것만이 성씨에 관한 규정의 정합성을 근거 짓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다수의견에서 설시하고 있는 대로이다.). 복잡성을 피하고 규격화하도록 하는 요청 속에서 구조를 구성하고자 하는 경우에 법률상의 효과가 되는 기둥을 상정하고, 그것과의 정합성을 추구하며 다른 부분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어떠한 불합리가 없다고 고려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부부 성씨의 제도를 사회의 다수가 받아들이고 있는 때에 그 원칙으로서의 위치 지어진 합리성을 의심할 여지가 그정도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성동일성 장애자의 성별의 취급의 특례에 관한 법률에 기초하여 남성에서의 성별의 취급의 변경 심판을 받은 자의 처의 잉태자와 적출추정 규정의 적용에 관한 最高裁 平成25年(許) 第5号 同年 12月 10日 第三小法廷決定・民集67巻 9号 1847頁에 있어서 오카다 보충의견(1852頁 이하) 참조.

친생추정·친생부인의 구조는 처에 의한 잉태 출생자는 부 스스로가 부정하지 아니하는 한 부를 부로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으로, 처가 자를 얻은 경우에 부의 의사에 반하여 다른 남성으로부터 그 자子가 스스로를 부라고 하는 자라는 뜻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의를 혼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법률상의 혼인으로서의 효력의 핵심부분이라는 효과가 바로 사회적으로 넓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그에 따라 법률혼은 형태에 따른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가족의 법률관계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요구하는 관계가 다양화하는 것에 대하여 규격화된 구조를 답답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충분히 파악되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을 고려하여 의향에 따른 선택지를 두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는 의견·반대의견의 입장은 그러한 점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법심사라는 입장에서 현행 제도가 불합리한지 아닌지를 논함에 있어서는 상기의 경향을 그대로 긍정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려운 바가 있다.


 상기와 같이 이 분야에서는 당사자의 합의를 계기로 하는 것에 의한 제도를 복잡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억제적인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는 벽이 우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친자의 현실의 가족으로서의 모습이 원래부터 지역 등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는 가운데, 법적으로는 부부관계, 친자관계가 규격화되어 정해져왔다는 것이 지적되어 온 것이다. 여러 외국의 입법에서도 유연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유연화하고자 하는 것이 상당한지는 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평가에 따르는 바가 크다. 다음으로, 선택지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불합리한가 어떤가에 대하여는 제도 전체와의 정합성이나 현실적 타당성을 고려한 뒤에야 선택지가 정하여질 것 내지는 적확한 판단을 하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 바, 현행 제도의 친생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 성씨를 다르게 하는 부부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는 논의의 폭을 남기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친생자의 성씨를 어떻게 하는가 등의 점에서 친생자의 구조의 정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나누어진 바가 있고(이미 헤이세이 8년(1996)의 혼인제도에 관한 법제심의회의 답신에서 자녀의 성씨의 본질을 둘러싸고 논의를 정리하는 것이 곤란해졌던 일이 있다.), 어떠한 구조를 선택지의 대상으로 검토의 도마 위에 올릴 것인가는 유동적인 요소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현행법에서 정하는 친생자의 구조와의 연결이 혼인제도의 본질적 요소로서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상기와 같은 바이며, 친생자의 구조와 분리시킨 새로운 제도를 구상하는 것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것까지 고려에 넣은 뒤에 판단하게 된다면 사법의 장에서 심사의 한계를 훨씬 넘게 된다. 또한 성씨의 합리적인 방향은 그 기반이 상기와 같이 민법에 정한다고 하더라도, 다수의견에서 나타난 본질적인 성격을 감안하면서 그 사회생활 상의 의의를 감안하여 넓게 검토를 해 나가는 것으로 상당성을 늘릴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방향에서의 검토는 동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사회생활에 관계된 제 사정의 요소를 묻는 정책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다기多岐에 걸친 조건 아래에서의 종합적인 검토를 염두에 둔다면, 여러 조건에 대하여 상당히 객관적으로 명백하다고 할 상황에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다고 할 수 없는 상황 아래에서는 선택지가 두어져있지 않다는 것의 불합리를 재판의 테두리 내에서 찾기는 곤란하고, 오히려 이를 국민적 논의, 즉 민주주의적인 프로세스에 맡기는 것에 의하여 합리적인 구조의 방향을 폭 넓게 검토하여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일의 성격에 맞는 해결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지의 여부가 특정한 소수자의 습속習俗에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적인 프로세스에 의하여 공정한 검토에의 기대를 방해할 수 있는 사정도,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혼에 있어서 혼씨속칭婚氏続称의 구조(민법 제767조 제2항, [이혼 후에도 혼인 시의 성씨를 유지하는 것])를 예로 들어 신분관계의 변동과 더불어 성씨를 바꾸지 않을 선택지가 현행법에 두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으나, 이혼 후의 성씨의 합리적인 방향에 대하여 국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새로운 선택지를 두어 그 구조가 법 개정에 의하여 두어졌다고 하는, 그 실현까지의 경위를 간과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야말로 문제의 성격에 대하여 상기 다수 의견의 이해가 바르다는 것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재판관 오카베 기요코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건 상고를 기각하여야 한다는 다수의견의 결론에는 찬성하지만, 본건 규정이 헌법에 위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설시에는 동조할 수 없으므로 그 점에 관하여 의견을 기술하고 싶다.


1. 본건 규정의 헌법 제24조 적합성

(1) 본건 규정의 쇼와 22년 민법 개정시의 헌법 제24조 적합성
 다수의견이 말한 대로 성씨는 개인의 호칭으로서의 의의가 있고, 이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개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식별하고 특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와 친자親子라는 신분관계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관계인 동시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그러한 관계를 표상하기 위하여 동일한 성씨라는 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합리적인 제도로 이해된다. 사회생활 위에서 그 신분관계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고, 부부와 그 사이의 미성숙 자녀라는 공동생활 상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도 유익하다.

 부부동성의 제도는 메이지 민법(쇼와 22년 법률 제222호에 의하여 개정되기 전의 메이지 31년 법률 제9호) 아래에서 대부분의 경우 처는 혼인에 의하여 부의 가에 들어가고, 가의 명칭인 부의 성씨를 칭하는 것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쇼와 22년 법률 제222호에 의한 민법 개정 시에도 부부와 그 사이의 미성숙 자녀라는 가족을 염두로, 처는 가정 내에서 가사육아를 맡고 있는 근대적 가족생활이 표준적인 모습으로서 인식되었고, 부의 성씨는 혼인에 의하여 변경되지 않고 처의 성씨가 부와 동일하게 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아니하였다. 실제 생활에서도 부가 생계를 담당하고, 처가 그를 도와 또는 가사육아를 맡고 있는 태양態様이 많았으므로 처가 그 성씨를 변경하더라도 특히 문제를 발생시키는 일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본건 규정은 부부가 가에서 독립하여 각자가 독립한 법주체로서 협의하여 어느 쪽의 성씨를 칭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형식적 평등을 규정한 점에 의의가 있고, 쇼와 22년(1946)에 제정된 당시로서는 합리성이 있는 규정이었다. 따라서 본건 규정은 제정 당시에 있어서는 헌법 제24조에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본건 규정의 현 시점의 헌법 제24조 적합성
가. 그런데 본건 규정의 제정 후에 장기간이 경과하여 최근 여성의 사회진출은 현저히 늘어나게 되었다. 결혼 전에 일하는 여성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혼인 후에 일하는 여성도 증가하였다. 그 직업도 부夫를 돕는 가내적인 일에 그치지 않고 개인, 사회, 기관 기타와의 사이에서 독립하여 법주체로서 계약 등을 하고 일하며, 또한 사업 주체로서 경제활동을 하는 등 사회와 넓게 접촉하는 활동에 종사할 기회도 증가하여 왔다. 그러자 결혼 전의 성씨에서 혼인 후의 성씨로 변경하는 것에 의하여 당해 개인이 동일인이라고 하는 개인의 식별, 특정에 곤란을 가져오게 되는 사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혼인 후에도 혼인 전의 성씨에 의하여 사회적·경제적인 상황에서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욕구가 높아져 왔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식별곤란이라는 것은 단순히 불편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혼인 전에 영업실적을 쌓은 자가 혼인 후의 성씨로 변경하게 된 것에 의하여 외관상 그 실적에 의한 평가를 받을 수 없게 될 우려가 있고, 또한 혼인 전에 특허를 취득한 자와 혼인 후에 특허를 취득한 자가 동일인이라고 인식되지 않을 우려가 있으며, 또는 논문의 연속성이 인정되지 않을 우려가 있는 등 그 업적, 실적, 성과 등의 법적 이익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될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성씨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기능이 동일성 식별기능이라고 생각한다면, 혼인에 의하여 취득한 새로운 성씨를 사용함에 의하여 당해 개인의 동일성 식별에 지장을 미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혼인 전의 성씨 사용을 희망하는 것에는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동일성 식별을 위한 혼인 전의 성씨 사용은 여성의 사회진출의 추진, 일과 가정의 양립책 등에 의하여 혼인 전으로부터 계속하여 사회생활을 보내는 여성이 증가하는 것과 함께 그 합리성과 필요성이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의 글로벌화나 인터넷 등에서 성명이 검색할 수 있는 등의 이른바 성명 자체가 세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성씨에 의한 개인 식별성의 중요성은 더욱 큰 것이며, 혼인 전부터의 성씨의 사용의 유용성,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쇼와 60년(1985)에 비준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女子に対するあらゆる形態の差別の撤廃に関する条約]에 근거하여 설치된 여자차별철폐위원회에서도 헤이세이 15년(2003) 이래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민법에 부부의 성씨의 선택에 관한 차별적인 법 규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그 폐지를 요청한 일이 있다.

나. 다음으로 성씨는 이름과의 복합에 의하여 개인 식별의 기호로 되어있지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성씨는 신분관계의 변동에 의하여 변동하는 것이므로 신분관계에 내재하는 혈연 내지는 가족, 민족, 출신지 등 당해 개인의 배경이나 속성 등을 포함한 것으로, 성씨를 변경한 일방은 이른바 아이덴티티를 잃은 것과 같은 상실감을 가지기에 이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로 96%를 넘는 부부가 부의 성씨를 칭하는 혼인을 하고 있는 바에 비추어볼 때, 최근에 확대되어 온 상기의 개인 식별 기능에 대한 지장, 자기상실감 등의 부담은 거의 처에게 생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의 성씨를 칭하는 것은 부부가 되고자 하는 자 쌍방의 협의에 의한 것이라지만, 96%의 다수가 부의 성씨를 칭하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경제적인 입장이 약하고, 가정생활에서의 입장이 약하고, 다양한 사실상의 압력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것이고, 부夫의 성씨를 칭하는 것이 처의 의사에 바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사결정의 과정에 현실의 불평등과 역학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배려를 하지 않은 채 부부 동성에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은 많은 경우에 처가 될 자만이 개인의 존엄의 기초인 개인 식별 기능을 잃게 되고, 또한 자기상실감이라는 부담을 지는 것이 되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입각한 제도라고는 할 수 없다.

다. 그리고 성씨를 고치는 것에 의하여 발생하는 상기와 같은 개인 식별 기능에의 장애, 자기상실감 등의 부담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부부가 되고자하는 자의 어느 일방이 이러한 불이익을 받는 것을 피하고자 법률상의 혼인을 하지 아니한다는 선택을 하는 자를 낳고 있다.

 본건 규정은 혼인의 효력의 하나로서 부부가 부 또는 처의 성씨를 칭할 것을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인은 호적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신고하는 것에 의하여 그 효력이 생긴다고 하고(민법 제739조 제1항), 부부가 칭할 성씨는 혼인신고시의 필요적 기재사항이다(호적법 제74조 제1항).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부부가 칭할 성씨를 선택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은 혼인 성립에 불합리한 요건을 부과한 것으로서 혼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다.

라. 다수의견은 성씨가 가족이라고 하는 사회의 자연적이고 기초적인 집단단위의 호칭이라는 것에서 그 합리성의 근거를 구하고, 성씨가 가족을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것을 공시하고 식별하는 기능, 또한 그를 실감하는 것의 의의 등을 강조한다. 나도 그 점 자체에 이의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는 전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혼이나 재혼의 증가, 비혼화, 만혼화, 고령화 등에 의하여 가족형태도 다양화하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성씨가 주는 가족의 호칭이라는 의의나 기능을 그 정도로 중시할 수는 없다. 세상의 가족은 다수의견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부부와 그 사이의 친생자만을 구성원으로 하는 경우만이 아니다. 민법이 부부와 친생자를 원칙적인 가족형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가족 이외의 형태의 가족의 출현을 법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가족과 성씨의 결합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다수의견은 성씨를 고치는 것에 의하여 생기는 상기의 불이익은 혼인 전의 성씨의 통칭사용이 확산됨에 따라 일정 정도 완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통칭은 편의적인 것으로, 사용의 허부許否, 허용 범위 등이 정하여진 것은 아니고, 현재 공적인 문서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흠결이 있는 이상 통칭명과 호적명과의 동일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원래 통칭사용은 혼인에 의하여 변동된 성씨로는 당해 개인의 동일성 식별에 지장이 있는 것을 나타내는 증좌證左인 것이다. 이미 혼인을 주저하는 사태가 생기고 있는 현재에 있어서 상기의 불이익이 일정 정도 완화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부가 별도의 성씨를 칭하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아니할 합리성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마. 이상과 같이 본건 규정은 쇼와 22년(1946)의 민법 개정 이후 사회의 변화와 함께 그 합리성은 서서히 흔들리고 있고,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부부가 다른 성씨를 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의 요청에 비추어 합리성을 잃고, 국회의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에 이르게 되어 헌법 제24조에 위반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본건 규정을 개폐하는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입법부작위의 위법에 대하여

(1) 상기와 같이 본건 규정은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헌법 제24조에 위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 재판소나 하급심에서 본건 규정이 헌법 제24조에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의 판단이 된 일은 찾을 수 없다. 또한 본건 규정에 대하여는 헤이세이 6년(1994)에 법제심의회 민법부회 신분법소위원회의 심의에 바탕한 것으로서 법무성 민사국 참사관실에 의하여 공표된 「혼인제도 등에 관한 민법개정요강시안」 및 그를 다시 검토한 뒤에 헤이세이 8년(1996)에 법제심의회가 법무대신에게 답신한 「민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안 요강」에서는 이른바 선택적 부부별성제라는 본건 규정의 개정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 개정안은 개인의 성씨에 대한 인격적 이익을 법제도상 보호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본건 규정이 위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된 결과 작성된 것은 아니다. 혼인 및 가족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는 그 구체적인 제도의 구축이 제1차적으로는 국회의 합리적인 입법재량에 맡겨져 있다는 뜻에 비추어 본다면, 본건 규정에 대하여 위헌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법판단이 되지 않은 상황 아래에서 본건 규정이 헌법 제24조에 위반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2) 이상에 따르면 본건 규정은 헌법 제24조에 위반하는 것이지만, 이를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적용의 관점에서 본 경우에는 헌법상 보장된 또는 보호되고 있는 권리 이익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제약하는 것으로서 헌법의 규정에 위반하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장기에 걸쳐 개폐 등의 입법조치를 게을리하였다고 평가할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본건 입법부작위는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적용상 위법의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고, 본건 상고를 기각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재판관 사쿠라이 류코, 재판관 오니마루 가오루는 재판관 오카베 기요코의 의견에 동조한다.

재판관 기우치 미치요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성명권의 인격권적 파악, 실질적 남녀평등, 혼인의 자유 등 가족에 관련한 헌법적 과제가 부부의 성씨에 관하여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과제를 상고인들은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민법 제750조의 헌법 적합성이라는 점에서는 혼인에 있어서 부부동성제는 헌법 제24조에서 말하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위반한다고 해석된다. 내가 다수의견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이 점이며, 이하 이에 대해 기술한다.


1. 헌법 제24조의 취지
 헌법 제24조는, 동조 제1항은 혼인을 할 것인지, 언제 누구와 혼인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당사자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결정에 맡겨야 한다는 것으로서, 혼인의 자유와 혼인에 있어서 부부간의 권리 평등을 정하고, 동조 제2항은 제1항을 전제로 하여 혼인 법제도의 입법 재량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본건 규정은 혼인 시에 예외 없이 부부의 한쪽은 종래의 성씨를 유지하고, 다른 한쪽은 종래의 성씨를 고치도록 하는 것으로, 이는 헌법 제24조 제1항에서 말하는 혼인에 있어서 부부의 권리 평등을 해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부의 권리 평등이 헌법상 어떠한 제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므로, 문제는 부부동성제도에 의한 제약이 헌법 제24조 제2항이 허용하는 재량을 넘어섰는지 아닌지이다.

2. 성씨의 변경에 의한 이익의 침해
 혼인적령은 남 18세, 여 16세이지만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혼인에 의하여 성인으로 본다고 하는 것처럼 대다수의 혼인 당사자는 이미 종래의 사회생활을 거친 사회적인 존재, 즉 사회에 누구이다 라고 인지·인식된 존재가 되어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이 혼인이라는 결합을 선택할 때에 그 성씨 사용을 계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극히 크나큰 제약이 된다.

 사람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식된 경우, 직업 내지 소속과 그 사람의 성씨, 또는 주거지와 그 사람의 성씨의 두 가지 요소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이 통례이다.

 성씨의 변경은 본래적인 개별인식의 표상이어야 하는 성명 가운데 성씨만을 변경하는 것에 그친다고 하나, 직업 내지 소속과 성씨 또는 주거지와 성씨에 의한 인식을 전제로 하면 변경의 정도는 절반에 그치지 아니하고 변경 전의 성씨의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에게 있어 그 존재의 사회적인 인식은 지켜져야 할 중요한 이익이며, 이를 잃는 것은 중대한 이익의 침해이다. 동성제도에 의하여 성씨를 고치지 않을 수 없게 된 당사자는 그러한 이익의 침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3. 부부동성제도의 합리성
 동성제도에 의하여 헌법상의 권리이익의 제약이 허용된 것인가 아닌가는 헌법 제24조에서 말하는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의 요청에 비추어, 합리성을 잃고 국회의 입법재량의 범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은 다수의견이 설시한 바와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가 되는 합리성이란 부부가 동성인 것의 합리성이 아니라, 부부동성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의 합리성이며, 입법재량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경우 단순히 부부동성이 되는 것에 합리성이 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부부동성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에 합리성이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4. 신분관계의 변동과 성씨
 민법이 채용하고 있는 신분관계의 변동과 더불어 성씨가 변한다고 하는 원칙은 그 자체가 불합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원칙을 헌법이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를 혼인의 경우에 대하여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무전제로 지켜져야 할 이익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신분관계의 변동에 더불어 성씨가 변한다고 하는 원칙이 민법상 일관하고 있는지를 말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이혼시의 성씨의 속칭(혼씨속칭婚氏続称)은 쇼와 51년(1976) 개정, 파양시의 성씨의 속칭은 쇼와 62년(1987) 개정에 의하여 도입된 것이지만, 이혼·파양이라는 신분관계의 변동이 있더라도 그 선택에 따라 종래의 성씨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 개정에서는 각 개인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진 것과 혼인 전의 성씨에 의하여 사회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여 온 자에게 있어 큰 불이익을 받는다고 하는 부부동성제도의 문제를 배경으로 한 것은 의식되고 있고, 이에는 당분간 손을 대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혼인생활의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인 인식을 이혼에 의하여 잃는 불이익을 구제한다고 하는 취지였다.

5. 성씨의 법률적인 의미와 효용
 쇼와 22년 개정 전의 민법은 성씨는 “가家”로의 출입에 연동한 것이었고, “가家”로의 출입에 다양한 법률효과가 결부되었으나, 동년의 개정에 의하여 “가家”는 폐지되고, 개정 후의 현행 민법은 상속에 대하여도 친권에 대하여도 성씨에 법률효과를 부여하지 아니한다. 현행 민법이 성씨에 법률효과를 주고 있는 것은 겨우 제사에 관한 권리의 승계와의 관계에 그친다.

 그래서 동성의 효용은 가족의 일체감 등 법률효과 이외의 사항에서 구해지고 있다.

 다수의견은 개인이 동일한 성씨를 칭하는 것에 의하여 가족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점을 실감하는 의식을 합리성의 하나의 근거로 삼지만, 이 점에 대하여 나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가족 가운데 일원이라는 점을 실감, 부부·친자라는 점의 실감은 동성이라는 것에 의하여 생기는 것인가를, 실감을 위하여 동성이 필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동성이 아니라고 부부·친자라는 점의 실감이 생기지 아니한다고는 할 수 없다.

 먼저 인간의 사회적 인식에 있어서 호칭은 통례 직업 내지 소속과 성씨, 또는 주거지와 성씨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지만, 부부·친자간의 개별인식은 성씨보다도 이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통상 부부·친자 사이에 상대방을 성씨로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부부·친자가 동성이어서가 아니라, 퍼스트네임[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부부·친자 관계이기 때문이고, 다른 성씨의 부부가 생기더라도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외적인 공시·식별이란 두 사람이 동성이라는 점에 의하여 부부임을 사회적으로 나타내는 것, 부부간에 미성숙 자녀가 생긴 경우, 부부와 미성숙 자녀가 동성이라는 점에 의하여 부부·친자라는 점을 사회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동성의 기능은 존재하고,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성이라는 것은 부부의 증명을 하는 것은 아니고 친자의 증명도 아니다. 부부라는 것, 친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하더라도 제3자가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동성(나아가서는 부부·친자의 동성)이 제3자에 부부·친자가 아닐까하는 인상을 주고, 부부·친자라는 실감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한다. 이것이 부부동성이 가지는 이익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부동성인 점의 합리성이 아니라, 부부동성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의 합리성인 것이다.

 부부동성이 가진 이익이 그러한 것에 그치는 한편, 동성이 아닌 혼인을 한 부부는 파탄하기 쉽다거나 부부간의 자녀 생육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근거는 없으므로, 부부동성의 효용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동성에 예외를 두지 아니할 것에 합리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6. 입법재량권과의 관계
 혼인 및 그와 더불어 성씨는 법률에 의하여 제도화된 이상 당연히 입법부에 재량권이 있지만, 그 재량권의 범위는 합리성을 가진 제도가 복수인 때에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부부동성에 예외를 두는 제도로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헤이세이 8년의 요강에서는 하나의 제안이 있었으나, 그 전에는 복수의 안이 존재하였다.). 예외를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는 입법부의 재량의 범위이다.

 부부동성에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점을 고치지 않고, 결혼 시에 성씨를 바꾸도록 한 것에 의하여 중대한 불이익을 받는 것을 완화하는 선택지로서 다수의견은 통칭을 들고 있다. 그러나 법제화되지 아니한 통칭은 통칭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상대방의 판단에 의할 수밖에 없고, 성씨를 고친 자에게 하나하나 상대방의 대응을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개인의 호칭의 제도로서 큰 흠결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통칭을 법제화한다면 전혀 새로운 성격의 성씨를 탄생시키는 것이 된다. 그 당부는 별론으로 하되, 법제화가 되지 아니한 채로 부부동성의 합리성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국회의 입법재량권을 고려하더라도 부부동성제도는 예외를 허용하지 아니한 것에 합리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고, 재량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7. 자녀 육성과 부부동성
 다수의견은 부부동성에 의하여 친생자인 것이 나타나는 점, 양친과 함께 성씨를 같이 쓰는 것이 자녀의 이익이라고 한다. 이는 부부와 그 사이의 미성숙 자녀를 상정한 것이다.
부부와 그 사이의 미성숙 자녀를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 생각하는 것 자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부에게도 이별이 있고, 이혼한 부모가 혼씨속칭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성씨를 다르게 하게 된다. 부부동성에 의하여 육성에 해당하는 부모가 동성인 것이 보장된 것은 초혼이 유지되어 있는 부부간의 자녀뿐이다.

 자녀의 이익의 관점에서 말하게 된다면 부부가 동성이라는 것이 미성숙 자녀의 육성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미성숙 자녀의 양육은 사회 지속의 관점에서 중요한 일이고, 제1차적으로 부모의 권한이자 책무이지만, 그 책무를 맡은 것은 부부일 수도 있으며, 이혼한 부모일 수도 있고, 사실혼 내지 미혼의 부모일 수도 있다. 실제로 부부가 아닌 부모라 하더라도 미성숙 자녀의 양육은 충분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부부라 하더라도 부부간에 분쟁이 생겨 미성숙 자녀의 양육에 지장이 있는 경우도 있다.

 미성숙 자녀에 대한 양육의 책임과 의무라는 점에 있어서 부부인가 아닌가, 동성인가 아닌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자녀의 육성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지금의 시대이며, 부부가 동성인 것이 미성숙 자녀의 육성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8. 본건 입법부작위의 국가배상법상의 위법성의 유무에 대하여
 본건 규정은 헌법 제24조에 위반하는 것이지만,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위법성에 대하여는 헌법상 보장된 또는 보호되고 있는 권리이익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제약하는 것으로서 헌법 규정에 위반하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장기간에 걸쳐 개폐 등의 입법조치를 게을리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고, 위법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재판관 야마우라 요시키의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다수의견과 달리 본건 규정은 헌법 제24조를 위반하고, 본건 규정을 개폐할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입법부작위는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적용상 위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원 판결을 파기하여 손해액의 산정을 위하여 본건을 환송함이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 그 이유를 기술한다.



1. 본건 규정의 헌법 제24조 적합성

 본건 규정의 헌법 제24조 적합성에 대하여는 본건 규정이 동조에 위반하는 것이라는 오카베 재판관의 의견에 동조한다.



2. 본건 규정을 개폐하는 입법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입법부작위의 위법에 대하여


(1) 사회구조의 변화

 오카베 재판관의 의견에도 있는 것처럼 전후 여성의 사회진출은 현저해졌고, 혼인 전에 일하는 여성이 증가한 것뿐만 아니라, 혼인 후에 일하는 여성도 증가하였다. 만혼화도 진행되고, 성씨를 고치는 것에 의하여 생기는 혼인 전의 성씨를 사용하는 중에 형성되어 온 타인으로부터 식별하고 특정되는 기능이 저해되는 불이익이나 개인의 신용, 평가, 명예감정 등에도 영향이 미쳐 불이익은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이는 헤이세이 6년에 법제심의회 민법부회 신분법소위원회의 심의에 기반한 것으로서 법무성 민사국 참사관실에 의하여 공표된 「혼인제도 등에 관한 민법개정요강시안」에서도 “……이 규정 아래에서의 혼인의 실태를 보면 압도적 대다수가 부夫의 성씨를 칭하는 혼인을 하고 있고, 법의 외관[建前]은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이 결혼에 의하여 성씨를 변경하는 것이 사회적 실태가 되고 있다. 이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현저해 진 쇼와 50년대 이후, 주로 사회에서 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여성의 측에서 여성에 있어 혼인에 의하여 개성이, 그 직업활동·사회활동에 현저한 불이익·지장을 가져오고 있으므로, (선택적) 부부별성제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타나기에 이른 근거가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기前記의 우리나라에 있어서 사회구조의 변화에 의하여 더욱 커지게 된 불이익은 우리나라 정부 내에서도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2) 국내에 있어서 입법의 동향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받아들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본건 규정의 개정을 향해 다양한 검토가 있었다.


 그 결과 상기의 「혼인제도 등에 관한 민법개정요강시안」 및 이를 다시 검토한 뒤 헤이세이 8년에 법제심의회가 법무대신에게 답신한 “민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안 요강”에 있어서는 이른바 선택적 부부별성제라는 본건 규정의 개정안이 제시되었다.


 상기 개정안은 본건 규정이 위헌인 것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기와 같이 본건 규정이 주로 여성에게 불이익·지장을 불러오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외에 “우리나라에 있어서 최근 점점 개인의 존엄에 대한 자각이 높아진다는 점이 나타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인의 성씨에 대한 인격적 이익을 법제도상 보호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하더라도 틀린 것은 아니다.”, “부부가 별성을 칭하는 것이 부부·친자 관계의 본질적 이념에 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부부별성제가 실현되어 있다는 한 가지 점만으로도 명백해진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혼인 시에 부부의 일방이 성씨를 고치도록 한 본건 규정에는 인격적 이익이나 부부간의 실질적 평등의 점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의식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상기 개정안 자체는 최종적으로 국회에 제출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뒤에 같은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 누차에 걸쳐 제출되어 왔고, 또한 국회에서도 선택적 부부별성제의 채용에 대한 질의를 되풀이하여 온 것이다.


 그리고 상기의 사회구조의 변화는 헤이세이 8년 이후 더욱 진행되었다고 보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있어서도 본건 규정의 개폐 조치는 취하여지지 아니하였다.


(3) 해외의 동향

 부부의 성씨에 대한 법제도에 대하여 해외의 동향에 눈을 돌려 보더라도 이하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전제가 되는 혼인 및 가족에 관한 법제도가 다른 점이 있으나,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부부동성 이외에 부부별성이 인정되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와 같이 부부동성제를 채택하였던 독일, 태국, 스위스 등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최근 별성제를 도입하였고, 현시점에서 예외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부부동성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이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쇼와 60년대에 비준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에 근거하여 설치된 여자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헤이세이 15년 이후 반복적으로 우리나라의 민법에 부부의 성씨 선택에 관하여 차별적인 법규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하고, 그 폐지가 요청된다고 하는 데에 까지 이르렀다.


(4) 정리

 이상을 종합하면 적어도 법제심의회가 법무대신에게 “민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안 요강”을 회답한 헤이세이 8년 이래 상당기간을 경과한 시점에서는 본건 규정이 헌법의 규정에 위반하는 것이 국회에 있어서도 명백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헤이세이 8년에는 이미 개정안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택적 부부별성제 등을 채용하는 등의 개폐 조치는 취하여지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본건 입법부작위는 현시점에서는 헌법상 보장된 또는 보호되고 있는 권리이익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제약하는 것으로서 헌법의 규정에 위반하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장기에 걸쳐 개폐 등의 입법조치를 게을리하고 있는 것으로서, 국가배상법 제1조 제1항의 적용상 위법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본건 입법부작위에 대하여는 과실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본건 입법부작위의 결과 상고인들은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본건에 있어서는 상기의 위법한 본건 입법부작위를 이유로 하는 국가배상청구를 인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판장 재판관 데라다 이쓰로寺田逸郎

재판관 사쿠라이 류코櫻井龍子

재판관 지바 가쓰미千葉勝美

재판관 오카베 기요코岡部喜代子

재판관 오타니 다케히코大谷剛彦

재판관 오하시 마사하루大橋正春

재판관 야마우라 요시키山浦善樹

재판관 오누키 요시노부小貫芳信

재판관 오니마루 가오루鬼丸かおる

재판관 기우치 미치요시木内道祥

재판관 야마모토 쓰네유키山本庸幸

재판관 야마사키 도시미쓰山崎敏充

재판관 이케가미 마사유키池上政幸

재판관 오타니 나오토大谷直人

재판관 고이케 히로시小池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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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경찰예비대가 설치된 것을 두고 일본사회당을 대표로 하는 원고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는 1951년 4월 1일 이후에 이루어진 경찰예비대와 관련한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무효확인을 구하는 소장을 최고재판소에 제출하였다. 원고는 일본국헌법 제81조가 최고재판소에 헌법재판소의 성격을 부여하였으며, 그에 대하여는 제1심이면서 종심의 관할을 부여하였으며, 더욱이 입법부의 소수야당의 원고는 원고적격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최고재판소는 1952년 10월 8일, 최고재판소 대법정 전원 일치로 부적법각하하였다. 최고재는 일본의 재판소가 수행하는 것은 사법권이며, 사법권을 행사함에는 구체적인 소송의 제기를 필요로 하므로, 이 사건은 구체적인 소송이 제기되지 않았으므로 헌법 및 기타 법률 등에 판단을 내릴 권한은 없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사법권의 범위 내에서 하급재판소도 위헌입법심사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역으로 이번과 같은 재판은 어떠한 재판소도 재판권을 갖지 아니한다면서, 경찰예비대의 위헌성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경찰예비대 위헌소송 원문

일본국헌법에 위반하는 행정처분 취소 청구사건

최고재판소 쇼와 27년 (マ) 제23호 / 1952년(쇼와 27년) 10월 8일 대법정 판 (民集6巻9号783頁)



원고 스즈키 모사부로

   대리인 이노마타 고조猪俣浩三 외 5명


피고       국가(國)

   대표자   법무대신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

   법정대리인 오자와 후미오小沢文雄 외 1명

   대리인   이와타 주조岩田宙造 외 2명



□ 주    문


 본건 소를 각하한다.

 소송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 사    실


 원고 소송대리인은 청구취지로 “쇼와 26년 4월 1일 이후 피고가 행한 경찰예비대 설치 및 유지에 관한 일체의 행위(행정행위는 물론 사실행위, 사법상의 행위 외에 예비대의 설치유지에 관한 법령규칙의 일체를 포함한다. 별지목록의 기재는 예시에 지나지 아니한다.)가 무효라는 것을 확인한다.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구하며 그 청구원인은 별첨 소장 중 청구원인 및 쇼와 27년 7월 16일자 준비서면기록과 같다.


 피고 소송대리인은 주문과 같은 뜻의 판결을 구하는 별첨 답변서 중 이유기재대로 주장하였다.



□ 이    유


 원고는 최고재판소가 일견 사법재판소의 성격을 가지는 것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인 쟁송사건에 관한 판단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또한 제1심이자 종심으로서 법률, 명령, 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권한을 가진다는 점에 있어서 사법권 이외의, 그리고 입법권 및 행정권의 어느 쪽의 범주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특수한 권한을 수행할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다.


 이 점에 관한 제외국의 제도를 보면, 사법재판소에 위헌심사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 이외에, 사법재판소에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를 위한 특별한 기관을 두어 구체적 쟁송사건과 관계없이 법률, 명령 등의 합헌성에 관한 일반적·추상적인 선언을 하고, 이를 파기하여 그 효력을 잃게 만들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재판소에 현행 제도상 주어진 것은 사법권을 행사할 권한이고, 사법권이 발동하기 위하여는 구체적인 쟁송사건이 제기될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 재판소는 구체적인 쟁송사건이 제기되지 아니하였는데 장래를 예상하여 헌법 및 기타 법률, 명령 등의 해석에 대하여 존재하는 의심논쟁에 관한 추상적인 판단을 내리는 권한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저 최고재판소는 법률, 명령 등에 관한 위헌심사권을 가지지만, 그 권한은 사법권의 범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 점에 있어서 최고재판소와 하급재판소 사이에 다른 바는 없는 것이다(헌법 제76조 제1항 참조). 원고는 헌법 제81조를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으나, 동조는 최고재판소가 헌법에 관한 사건에 대하여 종심적 성격을 갖는 것을 규정한 것이고, 따라서 최고재판소가 고유한 권한으로 추상적 의미의 위헌심사권을 가진다는 것과 함께 그러한 사건에 대해 배타적, 즉 제1심이자 종심으로서의 재판권을 가진다는 것을 추론할 수는 없다. 원고가 최고재판소재판관으로서의 특별한 자격에 대하여 주장하는 점은 특히 재판소법 제41조 제1항의 취지에 관한 것이라고 인정되나, 이 최고재판소가 합헌성의 심사와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 종심으로 판단할 중대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는 것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바이다.


 또한 최고재판소가 원고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법률, 명령 등의 추상적인 무효선언을 내릴 권한을 갖는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최고재판소에 위헌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법률, 명령 등의 효력을 다투는 일이 빈발하게 되어 최고재판소는 모든 국권의 위에 위치한 기관이라는 인식을 보이게 되어 삼권의 분립, 그 사이의 균형을 가지고 상호가 침범하지 아니하는 민주정치의 근본원리에 배치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우리 현행 제도 하에서는 특정인이 구체적 법률관계에 대해 분쟁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재판소에 그 판단을 구할 수 있는 것이고, 재판소가 이러한 구체적 사건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법률, 명령 등의 합헌성을 판단할 권한을 가진다고 하는 견해에는 헌법상 및 법령상 하등의 근거도 없다. 그리고 변론 취지에 따르면 원고의 청구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법률관계에 대한 분쟁에 관한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따라서 본 소송은 부적법하므로, 관련된 소송에 대하여 최고재판소만 아니라 어떠한 하급재판소도 재판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이에 따라 본 소송은 하급재판소에 이송하여야 할 것이 아니다.


 이상 이유에 따라 본건 소송은 부적법하므로 각하하고, 소송비용의 부담에 대한 민사소송법 제89조를 적용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이 판결은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에 따른 것이다.



   최고재판소 대법정(大法廷)

    재판장 재판관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郎

        재판관 사와다 다케지로沢田竹治郎

        재판관 이모야마 세이이치霜山精一

        재판관 이노우에 노보리井上登

        재판관 구리야마 시게루栗山茂

        재판관 마노 쓰요시真野毅

        재판관 고타니 가쓰시게小谷勝重

        재판관 시마 다모쓰島保

        재판관 사이토 유스케斎藤悠輔

        재판관 후지타 하치로藤田八郎

        재판관 이와마쓰 사부로岩松三郎

        재판관 가와무라 마타스케河村又介

        재판관 다니무라 다다이치로谷村唯一郎

        재판관 모토무라 젠타로本村善太郎


        재판관 다나카 고타로는 퇴관하였으므로 서명날인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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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기관설에 관한 미노베 다쓰키치 의원의 이른바 「일신상의 변명」
天皇機関説に関する美濃部達吉議員のいわゆる「一身上の弁明」

1935년(쇼와 10년) 2월 25일 제67회 제국의회 귀족원

[의장] (공작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군) 미노베 다쓰키치 군으로부터, 동군의 언론에 부친 지난날 당 의장에 있어 의원으로부터 발언이 있었던 문제에 부쳐, 일신상의 변명을 올리고자 하는 신청이 있었으므로, 이를 허락함에 이의있으십니까.

〔"이의 없음"이라고 하는 자 있음.〕

[의장] 이의없다고 인정합니다. 미노베 다쓰키치 군.

〔미노베 다쓰키치 군 연단에 오르다.〕

 지난 (1935년) 2월 19일의 본회의에 있었던, 기쿠치 남작 기타 분들께서 제 저서에 해주신 말씀에 일단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이에 일언일신상의 변명을 표하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은 저로서도 깊은 유감을 가지는 바입니다. 기쿠치 남작은 작년(1934년)의 65회 의회에서도 제 저서의 일을 들어 이러한 사상을 따르는 자는 문관고등시험위원에서 쫓아내야만 한다는 등의 심한 말씀과 같은 비난을 하신 바 있습니다. 이번 의회에서도 다시 제 저서를 들어 명백한 반역적 사상이라고 말씀하시고는, 모반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또한 학문을 이용한 도적(学匪)이라고 까지 단언하신 것입니다.

 일본의 신민(臣民)인 자로 반역자이며 모반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심한 모욕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학문을 전공해 연구하는 사람에게 학문을 이용한 도적이라는 이야기만큼 참기 어려운 모욕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귀족원에 있어 공공의 회의장에 공언되고, 의장으로부터의 취소 명령도 없이 용납되는 것이 과연 귀족원의 품위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어쨌든 귀족원에 있어서, 또한 귀족원의 이 공공의 회의장에서 이와 같은 모욕이 가해진 일에 대하여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러한 일이 묵과하기 어려운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본 회의장에 있어서 이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당한 것임을 알고 있고, 또한 귀중한 시간을 이와 같은 이야기에 써버리는 것에 대하여 매우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일단 승낙을 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릇 어떠한 학문에서도 그 학문을 전공한 자의 학설을 비판하여 그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비판자가 해당 학문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고, 상당한 비판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법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군학(軍學)에 대한 학자의 전문적인 저술을 비평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웃음거리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만, 기쿠치 남작이 제 책에 대하여 논한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동 남작이 과연 제 저서를 통독하셨는지 의문이며, 만약에 읽으셨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이해가 되신 것인지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궁금증이 듭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편적으로 제 저서의 어떤 문장구만을 떼어내, 그 전후 문맥도 살피지 않고 단지 그 부분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의미로 오해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정말로 제 저서 전부를 정독하시고, 또한 그것을 정당하게 이해하셨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가할 이유는 없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기쿠치 남작은 제 저서를 마치 우리 국체(國體)를 부인하고 군주주권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실로 제 저서를 읽지 않았거나 또는 읽어도 그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 헌법(대일본제국헌법)상 국가 통치의 대권이 천황에게 속한다고 적힌 것에 대해서는 천하 만민 중 어느 사람도 이에 의심을 품을 자는 없는 것입니다. 헌법의 상유(上諭)에서는 “국가통치의 대권은 짐이 이를 조종에게서 이어받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바이다.”라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 제1조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합니다. 더욱이 제4조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규에 따라 이를 행한다.”고 하니 일월(日月)과 같이 명백한 일입니다. 만약 이를 부정하는 자가 있으면 반역사상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것이나, 제 저서가 어떠한 곳에서도 이를 부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그것이 일본 헌법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인 것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기쿠치 남작이 들었던 『헌법정의』(憲法精義)의 15항에서 16항이 있는 곳을 보시면, 일본의 헌법의 기본주의라는 제목 하에 “가장 중요한 기본주의는 일본의 국체를 기초로 하는 군주주권주의이다. 이는 서양의 문명으로부터 전해진 입헌주의의 요소를 가한 일본의 헌법의 주요한 원칙이다.”, 즉 군주주권주의에 입헌주의의 요소를 가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만세가 시작된 이래로 전하는 것으로 일본 개벽 이래 일찍이 변한 일이 없는, 또한 장래 영원히 변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저술인 『헌법촬요』(憲法撮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쿠치 남작이 거론한 책 이외에도, 제 헌법에 관한 저술은 메이지 39년에는 이미 『일본국법학』(日本国法学)을 저술한 바 있으며, 다이쇼 10년에는 『일본헌법』 제1권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더욱 최근인 쇼와 9년에는 『일본헌법의 기본주의』(日本憲法の基本主義)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어떠한 책을 보셔도 군주주권주의가 일본 헌법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대하여 헌법상의 법리론으로서 문제가 되는 점은 대충 두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인 것인가, 또는 천황이 나라의 원수로 그 지위에서 총람하는 권능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는 권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권능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문제는 천황의 대권은 절대 제한할 수 없는 만능의 권력인가, 아니면 헌법의 조문에 의하여 행할 수 있는 제한 있는 권능인가의 문제입니다.

 제 저서에서 표명하는 견해는 첫 번째로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서는 권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능이라는 점이며, 또한 두 번째로는 만능 무제한의 권력이 아니라 헌법의 조규에 의하여 행하는 권능이라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가 기쿠치 남작과 다른 분의 의혹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표합니다.

 첫 번째로 천황의 국가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법률학의 첫 발을 내딛은 사람이 숙지하는 점입니다만, 법률학에서 권리라고 하는 것은 이익이라는 것을 요소로 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즉 자신의 이익 때문에 … 자기의 목적 때문에 존재하는 법률상의 힘이기 때문에 권리라는 관념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그 힘을 그 사람 스스로의 이익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정을 받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권리주체라고 하는 것은 이익의 주체, 목적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국가 통치의 대권이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해석하면 통치권이 천황 일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신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힘이라고 하는 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가 과연 우리 존귀한 국체에 적합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고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어떤 시대에서도 천황이 그 일신이나 그 일가를 위하여, 일가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황은 우리나라 개벽 이래로 하늘 아래 대군(大君)으로 우러러 보는 존재입니다만, 하늘 아래의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 일신 때문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다는 일은 고래로부터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명백한 사실이며, 역대의 천황의 조서에서도 그러한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니혼쇼키』(日本書記)에 등장하는 스이진 천황(崇神天皇)의 조서에서는 “생각건대 우리 황조 천황께서 고교쿠(京極)에 광림(光臨)하신 것은 단지 한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릇 인신을 사목(司牧)하고 천하를 경륜하는 것을 위함이다.”라고 하였고,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의 조서에서는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바로 임금은 백성을 그 근본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서양의 오래된 사상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마치 국왕의 일가의 재산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한 개인이 자신의 권리로 재산을 소유하여 다스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국왕이 자신의 일가의 재산인 국토와 국민을 영유하여 지배하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상을 가산국사상(家産國思想), 가산설(Patrimonial theory)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를 마치 국왕 한 사람, 그 집안에 속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와 같은 서양 중세의 사상은 일본의 고래의 역사에서 일찍이 보이지 않았던 사상으로, 처음부터 우리 국체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 공(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의미함)의 『헌법의해』(憲法義解)의 제1조의 주석에서는 “통치는 대위(大位:천황의 자리)에서 대권을 총괄하여 국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확실히 조종(祖宗:역대 천황)은 그 천직(天職)을 중요시하고, 군주의 덕은 팔주(八洲:여덟 개의 섬, 일본)의 신민을 통치하는 데에 어울리고,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을 위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즉 이는 이 헌법이 기반하고, 기초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또한 같은 취지를 말하는 것으로 통치가 결단코 천황의 일신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 아니고, 따라서 법률상의 관념으로 생각하면 천황 일신의 사리(私利)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합니다.

 『고지키』(古事記)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이즈모(出雲)의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国主命)에게 물어보신 말이라고 하여 “그대가 사령(私領, 사적인 땅)으로 보유하고 있는 아시하라노나카쓰구니(葦原ノ中ツ国)는, 우리 아들이 통치할 나라” 운운하며 통치하는(シラス:領らす) 것과 사령으로(ウシハク:領く) 가진다는 말을 따로 구분하여 쓰고 있습니다. 어떤 국학자의 학설에 의하면 후자의 것은 개인이 가진다는 의미이고, 전자의 것은 통치한다는 의미로, 즉 천하를 위해 땅과 인민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학설이 옳은지 어떤지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만약 그것이 옳다면 천황 일신의 권리로서 통치권을 보유하시는 것이라고 이해되며, 이는 곧 천황이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국체에 맞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치권은 천황 일신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고, 따라서 천황 일신에 있는 사권(私權)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주체는 법률상 무엇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리의 주체는 또한 목적의 주체이기 때문에, 통치의 권리주체는 곧 통치의 목적주체라는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황이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천하의 국가를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이 귀속하는 것은 영원 항구(恒久)한 국체의 국가라는 관념으로,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 다시 말하면 나라의 최고기관으로서 이 국가의 일체의 권리를 총람하고, 국가의 일체의 활동은 입법도 사법도 전부 천황을 그 최고의 원천으로 삼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기관설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 그 자신이 하나의 생명으로, 그 자신의 목적을 가지는 항구적인 단체, 즉 법률학상의 단어를 빌리면 하나의 법인이라는 관념에서, 천황은 이 법인인 국가의 원수되는 지위에 있어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의 일체의 권리를 총람하고, 천황이 헌법에 따라 행하는 행위는 즉 국가의 행위로 효력을 발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국가를 법인이라고 본다는 것은, 물론 헌법이 법률학의 교과서는 아니라는 점 때문에 명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만, 헌법의 조문 내에는 국가를 법인으로 보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규정은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헌법은 그 제목부터 이미 대일본제국헌법이라고 하여 국가의 헌법인 것을 명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55조 및 제56조에서는 ‘국무’(國務)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모든 통치 작용은 국가의 사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62조 제3항에서는 ‘국채’(國債) 및 ‘국고’(國庫)라고 하고 있으며, 제64조 및 제72조에서는 ‘국가의 세출세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66조에서는 국고에서 황실경비를 지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러한 자구(字句)는 국가 자신이 공채를 발행하고, 세출과 세입을 관장하고,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황실경비를 지출하는 주체인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가 그 자신이 법인이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국세(國稅)라고 하는 것이나 국유재산(國有財産)이란 것, 국제조약(國際條約)이라고 하는 말은 법률상 널리 공인된 말입니다만, 그것은 국가 그 자신의 조세를 부과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조약을 맺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가 그 자신이 하나의 법인이며, 권리주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헌법 및 법률이 공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체이고 무형인(無形人)이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인을 대표하는 것이 있어, 그 사람의 행위가 법률상 법인의 행위의 효력을 소유하는 행위여야 하므로 이러한 바와 같이 법인을 대표하여 법인의 권리를 행하는 사람을 법률학상의 관념으로 법인의 기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천황이 국가의 기관인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법률학의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는 혹여 불온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 의미하는 바는 천황 일신과 그 일가의 권리로 통치권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국가의 공사(公事)로 천황의 뜻이 국가에 체현(體現)되고, 국가의 모든 활동은 천황을 그 최고 원천으로 하고, 천황의 행위가 그 일신의 사사로운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행위로 효력을 발한다는 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의 헌법은 메이지 천황이 흠정(欽定)한 것입니다만, 메이지 천황 일신의 저작물이 아니라 그 명칭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대일본제국의 헌법이며, 국가의 헌법으로 영구히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약은 헌법 제13조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천황이 체결하는 것이지만, 분명 그것은 국제조약, 즉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으로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소위 기관설을 부정해서 통치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하면, 그 통치권을 기초로 하여 부과되는 조세는 국세가 아니라 천황 일신에 속하는 수입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황 일신에 속하는 수입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천황이 체결한 조약은 국제조약이 아니라 천황 일신의 계약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외국채(外國債)라고 하는 것, 국유재산(國有財産)이라고 하는 것, 국가의 세출세입이라고 하는 것 등 만일 통치권이 국가에 속하는 권리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이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통치권이 국가에 속하는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단코 천황이 통치의 대권을 소유하는 것을 부정하는 취지가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일체의 통치권은 천황이 총람한다는 것은 헌법이 명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는 천황의 대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사사로운 권리가 아니라 천황이 국가의 원수로서 행하는 권능이며, 국가의 통치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즉 통치의 모든 권능이 천황에게서 나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국체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가장 우리 국체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가 우리 헌법상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만능무제한의 권력인가 또한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 국체를 논하자면, 절대무제한이 되는 만능의 권력이 천황에게 속하는 것이 우리 국체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우리 국체의 인식에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군주가 만능의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순수한 서양의 사상입니다. 로마법이나 17~18세기의 프랑스 등의 사상으로, 우리 역사상에 비추어 볼 때에는 어떤 시대에서도 천황이 무제한인 만능의 권력을 이용해 신민(臣民)에게 명령하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살펴보더라도 결코 무한한 권력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헌법의 상유(上諭)에서도 “짐이 친애하는 바의 신민이 곧 짐의 조종께서 혜무자양(惠撫慈養:사랑해 어루만지고, 자애롭게 기르다)하신 바의 신민임을 헤아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역대 천황의 신민에 대한 관계를 혜무자양(恵撫慈養)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규에 의하여 이를 행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의 상유에서는 “짐과 짐의 자손은 장래 이 헌법의 조장(條章)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을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어 천황의 통치의 대권이 헌법의 규정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명백하여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천황의 제국의회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헌법의 조규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 기쿠치 남작은 제 저서에서, 의회가 전혀 천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만약에 해산의 명이 있어도 그에 구속되지 않고 회의를 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일 뿐더러, 그것도 그 분이 제 저서를 통독하지 않았거나 또는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의회가 천황의 대명(大命)에 의하여 소집되고, 또한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을 명하는 것은 헌법 제7조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또한 제 책에서도 동일하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헌법과 법률에 정해져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사항에 즉 헌법의 조규를 기초로 하지 않고 천황이 의회에 명령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회가 원칙적으로 천황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로, 원칙적이라는 말은 특정하게 정해진 일을 제외하고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살피자면 의회가 입법이나 예산에 협찬하고, 긴급명령 기타의 승낙을 하고, 또는 상주나 건의를 하고, 질문을 통해 정부의 변명을 구하는 것은 모두 의회 자기의 독립의 의견에 의하여 행하는 것으로, 칙명이 내리고 칙명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례로 입법의 협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법률안은 혹은 정부에서 제출하고 혹은 의회에서 제출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의원(議院)에서 제출하는 안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군명(君命)을 받아 협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정부제출안에 대해서도 의회는 자기의 독립된 의견에 의하여 이를 가결하거나 부결하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의회가 폐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멋대로 가결하지 않는 일이 있다거나 이를 수정하고 또는 부결하는 자유를 가지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이는 협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의회제도를 설치한 목적은 전혀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헌법 제66조에서는 황실경비에 대해 특히 의회의 협찬을 요하지 않는다고 명언(明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기쿠치 남작께서 의회에 대해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부결하고 그 협찬을 막았을 경우에, 의회가 조칙을 어긴 책임을 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상주나 건의, 질문등에 이르러서도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쿠치 남작은 그 연설에서 폐하의 신탁(信託)에 의하여 대정(大政)을 보필하는 중책을 담당하고 있는 국무대신에 대하여 현 내각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폐하의 지고(至高)한 고문(顧問)의 역할을 맡는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폭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두렵게도 폐하께서 임명한 그 사람을 임명하지 아니한 것만 못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의회의 독립적인 보필을 부정하고, 의회는 하나의 칙명에 따라 이 권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폐하의 신임을 방기한 중신들에 대하여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을 하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의회의 독립성을 전제로 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제가 의회는 국민대표의 기관이므로, 천황에게서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심한 비난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회가 천황의 임명에 의한 관부(官府)가 아니라, 국민대표의 기관으로서 설치되어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심이 없는 부분이며, 그것은 의회가 구 제도의 원로원(元老院)이나 지금의 추밀원(樞密院)과 법률상의 지위를 달리하는 이유입니다. 원로원이나 추밀원은 천황의 관리에서 성립하게 된 것으로, 원로원 의관(議官)이나 추밀원 고문관(顧問官)이라고 하는 것은 천황의 관(官)임을 나타냅니다. 천황이 이를 임명하게 되는 것, 즉 그 권한을 수여하는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반대로 의원(議員)이라고 부를 뿐, 의관(議官)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천황의 기관(機關)으로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다시 『헌법의해』를 인용해 살펴보면, 제33조의 주석에는 “귀족원은 귀신(貴紳)을 모으고, 중의원은 서민이 뽑아 양원합동으로 하나의 제국의회를 성립하고 이에 전국의 공의(公議)를 대표한다.”라고 하고 있는데, 즉 전국의 공의를 대표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헌법의해에서도 명백히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원로원이나 추밀원과 같은 천황의 기관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헌법학에서는 지극히도 평범한 진리로, 보통 학자라면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30년이상 주장되어 온 내용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이와 같은 비난이 본 의장(議場)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제 생각에도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이 석상에서 이와 같이 헌법의 강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황송한 일입니다만, 이에 대해 고개를 숙이는 바입니다. 제가 간절하게 희망하는 것은 만약에 제 학설에 대하여 비평을 하고자 한다면 여기저기에서 잘라 모은 단편적인 문구만을 긁어모아 헛된 비방과 중상의 말을 하시기보다는, 진실로 제 저서의 전체를 통독하고 전후(前後)의 맥락을 밝혀 참된 의미를 이해하신 연후에 비평해 달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 변명의 말을 마칩니다.(박수)

 귀족원에서는 단상에서 하는 연설에 대해서는 일체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미노베 다쓰키치)의 연설에 소수이기는 해도 박수가 터졌다. 신문도 고금에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이를 보도했다. 박수를 보낸 사람은 9명이었다고도 하고 서너 명이었다고도 한다. 전 도쿄대 총장 오노즈카 기헤이지 선생, 이자와 다키오 씨, 교토대학 법학부 명예교수 오다 요로즈 선생, 물리학자 다나카다테 아이키쓰 박사 등이 박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오노즈카 선생은 이때 아버지의 연설에 박수를 보냈다고 하여 우익단체의 표적이 되어 한때는 호위까지 붙는 지경에 처했다고 한다.(미노베 료키치, 『고민하는 데모크라시』)[각주:1]
  1. 다치바나 다카시<SPAN style="COLOR: #8e8e8e">(이규원 옮김)</SPAN>, 『천황과 도쿄대 1』, 청어람미디어, 2008년<SPAN style="COLOR: #8e8e8e">(2005년, 분게이슌주)</SPAN>, 433~434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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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에 내었던 자료인데, 이제는 공개를 해도 되는 시점인 것 같아 공개를 한다.

처음 구상을 하고, 번역을 하고, 쓰면서 주안점으로 삼았던 것은 오로지 1945년 이래의 9조에 대한 동향과 견해의 소개였다. 물론 서론에는 다양한 논점을 제시하면서, 제9조에 대한 논의와 개헌 문제에 대한 고찰이 중요한 이유에 대하여 중언부언 하고 있으나, 이제 와서 밝히면 사실은 모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이를 개괄적으로 살필 수 있도록 제시하는 목적이 주목적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법학에 관심이 있는 자를 위한, 일본 헌법과 관련 체계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나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는 차마 손을 못대는 자, 혹은 일문을 읽지 못하는 자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흡한 점이 사실이다. 견해 면에 있어서도 본인, 즉 필자의 견해가 삽입된 부분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연구로서의 가치보다는, 자료로서의 가치에 초점을 두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번역은 연구의 첫 단계라는 점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본인으로서는 이러한 활동이 어떠한 목적에서 한 것은 아니나, 나 자신으로서도 여러 논점에 대하여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몇 가지 돌아보면, 뒤로 갈 수록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시간에 쫓겨 제9조 해석론 후반부부터는 투명광속으로 썼던 점이 사실이다. 특히 주안점으로 삼고자 하였던 헌법개정 문제에 대하여는 균형잡힌, 혹은 망라하는 기술이라고 보기에 힘들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국에 그간 여러 차례 알려졌던 9조회 같은 사항보다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목할만한 일미평화우호조약 제정 운동이나 평화기본법 제정 운동에 대하여 약간 기술하였다. 또한 결론부는 사실상 앞에 기술하였던 내용을 중언하는 것에 불과하다. 거의 의미를 두지 못하였던 점이 사실이다.

참고문헌부를 보면 알겠지만, 내용 정리하면서 상당한 양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사실 내가 갖추고 있는 것은 몇 권 되지 않으나, 여러 도움으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거나 복사하는 등으로 사실상 해당 부분을 참고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지적했던 부분에 대해 다시 확인하였으므로 각주의 참고문헌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없으리라 생각하나, 좀 더 읽기에 적합한 참고문헌에 대한 구성은 하지 못하였음이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다.

그 외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추천하고 싶은 관련 학자를 골라보면, 우선 야마우치 도시히로山内敏弘 교수(현 류고쿠龍谷 대학 교수, 돗쿄獨協 대학 및 히토쓰바시一橋 대학 명예교수)를 들 수 있겠다. 일문판 위키피디아에서 '일본에서 평화주의 연구의 제1인자'라는 평이 있는데, 야마우치 교수는 1975년 당시에 학계에서 거의 사장되었던 자위권 부인론을 다시 제창하여 학계의 이단이라거나 무의미하다는 평 속에서도 이를 관철한 바 있다. 그 외에도 히구치 요이치樋口陽一 교수나 후카세 다다카즈深瀬忠一 교수의 견해 또한 일견할 가치가 있다.

그 외에도 오로지 시간이라는 핑계를 빌려 이야기하면,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양해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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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國憲法

1946년 11월 3일 공포
1947년 5월 3일 시행



상유(上諭)

짐은 일본 국민의 총의(總意)를 바탕으로 새 일본 건설의 기초(基礎)가 정해지기에 이름을 깊이 기뻐하며, 추밀고문의 자순(諮詢) 및 제국헌법 제73조에 따라 제국의회의 의결을 거친 제국헌법의 개정을 재가(裁可)하고, 이에 이를 공포케 하노라.


어명어새(御名御璽)


쇼와(昭和) 21년 11월 3일
 내각총리대신 겸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국 무 대 신 남작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사 법 대 신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
 내 무 대 신    오무라 세이치(大村淸一)
 문 부 대 신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郎)
 농 림 대 신    와다 히로오(和田博雄)
 국 무 대 신    사이토 다카오(齋藤隆夫)
 체 신 대 신    히토쓰마쓰 사다요시(一松定吉)
 상 공 대 신    호시지마 지로(星島二郎)
 후 생 대 신    가와이 요시나리(河合良成)
 국 무 대 신    우에하라 에쓰지로(植原悦二郎)
 운 수 대 신    히라쓰카 쓰네지로(平塚常次郎)
 대 장 대 신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국 무 대 신    가나모리 도쿠지로(金森德次郎)
 국 무 대 신    젠 게이노스케(膳桂之助)



일본국헌법

 일본 국민은 정당하게 선거(選擧)된 국회의 대표자를 통하여 행동하고, 우리와 우리의 자손을 위하여 여러 국민과의 화합과 협력에 의한 성과와 우리나라 전토(全土)에서 자유가 가져오는 혜택을 확보하며, 정부의 행위로 다시 전쟁의 참화(慘禍)가 일어나는 일이 없기를 결의하며, 이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여 이 헌법을 확정한다. 무릇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信託)에 의한 것으로, 그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이를 행사하며, 그 복리(福利)는 국민이 누린다. 이는 인류 보편(普遍)의 원리로, 이 헌법은 그러한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어긋나는 일체의 헌법, 법령 및 조칙(詔勅)을 배제한다.

 일본 국민은 항구평화(恒久平和)를 염원하고, 인간 상호관계(相互關係)를 지배하는 숭고한 이상을 깊이 자각(自覺)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여러 국민의 공정(公正)과 신의(信義)를 신뢰(信賴)하여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지키기로 결의한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專制)와 예종(隷從), 압박(壓迫)과 편협(偏狹)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에 서고자 한다. 우리는 전 세계의 국민이 모두 공포와 결핍(缺乏)에서 벗어나고, 평화 속에 생존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떤 국가도 자국의 일에만 전념하여 다른 국가를 무시하여서는 아니 되며, 정치도덕(政治道德)의 법칙은 보편적(普遍的)인 것으로, 이 법칙에 따라 자국의 주권을 유지하고, 다른 국가와 대등한 관계에 서는 것이 각국의 책무(責務)라고 믿는다.

 일본 국민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全力)을 다하여 이 숭고한 이상과 목적을 달성할 것을 맹세한다.


   제1장 천황(天皇)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象徵)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바탕한다.

제2조
황위는 세습되며, 국회가 의결한 황실전범(皇室典範)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계승한다.

제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

제4조
① 천황은 이 헌법에서 정하는 국사(國事)에 관한 행위만을 수행하고,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아니한다.
② 천황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제5조
황실전범에서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둘 때에는,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수행한다. 이 경우에는 앞의 조(條)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6조
① 천황은 국회의 지명(指名)에 기초하여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을 임명한다.
② 천황은 내각의 지명(指名)에 기초하여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의 수장[長]이 되는 재판관을 임명한다.

제7조
천황은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하여, 국민을 위해 다음의 국사에 관한 행위를 수행한다.

  1. 헌법개정, 법률, 정령(政令) 및 조약을 공포(公布)하는 일.
  2. 국회를 소집(召集)하는 일.
  3. 중의원(衆議院)을 해산(解散)하는 일.
  4. 국회의원 총선거 시행을 공시(公示)하는 일.
  5. 국무대신(國務大臣) 및 법률에서 정하는 그 밖의 관리(官吏)의 임면(任免)과 전권위임장(全權委任狀) 및 대사(大使), 공사(公使)의 신임장(信任狀)을 인증(認證)하는 일.
  6.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형(刑)의 집행면제 및 복권(復權)을 인증하는 일.
  7. 영전(榮典)을 수여하는 일.
  8. 비준서(批准書) 및 법률에서 정하는 그 밖의 외교문서를 인증하는 일.
  9.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接受)하는 일.
  10. 의식(儀式)을 행하는 일.
제8조
황실(皇室)에 재산(財産)을 양도(讓渡)하거나, 또는 황실이 재산을 양수(讓受)하거나 사여(賜與)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바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2장 전쟁의 포기(放棄)

제9조
① 일본 국민은 정의(正義)와 질서(秩序)를 기조(基調)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希求)하고, 국권(國權)의 발동(發動)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하(威嚇) 또는 무력행사(武力行使)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앞의 항(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陸海空軍)과 그 밖의 전력은 보유[保持]하지 아니한다. 국가(國家)의 교전권(交戰權)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제3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제10조
일본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제11조
국민은 모든 기본적 인권의 향유를 방해받지 아니한다. 이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은 침해할 수 없는 영구한 권리로, 현재와 장래의 국민에게 부여한다.

제12조
이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는 국민의 부단한 노력에 의하여 유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또한 국민은 이를 남용하여서는 아니 되며, 항상 공공복지(公共福祉)를 위하여 이용할 책임(責任)을 진다.

제13조
모든 국민은 개인(個人)으로서 존중된다. 생명, 자유 및 행복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공복지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입법(立法)과 그 밖의 국정(國政)에서 최대(最大)로 존중(尊重)할 필요가 있다.

제14조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인종, 신조(信條), 성별, 사회적 신분 또는 가문[門地]으로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받지 아니 한다.
② 화족(華族)과 그 밖의 귀족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 한다.
③ 영예(榮譽), 훈장과 그 밖의 영전(榮典)의 수여(授與)는 어떠한 특권도 따르지 아니한다. 영전의 수여는 현재 이를 가지거나 장래에 이를 받는 자의 1대(代)에 한정하여 그 효력을 가진다.

제15조
① 공무원을 선정(選定)하고, 또 이를 파면(罷免)함은 국민 고유의 권리이다.
② 모든 공무원은 전체의 봉사자이지, 일부의 봉사자가 아니다.
③ 공무원의 선거는 성년자(成年者)에 의한 보통선거(普通選擧)를 보장한다.
④ 모든 선거에서 투표의 비밀을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선거인(選擧人)은 그 선택에 공적(公的)으로도 사적(私的)으로도 책임을 묻지 아니 한다.

제16조
누구도 손해의 구제(救濟), 공무원의 파면, 법률, 명령 또는 규칙의 제정, 폐지 또는 개정이나 그 밖의 사항을 위하여 평온하게 청원할 권리를 가지며, 누구라도 이러한 청원을 함으로 인한 어떠한 차별 대우를 받지 아니한다.

제17조
누구도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받은 때에는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 또는 공공단체(公共團體)에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제18조
누구도 어떠한 노예적 구속도 받지 아니한다. 또한 범죄로 인하여 처벌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뜻에 어긋나는 고역(苦役)을 받지 아니한다.

제19조
사상 및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제20조
① 신교(信敎)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한다. 어떠한 종교단체도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또는 정치상 권력을 행사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라도 종교상 행위, 축전(祝典), 의식(儀式) 또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강제받지 아니한다.
③ 국가와 그 기관은 종교교육과 그 밖의 어떠한 종교적 활동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21조
① 집회(集會), 결사(結社) 및 언론, 출판과 그 밖의 모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한다.
② 검열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통신의 비밀은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22조
① 누구라도 공공복지(公共福祉)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거주, 이전 및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② 누구라도 외국에 이주하거나 국적을 이탈할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제23조
학문의 자유는 보장한다.

제24조
① 혼인은 양성(兩性)의 합의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부부가 동등한 권리를 가짐을 기본으로 하며, 상호의 협력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② 배우자의 선택, 재산권, 상속, 주거의 선정(選定), 이혼과 혼인 및 가족에 관한 그 밖의 사항은 법률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에 입각하여 제정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25조
①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
② 국가는 모든 생활부분에서 사회복지(社會福祉), 사회보장(社會保障) 및 공중위생(公衆衛生)의 향상 및 증진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26조
① 모든 국민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능력에 따른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② 모든 국민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보통교육(普通敎育)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제27조
①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지며, 의무를 진다.
② 임금, 취업시간, 휴식과 그 밖의 근로조건에 관한 기준은 법률로 정한다.
③ 아동은 혹사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28조
근로자의 단결할 권리 및 단체교섭과 그 밖의 단체행동을 할 권리는 보장한다.

제29조
① 재산권은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재산권의 내용은 공공복지에 적합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③ 사유재산은 정당한 보상 하에 공공(公共)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제30조
국민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진다.

제31조
누구라도 법률에서 정하는 절차[手続]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그 생명 또는 자유를 박탈하거나 또는 그 밖의 형벌을 과(科)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2조
누구라도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기지 아니한다.

제33조
누구라도 현행범으로 체포된 경우를 빼고는 권한을 가진 사법관리[司法官憲]가 발급하고, 또한 이유가 되는 범죄를 명시한 영장에 의하지 아니하면 체포되지 아니한다.

제34조
누구라도 이유를 직접 고지(告知)받고, 또한 직접 변호인에게 의뢰(依賴)할 권리를 주지 아니하면 억류(抑留) 또는 구금(拘禁)되지 아니한다. 또한 누구라도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구금되지 아니하며, 요구가 있으면 그 이유는 직접 본인 및 그 변호인이 출석하는 공개(公開) 법정(法廷)에서 제시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35조
① 누구라도 그 주거, 서류 및 소지품에 대하여 침입(侵入), 수색(搜索) 및 압수(押收) 받지 아니할 권리는, 제33조의 경우를 빼고는, 정당한 이유에 따라 발급되고 또한 수색하는 장소와 압수할 물건을 명시한 영장이 없이는 침해되지 아니한다.
② 수색 또는 압수는 권한을 가진 사법관리[司法官憲]가 발급한 각각의 영장에 의하여 수행한다.

제36조
공무원에 의한 고문(拷問)과 잔학(殘虐)한 형벌은 절대 금한다.

제37조
① 모든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은 공평(公平)한 재판소의 신속한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② 형사피고인은 모든 증인에게 심문할 기회를 충분히 받으며, 또한 공공의 비용으로 자기를 위하여 강제적 절차에 의한 증인을 구할 권리를 가진다.
③ 형사피고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격을 가진 변호인을 의뢰할 수 있다. 피고인이 스스로 의뢰할 수 없는 때에는 국가가 붙인다.

제38조
① 누구라도 자기에게 불이익한 진술[供述]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② 강제(强制), 고문(拷問)이나 협박(脅迫)에 의한 자백 또는 부당하게 오래 억류나 구금된 후의 자백은 이를 증거로 삼을 수 없다.
③ 누구라도 자기에게 불이익한 유일한 증거가 본인의 자백인 경우에는 유죄가 되거나 형벌이 과(科)하여지지 아니한다.

제39조
누구라도 실행시(實行時)에 적법하였던 행위 또는 이미 무죄로 된 행위에는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아니한다. 또한 동일한 범죄에 거듭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아니한다.

제40조
누구라도 억류 또는 구금된 후 무죄 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에 그 보상(補償)을 청구할 수 있다.


   제4장 국회(國會)

제41조
국회는 국권(國權)의 최고기관(最高機關)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立法機關)이다.

제42조
국회는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의 양 의원(議院)으로 구성한다.

제43조
① 양 의원은 전국민(全國民)을 대표하여 선거(選擧)된 의원(議員)으로 조직한다.
② 양 의원의 의원(議員) 정수(定數)는 법률로 정한다.

제44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 및 그 선거인(選擧人)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 다만, 인종(人種), 신조(信條), 성별(性別), 사회적 신분(身分), 가문[門地], 교육(敎育), 재산(財産) 또는 수입(收入)에 의하여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45조
중의원 의원(議員)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다만, 중의원이 해산된 경우에는 그 기간이 끝나기 전에 종료한다.

제46조
참의원 의원(議員)의 임기는 6년으로 하며, 3년마다 의원의 반수(半數)를 개선(改選)한다.

제47조
선거구(選擧區), 투표 방법, 그 밖의 양 의원의 의원(議員) 선거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48조
누구라도 동시(同時)에 양 의원의 의원(議員)이 될 수 없다.

제49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국고(國庫)에서 적절한[相當] 액수(額數)의 세비(歲費)를 받는다.

제50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법률에서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회의 회기(會期) 중에 체포되지 아니하며, 회기 전에 체포된 의원은 그 의원(議院)의 요구가 있으면 회기 중에 석방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51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이 의원(議院)에서 한 연설, 토론 또는 표결은 원외(院外)에서 책임을 묻지 아니한다.

제52조
국회의 상회(常會)는 매년 1회 소집(召集)한다.

제53조
내각은 국회 임시회(臨時會)의 소집을 결정할 수 있다. 어느 의원(議院)의 총의원(總議員)의 4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내각은 그 소집을 결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54조
① 중의원이 해산된 때에는 해산의 날부터 40일 이내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일부터 30일 이내에 국회를 소집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② 중의원이 해산된 때에 참의원은 동시에 폐회(閉會)한다. 다만, 내각은 국가에 긴급한 필요가 있는 때에는 참의원의 긴급집회(緊急集會)를 요구할 수 있다.
③ 앞의 항(項) 단서(但書)의 긴급집회에서 채결(採決)된 조치는 임시적인 것으로, 다음 국회가 개회한 뒤 10일 이내에 중의원의 동의(同意)가 없는 경우에는 그 효력을 잃는다.

제55조
양 의원은 각각 그 의원(議員)의 자격(資格)에 관한 쟁송(爭訟)을 재판(裁判)한다. 다만, 의원(議員)의 의석(議席)을 잃게 하는 경우에는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다수(多數)에 의한 의결(議決)이 필요하다.

제56조
① 양 의원은 각각 그 총의원(總議員)의 3분의 1 이상의 출석이 없으면 의사(議事)를 열고 의결(議決)할 수 없다.
② 양 의원의 의사(議事)는 이 헌법에서 특별히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석의원의 과반수(過半數)로 결정하고, 가부동수(可否同數)인 때에는 의장이 결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57조
① 양 의원의 회의(會議)는 공개한다. 다만, 출석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다수로 의결(議決)한 때에는 비밀회(秘密會)를 열 수 있다.
② 양 의원은 각각 그 회의기록을 보존하며, 비밀회 기록 가운데 특히 비밀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 이외에는 이를 공표하고, 또한 일반에 널리 알려야[頒布] 한다.
③ 출석의원의 5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각 의원(議員)의 표결은 회의록에 기록[記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58조
① 양 의원은 각각 그 의장(議長)과 그 밖의 임원[役員]을 선임(選任)한다.
② 양 의원은 각각 그 회의와 그 밖의 절차[手續] 및 내부 규율(規律)에 관한 규칙을 정하고, 또한 원내(院內)의 질서(秩序)를 어지럽힌 의원(議員)을 징계[懲罰]할 수 있다. 다만, 의원(議員)을 제명(除名)함에는 출석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다수에 의한 의결(議決)이 필요하다.

제59조
① 법률안은, 이 헌법에서 특별히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양 의원에서 가결한 때에 법률이 된다.
② 중의원에서 가결하고, 참의원에서 이와 다른 의결을 한 법률안은 중의원에서 출석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다수로 다시 가결한 때에는 법률이 된다.
③ 앞 항(項)의 규정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중의원이 양 의원의 협의회(協議會)를 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④ 참의원이 중의원에서 가결한 법률안을 접수한 뒤에 국회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하고 60일 이내에 의결하지 아니한 때에는 중의원은 참의원이 그 법률안을 부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60조
① 예산은 먼저 중의원에 제출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② 예산에 대하여 참의원에서 중의원과 다른 의결을 한 경우에,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양 의원의 협의회를 열어도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는 때 또는 참의원이 중의원에서 가결한 예산을 접수한 뒤에 국회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하고 30일 이내에 의결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중의원의 의결을 국회의 의결로 한다.

제61조
조약(條約)의 체결(締結)에 필요한 국회의 승인은 앞 조 제2항의 규정을 준용(準用)한다.

제62조
양 의원은 각각 국정(國政)에 관한 조사를 수행하고, 이를 위하여 증인 출두(出頭) 및 증언이나 기록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제63조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과 그 밖의 국무대신(國務大臣)은 양 의원의 하나에 의석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와 관계없이 의안(議案)에 대해 발언하기 위하여 의원(議院)에 출석할 수 있다. 또한 답변 또는 설명을 위해 출석을 요구받은 때에는 출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제64조
① 국회는 파면(罷免) 소추(訴追)를 받은 재판관(裁判官)을 재판(裁判)하기 위하여 양 의원의 의원(議員)으로 조직한 탄핵재판소(彈劾裁判所)를 둔다.
② 탄핵(彈劾)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제5장 내각(內閣)

제66조
행정권(行政權)은 내각(內閣)에 속한다.

제66조
① 내각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수장인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과 그 밖의 국무대신(國務大臣)으로 조직한다.
② 내각총리대신과 그 밖의 국무대신은 문민(文民)이 아니면 아니 된다.
③ 내각은 행정권의 행사(行使)에 관하여 국회에 연대(連帶)하여 책임을 진다.

제67조
① 내각총리대신은 국회의원 가운데에서 국회의 의결(議決)로 지명(指名)한다. 이 지명은 다른 모든 안건(案件)에 우선하여 한다.
② 중의원과 참의원이 다른 지명 의결을 한 경우,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양 의원의 협의회를 열어도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하는 때 또는 중의원이 지명 의결을 한 뒤 국회 휴회 중의 기간을 제외하고 10일 이내에 참의원이 지명 의결을 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중의원의 의결을 국회의 의결로 한다.

제68조
① 내각총리대신은 국무대신을 임명(任命)한다. 다만, 그 과반수(過半數)는 국회의원 가운데에서 선임(選任)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② 내각총리대신은 임의(任意)로 국무대신을 파면(罷免)할 수 있다.

제69조
내각은 중의원에서 불신임(不信任) 결의안을 가결하거나 신임(信任) 결의안을 부결한 때에는 10일 이내에 중의원이 해산되지 않는 한 총사직(總辭職)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70조
내각총리대신이 없는 때 또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뒤 처음으로 국회가 소집한 때에 내각은 총사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71조
앞의 2개 조(條)의 경우에, 내각은 새로이 내각총리대신이 임명되기까지 계속하여 그 직무를 수행한다.

제72조
내각총리대신은 내각을 대표(代表)하여 의안(議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일반 국무(國務) 및 외교관계에 대하여 국회에 보고(報告)하고, 또한 행정각부(行政各部)를 지휘(指揮)·감독(監督)한다.

제73조
내각은 다른 일반 행정사무 외에 다음의 사무를 수행한다. 
  1. 법률(法律)을 성실히 집행(執行)하고, 국무(國務)를 총리(總理)하는 일.
  2. 외교관계(外交關係)를 처리하는 일.
  3. 조약(條約)을 체결하는 일. 다만, 사전(事前)에, 시의(時宜)에 따라서는 사후(事後)에 국회의 승인(承認)을 거칠 것을 필요로 한다.
  4. 법률에서 정하는 기준에 따라 관리(官吏)에 관한 사무(事務)를 맡아 처리하는[掌理] 일.
  5. 예산(豫算)을 작성하여 국회에 제출하는 일.
  6. 이 헌법 및 법률의 규정을 실시하기 위하여 정령(政令)을 제정하는 일. 다만, 정령(政令)에는 특별히 그 법률이 위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벌칙을 둘 수 없다.
  7.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형(刑)의 집행면제 및 복권(復權)을 결정하는 일.
제74조
모든 법률(法律) 및 정령(政令)에는 주임(主任) 국무대신이 서명(署名)하고, 내각총리대신이 연서(連署)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제75조
국무대신은 그 재임 중 내각총리대신의 동의(同意)가 없으면 소추(訴追)되지 아니한다. 다만, 이로 인하여 소추의 권리가 침해되지 아니한다.


   제6장 사법(司法)

제76조
① 모든 사법권(司法權)은 최고재판소(最高裁判所) 및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설치하는 하급(下級) 재판소에 속한다.
② 특별(特別) 재판소는 설치할 수 없다. 행정기관(行政機關)은 종심(終審)으로 재판을 수행할 수 없다.
③ 모든 재판관(裁判官)은 그 양심(良心)에 따라 독립하여 직권(職權)을 수행하며, 이 헌법 및 법률에만 구속된다.

제77조
① 최고재판소는 소송(訴訟)에 관한 절차[手續], 변호사(辯護士), 재판소의 내부 규율 및 사법사무(司法寺務) 처리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권한을 가진다.
② 검찰관(檢察官)은 최고재판소가 정하는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된다.
③ 최고재판소는 하급 재판소에 관한 규칙을 정할 권한을 하급 재판소에 위임(委任)할 수 있다.

제78조
재판관은 재판에 의하여 심신(心身)의 장애[故障]로 인하여 직무를 집행할 수 없다고 결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민[公]의 탄핵(彈劾)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罷免)되지 아니한다. 재판관의 징계처분(懲戒處分)은 행정기관이 수행할 수 없다.

제79조
① 최고재판소는 그 수장인 재판관 및 법률에서 정하는 인원[員數]의 그 밖의 재판관으로 구성하며, 그 수장인 재판관 이외의 재판관은 내각에서 임명한다.
② 최고재판소 재판관의 임명은, 그 임명 뒤 처음으로 하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국민의 심사(審査)에 올리며[付], 그 뒤 10년이 경과하고 처음으로 열리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심사에 올리고, 그 뒤에도 같다.
③ 앞의 항(項)의 경우에 투표자(投票者)의 다수(多數)가 재판관의 파면(罷免)에 찬성[可]하는 때에 그 재판관은 파면된다.
④ 심사를 위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⑤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법률에서 정하는 나이[年齡]에 이른 때에 퇴관(退官)한다.
⑥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모두 정기적으로 적당한[相當] 액수(額數)의 보수(報酬)를 받는다. 이 보수는 재임 중 감액(減額)할 수 없다.

제80조
① 하급 재판소 재판관은 최고재판소에서 지명한 자로 구성된 명부(名簿)에 의하여 내각에서 임명한다. 그 재판관은 임기를 10년으로 하며, 재임(在任)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서 정하는 나이[年齡]에 이른 때에는 퇴관(退官)한다.
② 하급 재판소 재판관은 모두 정기적으로 적당한[相當] 액수(額數)의 보수(報酬)를 받는다. 이 보수는 재임 중 감액(減額)할 수 없다.

제81조
최고재판소는 모든 법률, 명령, 규칙 또는 처분(處分)이 헌법에 적합한지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는 종심(終審) 재판소이다.

제82조
① 재판의 대심(對審) 및 판결(判決)은 공개(公開) 법정(法廷)에서 한다.
② 재판소가 재판관 전원 일치로 공공질서(公共秩序) 또는 선량한 풍속(風俗)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결정한 경우에는 대심(對審)을 공개하지 아니하고 할 수 있다. 다만, 정치범죄(政治犯罪), 출판(出版)에 관한 범죄 또는 이 헌법 제3장에서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가 문제가 되는 사건의 대심은 항상 이를 공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7장 재정(財政)

제83조
국가[國]의 재정(財政)을 처리하는 권한은, 국회의 의결에 근거[基]하여 행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84조
새로이 조세(租稅)를 부과[課]하거나 현행 조세를 변경함에는 법률 또는 법률에서 정하는 조건에 따를 것을 필요로 한다.

제85조
국비(國費)를 지출(支出)하거나 국가[國]가 채무(債務)를 부담함에는 국회의 의결에 근거[基]할 것을 필요로 한다.

제86조
내각은 매 회계연도의 예산을 작성하고, 국회에 제출하여 그 심의(審議)를 받아 의결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87조
① 예견(豫見)하기 어려운 예산의 부족에 충당하기 위하여, 국회의 의결에 기초[基]하여 예비비(豫備費)를 두고, 내각의 책임으로 이를 지출할 수 있다.
② 모든 예비비의 지출에 대하여 내각은 사후에 국회의 승낙(承諾)을 얻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88조
모든 황실재산(皇室財産)은 국가[國]에 속한다. 모든 황실의 비용(費用)은 예산에 계상(計上)하여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89조
공금(公金)과 그 밖의 공공재산(公共財産)은 종교상의 조직(組織) 내지는 단체(團體)의 사용(使用), 편익(便益) 혹은 유지(維持)를 위하여 또는 공공(公共)의 지배에 속하지 아니하는 자선(慈善), 교육(敎育) 혹은 박애(博愛) 사업에 대하여 이를 지출하거나 그 이용에 제공[供]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90조
① 국가[國]의 수집․지출의 결산(決算)은 모두 매년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이 검사하고, 내각은 다음 연도에 그 검사보고와 함께 이를 국회에 제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② 회계검사원의 조직 및 권한은 법률로 정한다.

제91조
내각은 국회 및 국민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적어도 매년 1회, 국가[國]의 재정상황에 대하여 보고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제8장 지방자치(地方自治)

제92조
지방공공단체(地方公共團體)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은 지방자치의 본뜻[本旨]을 바탕으로 하여 법률로 정한다.

제93조
① 지방공공단체에는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의사기관(議事機關)으로 의회(議會)를 설치한다.
② 지방공공단체의 수장, 그 의회의 의원(議員) 및 법률에서 정하는 그 밖의 지방공무원[吏員]은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住民)이 직접 선거(選擧)한다.

제94조
지방공공단체는 그 재산을 관리하고, 사무를 처리하며, 또한 행정을 집행하는 권능을 가지고, 법률의 범위 내에서 조례(條例)를 제정할 수 있다.

제95조
하나의 지방공공단체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지방공공단체의 주민투표에서 그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아니하면 국회는 이를 제정할 수 없다.


   제9장 개정(改正)

제96조
① 이 헌법의 개정은 각 의원(議院)의 총의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국회가 이를 발의(發議)하고, 국민에게 제안(提案)하여 그 승인(承認)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승인에는 특별한 국민투표 또는 국회에서 정하는 선거 시에 하는 투표에서 그 과반수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② 헌법 개정에 대하여 앞의 항(項)의 승인을 거친 때에 천황은 국민의 이름으로 이 헌법과 하나[一體]를 이루는 것으로 즉시 이를 공포한다.


   제10장 최고법규(最高法規)

제97조
이 헌법이 일본 국민에게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은 인류의 오랜 세월[多年]에 걸친 자유를 획득하려는 노력의 성과로서, 이러한 권리는 과거의 숱한 시련을 견뎌 현재 및 장래의 국민에게 침해할 수 없는 영구(永久)한 권리로 신탁(信託)된 것이다.

제98조
① 이 헌법은 국가[國]의 최고법규로서, 그 조규(條規)에 어긋나는 법률, 명령, 조칙(詔勅) 및 국무(國務)에 관한 그 밖의 행위의 전부 또는 일부는 그 효력을 가지지 아니한다.
② 일본국(日本國)이 체결한 조약 및 확립된 국제법규는 이를 성실히 준수[遵守]할 것을 필요로 한다.

제99조
천황 또는 섭정(攝政) 및 국무대신, 국회의원, 재판관과 그 밖의 공무원은 이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진다.


   제11장 보칙(補則)

제100조
① 이 헌법은 공포한 날부터 계산[起算]하여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
② 이 헌법을 시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법률의 제정, 참의원 의원 선거 및 국회 소집 절차[手續] 혹은 이 헌법을 시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준비절차[準備手續]는 앞의 항(項)의 날짜[期日] 전에 수행할 수 있다.

제101조
이 헌법 시행 시에 참의원이 아직 성립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성립할 때까지, 중의원은 국회로서의 권한을 수행한다.

제102조
이 헌법에 의한 제1기 참의원 의원 가운데 그 반수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그 의원(議員)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정한다.

제103조
이 헌법 시행 시에 재직(在職)하는 국무대신, 중의원 의원 및 재판관 혹은 그 밖의 공무원으로 그 지위에 상응하는 지위가 이 헌법에서 인정되는 자는 법률에서 특별히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헌법 시행으로 인하여 당연히 그 지위를 상실하지는 아니한다. 다만, 이 헌법에 의하여 후임자가 선거 또는 임명된 때에는 당연히 그 지위를 잃는다.



참고문헌
일본국헌법 원문.
일본국헌법 영문판.
법제처, 『(일본) 법제업무 편람』, 2008년.
법제처, 『알기 쉬운 법령 정비기준』,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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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쇼와 52년) 2월 17일
부동산 소유권 확인·소유권 취득 등기 말소 본소 청구, 동반소 청구 사건
부동산 소유권 확인 및 정지조건부 소유권 이전 가등기 말소 등기 본소 청구, 동반소청구사건
(이른바 햐쿠리 기지 소송 제1심)[각주:1]



전략(前略)

2. 우리나라는 독립국으로서 다른 어떠한 주권주체에 종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고유한 자위권 즉 국가가 외부로부터 긴급부정(緊急不正)의 침해를 받은 경우 자국을 방위하기 위하여 실력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고 배제하고자 하는 바의 국가의 기본권을 가진다고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헌법 제9조 제1항은 국권의 발동인 전쟁, 무력에 의한 위하,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방기하고 있으므로 자위를 위한 전쟁까지 방기한 것인지가 우선 검토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우선 앞의 동항은 문리상으로도 명확하듯이 국권의 발동인 전쟁, 무력에 의한 위하, 무력의 행사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행하여지는 경우에 한정하여 이를 방기하고 있으므로, 자위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까지 방기한 것은 아니다. 또한 외에 자위권 내지 자위를 위한 전쟁을 방기하는 뜻을 정한 규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통치의 근본을 정하는 헌법은 국가로서의 이념을 정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며 그 실현에 노력하여야 하는 것을 정하고 있고, 더욱이 헌법 전문 제2항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존」의 「유지」를 「결의」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도 명확하듯이 헌법은 우리나라의 존립, 우리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그 전제로서 당연히 예정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주권,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다하기 위하여는 이들 권리가 침해되어 또는 침해되려는 경우 이를 저지, 배제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이 헌법의 기본적 입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법은 평화주의, 국제협조주의의 원칙에 서서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공정과 신의를 신뢰하여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유지하기로 결의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 취지로 하는 바가 우리나라가 타국으로부터 긴급부정의 침해를 받아 존망의 위기에 처해진 경우에도 또한 스스로는 손을 펼쳐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들어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공정과 신의」에 맡기는 것을 결의하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하다. 만일 우리나라가 가맹한 국제연합에 의한 안전보장(국제연합헌장 제39조 내지 제42조)이 아직 유효적절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하(現下)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이 침해된 경우에는 이를 저지, 배제하고 또한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헌법 제9조 제1항)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이며, 이리하여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외부로부터의 불법한 침해에 대하여 그 침해를 저지, 배제하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여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따라 그 침해를 저지, 배제하는데 필요한 한도에서 자위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앞의 범위에서의 자위의 조치는 자위권의 작용으로서 국제법상 시인되어야 한다는 것도 명백하다. 이것은 국제연합헌장이 그 제51조에서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국제연합회원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지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는 것에 조응(照應)하는 것이다.

3. 헌법 제9조 제2항 전단(前段)은 전력의 불보지를 선언하고 있으나, 이는 자위를 위하여도 전력을 보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다음의 검토를 요하는 점이다. 동조 제2항 전단은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기타의 전력은 보지(保持)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그 제1항의 취지와의 관계에서 이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 제1항의 전력방기 등의 선언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목적으로 마련된 것, 바꾸어 말하면 「전항의 목적」이란 제1항 전체의 취지를 따라 침략전쟁과 침략적인 무력에 의한 위하 내지 그 행사에 공하는 일체의 전력의 보지를 금지하고 있다고 풀이하는 것이 상당하고, 앞의 제1항의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한다는 취지만을 따라 전력불보지의 동기를 표시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견해야말로 헌법 제66조 제2항의 이른바 문민조항의 합리적 존재이유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4. 또한 동법 제9조 제2항 후단(後段)은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자위를 위한 전쟁도 허용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말하는 「교전권」이란 전쟁의 방기를 정하는 제1항과의 관련에서, 또한 전쟁의 수단인 전력의 불보지를 정한 제2항 전단의 바탕을 따라 규정되어 있는 점에서 생각하더라도 「전쟁을 할 권리」라고 풀이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국제법상 국가가 교전국으로서 인정되는 각종의 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자위권을 행사하여 침해를 저지, 배제하기 위하여 실력행동에 나아가는 것 자체는 전혀 부인되는 것이 아니다.

5. 이상 요컨대 우리나라가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은 경우에 자위를 위한 필요한 한도에서 이를 저지하고 배제하기 위한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 및 그 자위권 행사를 위하여 유효적절한 방위조치를 미리 조직, 정비하는 것은 헌법 전문(前文), 제9조에 위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야 한다.

(후략)





- 중요한 부분(제9조 관련)만 대충 번역. 론문에 쓰려고;
  1. 미토<SPAN style="COLOR: #8e8e8e">(水戸)</SPAN> 지방재판소 판결 判例タイムズ 345호 166쪽; 裁判所時報 842호 2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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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조문

규정 내용

부속 법규 등

제1조

천황의 지위
· 황실전범(§9, §10, §22~§27)
· 형법(§232)
·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2)
· 황통보령
· 황족의 신분을 이탈한 자 및 황족이 된 자의 호적에 관한 법률

제2조

황위의 계승
· 황실전범(§1~§4, §9, §24, §25)
· 원호법
· 황통보령
· 상속세법(§12)

제3조

천황의 국사행위에 대한
내각의 조언과 승인
 

제4조

천황의 권능
· 청원법(§3)
국사행위의 위임
· 국사행위의 임시대행에 관한 법률

제5조

섭정
· 황실전범(§16~§21)

제6조

내각총리대신의 임명
 
최고재판소장관의 임명
· 재판소법(§39)

제7조

제1호

헌법개정, 법률, 정령
및 조약의 공포
 

제2호

국회의 소집
· 국회법(§1~§2의3)

제3호

중의원의 해산
 

제4호

국회의원의 총선거의
시행의 공시
· 공직선거법(§31~§32)

제5호

국무대신과
법률이 정하는
기타 관리의 임면
· 내각법(§14)
· 국가행정조직법(§16)
· 내각부설치법(§59)
· 재판소법(§39~§40)
· 검찰청법(§15)
· 사적독점의 금지 및 공정취인의 확보에 관한 법률(§29)
· 궁내청법(§8, §10)
· 외무공무원법(§8)
· 국가공무원법(§5)
· 회계검사원법(§4)
전권위임장 및 대사와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
· 외무공무원법(§2, §9)

제6호

대사, 특사, 감형, 형의
집행의 면제 및 복권의 인증
· 은사법·대사령·감형령·복권령
· 공무원 등의 징계 면제 등에 관한 법률

제7호

영전의 수여
· 위계령·문화훈장령

제8호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의 인증
· 외무공무원법(§9)
· 외국의 영사관에 교부하는 인가장의 인증에 관한 법률

제9호

외국의 대사 및 공사의 접수
 

제10호

의식의 주재
 

제8조

황실의 재산수수
 

제88조

황실재산 및 황실의 비용
· 황실경제법·황실경제법시행법
· 국유재산법(§3, §13)
· 소득세법(§9)
굵은 글씨는 국사행위


황실사전편찬위원회(皇室事典編集委員会), 황실사전(皇室事典), 가도카와가쿠게이 출판(角川学芸出版), 2009년, 184쪽을 토대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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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전범(皇室典範)
쇼와(昭和) 22년 1월 16일 법률 제3호
시행 : 쇼와 22년 5월 3일


제1장 황위계승

제1조
황위(皇位)는 황통(皇統)에 속하는 남계(男系)의 남자가 이를 계승한다.

제2조
①황위는 다음 순서에 따라 황족에게 이를 잇도록 한다.
  1. 황장자(皇長子)
  2. 황장손(皇長孫)
  3. 기타 황장자의 자손
  4. 황차자(皇次子) 및 그 자손
  5. 기타 황자손(皇子孫)
  6. 황형제(皇兄弟) 및 그 자손
  7. 황백숙부(皇伯叔父) 및 그 자손
②전항 각 호의 황족이 없는 때에는 황위는 그 이상의 최근친의 계통의 황족에게 이를 잇도록 한다.
③전2항의 경우에 있어서는 장계(長系)를 우선하며, 동등한 경우에는 연장(年長)을 우선한다.

제3조
황사(皇嗣)에게 정신이 약하거나 신체의 불치의 중환(重患)이 있거나 또는 중대한 사고가 있는 때에는 황실회의의 논의를 거쳐 전조에 정하는 순서에 따라 황위계승의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제4조
천황이 붕(崩)한 때에는 황사(皇嗣)가 바로 즉위한다.


제2장 황족

제5조
황후(皇后), 태황태후(太皇太后), 황태후(皇太后), 친왕(親王), 친왕비(親王妃), 내친왕(內親王), 왕(王), 왕비(王妃) 및 여왕(女王)을 황족으로 한다.

제6조
적출(嫡出)의 황자(皇子) 및 적남계(嫡男系) 적출의 황손(皇孫)은 남자를 친왕(親王), 여자를 내친왕(內親王)으로 하며, 삼세(三世) 이하의 적남계 적출의 자손은 남자는 왕(王), 여자는 여왕(女王)으로 한다.

제7조
왕이 황위를 계승한 때에는 그 형제자매되는 왕 및 여왕은 특별히 이를 친왕 및 내친왕으로 한다.

제8조
황사(皇嗣)되는 황자(皇子)를 황태자(皇太子)라 한다. 황태자가 없는 때에는 황사되는 황손을 황태손(皇太孫)이라 한다.

제9조
천황 및 황족은 양자를 들일 수 없다.

제10조
입후(立后) 및 황족남자의 혼인은 황실회의의 논의를 거칠 것을 요한다.

제11조
①연령 15세 이상의 내친왕, 왕 및 여왕은 그 의사에 기하여, 황실회의의 논의에 의해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②친왕(황태자 및 황태손을 제외함.), 내친왕, 왕 및 여왕은 전항의 경우 외에 부득이한 특별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황실회의의 논의에 의해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제12조
황족여자는 천황 및 황족 이외의 자와 혼인한 때는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제13조
황족의 신분을 잃은 친왕 또는 왕의 비, 그리고 직계비속 및 그 비는 다른 황족과 혼인한 여자 및 그 직계비속을 제외하고는, 동시에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단, 직계비속 및 그 비에 대하여는 황실회의의 논의에 따라 황족의 신분을 잃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제14조
①황족 이외의 여자로 친왕비 또는 왕비가 된 자가 그 남편을 잃은 때는 그 의사에 따라 황족의 신분을 잃을 수 있다.
②전항의 자가 그 남편을 잃은 때에는 동항에 의한 경우 외에 부득이한 특별한 사유가 있는 때는 황실회의의 논의에 따라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③제1항의 자는 이혼한 때에는 황족의 신분을 잃는다.
④제1항 및 전항의 규정은 전조(前條)의 다른 황족과 혼인한 여자에게 이를 준용한다.

제15조
황족 이외의 자 또는 그 자손은 여자가 황후가 되는 경우 및 황족남자와 혼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황족으로 될 수 없다.


제3장 섭정(攝政)

제16조
① 천황이 성년에 달하지 않은 때에는 섭정을 둔다.
② 천황이 정신이나 신체의 중환(重患) 또는 중대한 사고로 인하여 국사에 관한 행위를 직접 할 수 없는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에 따라 섭정을 둔다.

제17조
① 섭정은 다음의 순서에 따라 성년에 달한 황족이 이에 취임한다.
  1. 황태자 또는 황태손
  2. 친왕 및 왕
  3. 황후
  4. 황태후
  5. 태황태후
  6. 내친왕 및 여왕
② 전항 제2호의 경우에는 황위계승의 순서에 따르며, 동항 제6조의 경우에는 황위계승의 순서에 준한다.

제18조
섭정 또는 섭정이 되는 순서에 해당하는 자에게 정신이나 신체의 중환(重患)이 있거나 중대한 사고가 있는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에 따라 전조에서 정하는 순서에 좇아 섭정 또는 섭정이 되는 순서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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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項)이란 조(條・条)를 내용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에 별도의 행으로 나눈 것, 즉 조 안에서 별도의 행으로 구분되는 단락을 말한다. 문어체(文語體)나 가타카나(片仮名)로 쓴 법령에서는 행을 나누는 것이 곧 항이 되지만, 구어체(口語體) 및 히라가나(平仮名)로 쓴 법령에서는 별도로 첫 행을 한 자 들여써서 항을 구분하고 있다.

 항은 검색과 인용의 편의를 위하여 1984년경부터 항번호를 붙이고 있으며, 아라비아 숫자로 쓴다. 이전의 법령에는 항번호가 없으며, 일부 법령에서 ①・②・③과 같이 원문자를 붙인 것이 있으나 이는 검색・인용의 편의를 위해 편집자가 붙인 것일뿐 정식 항번호는 아니다.[각주:1]

 항(項)은 그 자체가 조(條・条) 안에 들어있는 문장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하며, 조(條・条)나 호(號・号)와 같은 독립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항번호를 붙이는 것 자체가 검색 또는 인용의 편의를 위한 것에 불과하며, 그렇다면 제1항은 제○조라는 조명(條名) 아래부터 쓰게 되므로 항번호가 없더라도 제1항이라는 것이 분명해 검색이나 인용에 불편함이 없으므로, 항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법제집무』(法制執務), 내각법제국(内閣法制局), 2008년에서 일부 발췌・편집
한국과 다를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1. 본 블로그에서 나타나는 원문자 항번호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래 1・2・3과 같은 항번호를 고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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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및국가에관한법률(国旗及び国歌に関する法律)
헤이세이(平成) 11년(1999년) 8월 13일 법률 제127호


(국기)
제1조 ① 국기(国旗)는 일장기(日章旗)로 한다.
② 일장기의 제식(制式)은 별기(別記) 제1과 같도록 한다.

(국가)
제2조 ① 국가는 기미가요(君が代)로 한다.
② 기미가요의 가사(歌詞) 및 악곡(楽曲)은 별기 제2와 같도록 한다.


부칙

(시행기일)
1 이 법률은 공포하는 날부터 시행한다.

(상선규칙의 폐지)
2 상선규칙(商船規則, 메이지 3년 태정관 포고 제57호)은 폐지한다.

(일장기의 제식의 특례)
3 일장기의 제식에 대하여는 당분간 별기 제1의 규정에 불구하고 촌법(寸法)의 비율에 대하여 세로[縱]를 가로[橫]의 10분의 7로 하고, 또한 일장(日章)의 중심의 위치에 대하여는 기의 중심에서 깃대측에 가로의 길이의 100분의 1이 떨어진 위치로 할 수 있다.


별기 제1 (제1조 관계)

 일장기의 제식

 


 1. 촌법의 비율 및 일장의 위치
  세로 가로의 3분의 2
  일장
   직경 가로의 5분의 3
   중심 기의 중심

 2. 채색
  바탕 백색(白色)
  일장 홍색(紅色)


별기 제2 (제2조 관계)

 기미가요의 가사 및 악곡

 1. 가사
  君が代は    (키미가―요와 / 천황의 대가)
  千代に八千代に (치요니――야치요니 / 천대로 팔천대로)
  さざれ石の   (사자레이시노 / 잔돌이)
  いわおとなりて (이와오토나리테 / 바위가 되어서)
  こけのむすまで (코케노무―스―마――데 / 이끼가 끼기까지)

 2. 악곡
  



일장기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정하는 「국기및국가에관한법률」이다.

일본국헌법뿐만 아니라, 전전(戰前)의 대일본제국헌법에서도 국기나 국가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또한 국기나 국가를 규정한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대일본제국헌법 시대에는 히노마루(日の丸)의 경우 본 법률로 폐지된 상선규칙이나 다른 포고에 따라 사실상 국기로, 기미가요의 경우 주로 문부성(文部省)의 고시나 문부성령에 따라 사실상의 국가로 취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군정(軍政)시에 잠시 히노마루의 게양이나 기미가요의 제창이 금지되었으나, 이후에 관공서에서의 행사 등에서 히노마루가 사실상 국기로서 게양되었고, 이후 기업이나 은행에서도 이러한 관행을 따르게 되었다. 기미가요 또한 관공서의 행사 등에서 국가로서 불리면서 함께 관행으로 굳어져 갔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일정 부분 국기로서 받아들여지던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문제로 부상(浮上)한 계기는 교육현장에서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일부 교사나 학생이 거부한 것이다. 일반 국민에게 널리 퍼지면서도, 천황의 상징으로 전전(戰前)에 군국주의의 상징으로도 사용되던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이후 국민주권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데에 대한 반발을 가진 일부에서 반대하는 것이다.

전후에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 등에서 히노마루를 국기로, 기미가요를 국가로 칭하면서 게양 및 제창을 권고하다가, 후일에는 거의 의무화함으로써 일선 교육현장의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기미가요의 경우 일선 교육현장에서 제창을 거부하는 사태가 빈발했다.

이에 따라 국기 및 국가에 대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1999년 6월 11일에 내각에서 「국기및국가에관한법률안」을 제출하면서 심의가 시작되었다. 7월 21일에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가와무라 다카시(河村たかし) 외 4명으로부터 국가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제목을 국기법으로 하는 수정안이 제출되었으나 기립표결에서 부결되었고, 이어 간 나오토(菅直人) 외 2명으로부터 수정안이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다음날(7월 22일)에 열린 중의원 본회의에서 간 나오토 등이 제출한 수정안이 기립표결에서 부결되었고, 원안을 기명투표를 통해 표결한 결과 총 489인 가운데 찬성 403표, 반대 86표로 가결되었다.

8월 9일에는 에다 사쓰키(江田五月)가 제출한 수정안이 참의원 국기및국가에관한특별위원회에 제출되었으나 거수표결에서 부결되었고, 원안이 가결되었다. 이어 본회의에서 미네자키 나오키(峰崎直樹) 외 1명으로부터 수정안이 제출되었으나, 버튼식 투표에서 총 239인 가운데 찬성 54표, 반대 185표로 부결되었다. 원안은 총 237인 가운데 찬성 166표, 반대 71표로 가결되면서 이후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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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헤이세이 5년) 3월 23일
건조물침입·기물손괴·위력업무방해피고사건 (오키나와 국체 히노마루 소각 사건 제1심)[각주:1]



주문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
 이 재판 확정의 날로부터 3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소송비용 가운데 증인 네하라 마사아키(根原正明)에게 지급한 부분 가운데 제3회 및 제6회 공판분의 각 5분과 함께 그 나머지 증인에게 지급한 부분은 피고인의 부담으로 한다.



이유


 범행에 이른 경위

 제42회 국민체육대회 하·추계 대회(이하 「오키나와 국체」라고 한다.)는 쇼와 59년(1984년) 7월 4일, 재단법인 일본체육협회(이하 「일체협」이라고 한다.), 문부성 및 오키나와 현이 주최하여 쇼와 62년(1987년)에 오키나와 현에서 개최하도록 하여 그 가운데 소프트볼 경기는 요미탄촌(讀谷村), 온나촌(恩納村), 가데나정(嘉手納町) 및 차탄정(北谷町)의 4개 정촌(町村)에서 앞의 주최자 외에 각 경기의 회장지의 정촌도 함께 주최하여 재단법인 일본소프트볼협회(이하 「일소협」이라고 한다.)가 주관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요미탄손에서는 소년남자소프트볼경기회(이하 「본건 경기회」라고 한다.)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를 운영하기 위하여 쇼와 59년 7월 20일에 요미탄촌이 중심이 되어 제42회 국민체육대회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이하 「요미탄촌 실행위원회」라고 한다.)를 설립하여 요미탄촌장 야마우치 도쿠신(山内徳信, 이하 「야마우치 촌장」이라고 한다.)이 그 회장이 되었다.

 오키나와 국체의 각 경기회의 개회식에서는 오키나와 국체의 주최자가 정한 실시요항(実施要項)과 이에 따라 준거하는 것으로 보는 국민체육대회 개최기준요항 등에 바탕하여, 오키나와현 실행위원회가 쇼와 61년 1월에 각 경기회의 개회식 등의 실시요항을 정하고, 그 가운데 개회식 등은 회장지 시정촌 실행위원회가 당해 경기단체와 협의 하에 실시하며, 개회식에서는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에서는 일소협 등과 협의하여 개회식 등의 실시요령을 정하고, 그 운영을 맡게 되었다.

 한편으로 일소협회장인 히로세 마사루(弘瀬勝, 이하 「히로세 회장」이라고 한다.)는 그 때까지 국체에서는 그 개회식 외에 각 경기회의 개시식에서도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으므로, 오키나와 국체의 소프트볼 경기의 개회식에서도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쇼와 61년 7월경에 오키나와 국체의 리허설으로 열린 소프트볼 대회 후의 파티에서 히노마루 기 게양 등에 대하여 오키나와현민 사이에 반대가 있고, 특히 요미탄촌에서 반대가 강해 문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설명을 들었으므로, 야마우치 촌장에 대하여 본건 경기회의 개회식에서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이 관행대로 행할 수 있는지 타진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우치 촌장이 「여러가지로 어려운 문제도 있으나, 국체를 여는 이상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하였으므로, 히로세 회장은 본건 경기회의 개회식에서도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을 관행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혹시 야마우치 회장에 대하여 그에 대하여 문제가 생긴 경우에는 연락을 바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편 야마우치 회장은 위 시점에서는 본건 경기회를 요미탄촌에서 개최하기 위하여 그 개시식에서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동년 12월에 요미탄촌의회에서 「히노마루 게양, 기미가요(君が代) 제창의 강요에 반대하는 요청결의」(日の丸掲揚、君が代斉唱の押しつけに反対する要請決議)가 채택되었고, 그 즈음 요미탄촌내에서 히노마루 기 게양이나 기미가요 제창의 강제에 반대하는 뜻의 서명이 촌민의 삼할에 가까운 8,000여 명으로부터 모이기도 하였고, 또한 쇼와 62년 3월에는 야마우치 촌장 자신이 학교의 졸업식, 입학식 등에서의 히노마루 기 게양이나 기미가요 제창의 강제는 유감이라는 뜻의 촌장으로서의 시정방침연설을 행하는 등이 진행되던 가운데, 이번 기회에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이 없이 본건 경기회의 개회식을 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의 의향을 일소협에 전하여 협의하여도 붇아들여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직접 히로시 회장에게 전하는 등의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다. 이처럼 판단을 망설인 채로 본건 경기회의 개최일이 다가오고, 야마우치 촌장은 드디어 일소협의 하부단체인 오키나와현 소프트볼협회의 이사장에게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이 없이 본건 경기회의 개회식을 행할 방침을 전달했다.

 본건 경기회는 쇼와 62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의 일정으로 개최하게 되었으나, 급히 날아온 위 방침을 알게 된 히로세 회장은 새삼스레 상부 단체인 일체협의 의향에 반하여 히노마루 기의 게양 등이 없이 개시식을 행할 수는 없고, 급히 결론을 낼 필요가 있으므로 강경하게 시정의 번의를 촉구하고자 생각하고, 동월 22일에 야마우치 회장에 대하여 전화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면 회장 변경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에서 협의를 거듭하여, 익23일에는 기미가요의 제창은 없이, 히노마루 기는 게양한다고 결론을 내고, 히로세 회장도 이에 승낙하였다. 그리고 익24일에 요미탄촌사무소의 촌장실에서 매스컴이나 관계자에 대하여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화합하였다는 것이 공표되었다.

 피고인은 전후 요미탄촌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서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등으로 처자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 자이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오키나와전에서 동촌에 있는 치비치리가마(チビチリガマ, 동굴)에서 일어난 주민의 집단자결에 대하여 조사를 진행하고 있던 가운데, 히노마루 기는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에 이용된 기로, 국기로 어울리지 않으며, 국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여 오키나와 국체에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는 것에 반대하였던 것이 히로세 회장으로부터의 강경한 요청의 결과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에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게 된 것을 알자 히로세 회장에 의하여 히노마루 기의 게양이 강압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요미탄촌민이 이레가 되어 본건 경기회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동 촌민의 의사를 짓밟아 뭉개는 것이므로 히노마루 기의 게양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동월 25일에는 익일의 개시식에서 동료와 함께 히노마루 기 반대를 표현하는 플래카드를 거는 것과 함께 히노마루 기가 게양되면 단독으로 이를 끌어내리리라 생각하는데 이르렀다.


 범죄 사실(罪となるべき事実)[각주:2]

 피고인은 쇼와 62년 10월 26일, 오키나와현(번지 생략) 소재의 요미탄 평화의 숲 구장에서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바, 동 구장 외야 스탠드에 지어진 철근콘크리트조의 제기게양대 겸 스코어보드(이하 「본건 스코어보드」라고 한다.)의 제기게양대에 설치된 센터폴에 국기로서 히노마루 기가 게양된 것을 보고, 앞의 히노마루 기를 끌어내리는 것과 함께 그 재게양을 방해하기 위하여 태워버리자고 결의하고, 또한 위 행위에 의하여 본건 경기회의 업무를 방해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동일 오전 9시 17분경 요미탄촌 촌장 겸 요미탄촌 실행위원회 회장 야마우치 도쿠신이 계원에게 스코어보드 조작실 등으로의 출입구 문을 잠그게 하는 등 지키게 한 본건 스코어보드의 남서측 벽면의 꽃블록을 타고 올라 그 옥상에 이유 없이 침입하여 센터폴에 달게 한 요미탄촌 소유의 로프를 미리 준비한 커터칼로 절단한 뒤에 동 폴에 국기로서 게양되어 있는 요미탄촌 실행위원회 소유의 히노마루 기 1매(가로 약1.3미터)를 끌어내려 이를 소지하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이를 위 구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인 뒤에 그 자리에 던져 버리고, 그 반 가량을 소실시켜 일체협, 문부성, 오키나와현 및 요미탄촌이 주최하고, 일소협이 주관하며, 요미탄촌 실행위원회가 운영하는 본건 경기회의 운영을 혼란케 하고, 그 경기의 개시를 약 15분간 지연시키는 등을 하며, 또한 타인 소유의 기물(器物)을 손괴(損壞)한 동시에 위력(威力)을 써서 본건 경기회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다.


 증거목록(証拠の標目)
  <생략>


 변호인의 주장에 대한 판단(弁護人の主張に対する判断)

 제1 공소기각의 신청에 대하여

  1 공소권 남용의 주장에 대하여

 변호인은 「기물손괴죄에 대하여는 불과 3500엔의 히노마루 기를 소각한 것에 지나지 않고, 가령 범죄의 혐의가 인정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경미사건으로서 기소유예처분이 상당함에도, 굳이 소추한 본건 기소는 평등원칙에 위반하는 것이다. 또한 기물손괴의 방법·수단인 행위를 건조물침입죄로서, 그 영향·결과인 현상을 위력업무방해죄로서 각각 소추하고 있으나, 이들에 대하여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건조물침입죄는 외벽을, 더욱이 공연하게 오른 것 뿐이며, 그 법익침해의 정도는 적고, 위력업무방해도 방해된 업무의 내용, 정도가 막연하여 명확하할 수 없는 정도의 법익침해에 지나지 않는 점, 이들은 히노마루 소각을 기물손괴죄로 다루기 위하여 부수하여 기소한 것이 명확하므로 건조물침입죄 및 위력업무방해죄에 대한 기소도 평등원칙에 위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본건 공소 제기는 헌법 14조에 위반하여 공소권의 남용이므로 무효이며, 공소기각하여야 한다는 뜻을 주장한다.

 검토하자면 분명 검찰관의 재량권의 일탈이 공소제기를 무효라고 할 수 있는 경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현행 법제 하에서는 공소제기를 할지 말지 검찰관에게 광범한 재량권이 주어져 있는 것에 비추어 생각하면 공소제기가 무효가 되는 것은 공소제기 자체가 직무범죄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극한적인 경우에 한하여야 하는 점, 전기(前記) 인정의 사실 관계에 비추어 본건 공소제기가 무효가 될 정도로 극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위 주장은 이유가 없다.

  2 소인(訴因) 불특정의 주장에 대하여

 변호인은 「기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에서는 기물손괴죄의 대상인 기물에 관하여 「국기」라고 기재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국기가 존재하는지 않는지, 또한 어떠한 기가 국기인가 법제화되지 않았고 확정하지 않는 이상 「국기」라고 하는 기재는 의미불명이다. 또한 위력업무방해죄의 대상인 업무에 대하여 경기회의 어떠한 업무를 방해한 것인지 명확히 되어있지 않다.」고 하여 본건 공소제기는 소인(訴因)이 불특정이므로 무효이며, 공소기각하여야 한다는 뜻을 주장한다.

 먼저 기물손괴죄의 소인(訴因)에 대하여 보면, 제1회 공판에서 검찰관은 「국기(國旗)란 히노마루 기이다.」라고 석명(釋明)하고 있던 점, 히노마루 기를 「국기」라고 기재하고 있는 것이 소인의 특정, 명시에 흠결을 가지는 지에 대하여 검토한다.

 국기라고 하는 용어는 법률 등에 의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기(旗)로서 쓰여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기를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에 한하지 않고 사실상 국민의 다수에 의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기로서 인식되어 쓰이고 있는 기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현행 법제상 히노마루 기를 가지고 우리나라의 국기로 하는 뜻의 일반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변호인이 지적하는 대로다. 그러나 선박법 등에서는 일정한 선박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것 등이 정하여져 있고, 그 경우에 국기로서 쓰여야 하는 기에 대하여는 선박규칙(메이지 3년 1월 27일 태정관 포고 제57호)에 근거하여, 또는 당연한 전제로서 히노마루 기를 가리킨다고 해석된다. 이렇듯 히노마루 기는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타국과 식별하기 위하여 법률 등에 의하여 국가로서 쓰여야 한다는 것이 정하여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 국내관계에 있어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쓰이는 경우의 국기에 대하여는 어떠한 법률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민 일반에 어떠한 행위도 의무지우지 아니한다. 그러나 현재 국민으로부터 히노마루 기 이외에 국기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없고, 또한 다수의 국민이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인식하고 쓰고 있으므로 검찰관이 공소사실에 있어서 기물손괴죄의 대상물로서 기재한 「국기」란 「히노마루 기」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고, 소인의 특정, 명시가 흠결인 바는 없다.  (이하 위력업무방해죄의 소인 흠결에 대한 검토 생략)

 제2 구성요건에 관한 주장에 대하여

  1 위력업무방회죄의 성부(成否)에 대하여 (번역 중 생략)

  2 건조물침입죄의 성부(成否)에 대하여 (번역 중 생략)

 제3 위법성 조각(阻却)에 관한 주장에 대하여

  1 가벌적 위법성의 부존재에 대하여

 변호인은 「피고인이 손괴한 히노마루 기 및 로프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무가치와 같은 물건으로, 또한 위력업무방해나 건조물침입에 대하여는 법익침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가 극히 경미하여 모두 가벌적 위법성이 없다.」는 뜻을 주장한다.

 먼저 기물손괴의 점에 대하여 검토하자면 동죄에 있어서 「물」(物)이란 재물(財物), 즉 보호가치 있는 물건을 말하나 본건의 객체인 히노마루 기 및 로프는 전기(前記) 인정대로 모두 그 본래의 효용에 좇아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이므로 보호가치를 가지는 물건이며, 이들을 손괴한 행위는 기물손괴죄에 해당하여 실질적으로도 위법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위력업무방해 및 건조물침입의 점에 대하여도 각각의 범행 태양(態樣)이나 그 결과는 전기(前記) 인정대로이며, 법익침해의 정도가 극히 경미하다고는 할 수 없고, 그 주장은 전제를 잃어 부당하다. 위 각 주장은 모두 이유 없다.

  2 정당방위 등에 대하여

 변호인은 「히로세 회장에 의한 히노마루 기의 강제에 의하여 요미탄촌, 촌민, 경기회 개시식 참가자 및 피고인의 사상·양심의 자유, 동촌 및 촌민의 의사결정의 자유(지방자치)와 동촌, 촌민 및 피고인의 「히노마루가 없는 국체」를 행하자고 하는 표현의 자유가 부정하게 침해된 것이므로 이에 대하여 행해진 피고인의 기물파손행위는 정당방위 또는 자구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 위력업무방해행위 및 건조물침입행위는 긴급피난 또는 자구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뜻을 주장한다.

 그러나 전기(前記)와 같이 국내관계에 있어서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쓰이는 경우의 국기에 대하여는 어떠한 법률이 존재하지 아니하고, 국민 일반에 아무런 행위도 의무지우지 아니하는 히노마루 기를 이 의미에서의 국기로서 쓸 것인가 않을 것인가, 어떠한 곳에 게양할 것인가는 국민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져 있는 것이므로,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에 있어서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또한 그 주최자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사결정과정을 보면 전기(前記) 인정과 같이 오키나와 국체의 주최자들에 의하여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에 대하여는 요미탄촌 실행위원회가 주관자인 일소협과 협의한 뒤 실시하는 것이라고 정하여져 있었던 바,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이 가까워져 요미탄촌 실행위원회로서는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하지 않는 방침인 것을 안 일소협의 히로세 회장이 상부단체인 일체협의 의향을 따라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게양하지 않는다면 회장의 변경도 있을 수 있다고 하며 강경한 자세로 이를 행하도록 요청하고,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에서 협의를 거듭하여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에 있어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되어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와 일소협의 협의가 정리된 것이다. 분명 위 협의가 정리되는 과정에서 히로세 회장의 발언에는 온당하지 않은 점도 있으나, 이는 요미탄촌 실행위원회가 적절한 시기에 방침을 확정하고, 필요에 응하여 일소협과의 협의에 미치지 못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전기(前記) 인정의 경위에서 본다면 이러한 발언이 있었으므로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의 의사결정의 자유를 부당하게 빼앗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결국 주최자들의 의사결정에 근거하여 본건 경기회의 개시식에 있어서 히노마루 기가 국기로서 게양된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경위를 거쳐 행하여진 히노마루 기의 게양이 부정한 침해라거나 현재의 위난에 해당한다고는 인정할 수 없고, 위 주장은 이유 없다.

  3 정당행위에 대하여

 변호인은 「기물손괴행위는 방위행위, 표현행위 및 저항행위이며 수단의 상당성, 법익의 균형성, 필요성 및 긴급성도 있으며, 또한 위력업무방해행위 및 건조물침입행위는 법익침해의 경미성,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상당성, 필요성 및 긴급성이 있어 모두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뜻을 주장한다.

 피고인이 히노마루 기는 국기로서 어울리지 않고, 국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소이(所以) 및 위 사상에 바탕하여 본건 범행에 이른 것은 전기(前記) 인정대로이나, 전게(前揭) 관계 각 증거에 따르면 요미탄촌민 가운데에는 피고인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 인정되는 바이나, 민주주의사회에 있어서는 자기 주장의 실현은 언론에 의한 토론이나 설득 등의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행하여져야 하는 것이며, 가령 본건 경기회에 있어서 히노마루 기의 게양에 반대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주장의 실현을 위하여 전기(前記) 인정과 같은 피고인의 실력행사는 수단에 있어서 상당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고, 이들이 정당행위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위 주장에는 이유 없다.


 법령의 적용 (번역 중 생략)


 양형의 이유

 본건은 오키나와 국체에서 소년남자 소프트볼 경기회의 개시식에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한 것이 강제되었다고 생각한 피고인이 스코어보드의 옥상에 침입하여 센터폴에 달게 한 로프를 절단한 뒤 히노마루 기를 끌어내려 태워 버리는 등을 하여 본건 경기회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라고 하는 사안이지만, 주최자인 일체협의 의향을 따fms 히로세 회장으로부터 경기회의 개시식에서의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도록 강한 요청이 있었던 것, 최종적으로는 경기회의 운영을 맡은 요미탄촌 실행위원회 내에서도 상의하여 히노마루 기의 게양이 결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기의 신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실력을 가지고 히노마루 기를 태워버리기 위하여 본건 범행에 이른 것이며,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결코 용인하기 어려운 일탈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피고인의 위 행위에 의하여 요미탄촌민들이 손수 국체로서 협력하여 성공시키자고 준비해 온 경기회의 업무를 방해한 결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 피고인에게는 반성의 태도도 볼 수 없는 것 등도 고려하면 피고인의 형책(刑責:형사책임)은 경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경기회의 운영을 맡은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의 회장인 야마우치 촌장이 주최자인 일체협이나 오키나와현의 의향을 따라 개시식에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할 지 아닌지 판단을 헤매고, 그 개최에 임박하게 되어서야 드디어 요미탄촌 실행위원회로서는 시작식에서 히노마루 기를 게양하지 않는다는 의향이었던 것이 그 운영에 관하여 협의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는 일소협에 전해져 그 대응에 고려한 일소협의 히로세 회장이 요미탄촌 실행위원회에 대하여 히노마루 기를 게양시켰다고 하는 경위에 대하여, 본래 하여야 할 협의가 충분히 되지 아니한 것이 피고인의 본건 범행을 유발시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점, 요미탄촌에서 나고 자란 피고인이 동촌에 있어서 오키나와전의 역사, 특히 치비치리가마의 집단자결의 조사 등을 통하여 히노마루 기에 대하여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는 것에 이른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점, 손괴한 물건은 비교적 저렴하고, 업무방해의 결과도 비교적 적은 점, 피고인은 오랜 기간 견실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요미탄촌 상공회의 임원을 맡기도 하는 등 동촌의 발전에 협력하여 온 자인 점 등 피고인을 위하여 참작할 사정도 인정되는 것으로서, 이들 사정을 또한 함께 고려한 뒤에 주문에 적힌 바와 같이 형의 양정을 하였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재판관 미야기 교이치  宮城京一
재판관 아키바 야스히로 秋葉康弘
재판관 다나카 겐지   田中健治



 이 사건은 피고인이 1987년(쇼와 62년) 10월에 오키나와현(沖縄県) 나카가미군(中頭郡) 요미탄촌(讀谷村)에서 열린 제42회 국민체육대회 소프트볼 경기 개시식에서 깃대에 게양된 히노마루(日の丸)를 끌어 내려 소각하였다고 하여 공소가 제기된 건조물침입, 기물손괴, 위력업무방해피고사건의 제1심 판결이다. 소인(訴因)의 특정과 관련하여 히노마루가 국기(國旗)인가 아닌가가 다투어졌으므로 매스컴 등에서 널리 보도되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태평양전쟁에서 비참한 지상전을 체험하고, 주민이 집단자결에 몰리는 등의 오키나와의 히노마루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있다.

 변호인의 주장은 공소권 남용, 가벌적 위법성의 부존재, 정당방위, 정당행위 등 여러 면에 걸치나, ① 소인이 불특정이란 주장에 관하여 기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에서는 기물손괴죄의 대상인 기물에 관하여 「국기」(國旗)라고 기재하고 있으나, 일본에 국기가 존재하는가 아닌가, 또한 어떠한 깃발이 국기인가는 법제화되어 있지 않아 확정되어 있지 않는 이상, 「국기」라는 기재는 의미불명으로 본건 공소제기는 소인이 불특정된 까닭에 무효로 공소기각하여야 하며, ② 위력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관하여 피고인의 행위는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만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위력에 해당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행위에 따라 업무방해가 현실적으로 야기된 바가 없으며, 그 구체적 위험 또한 발생하지 않은 것이므로 피고인의 행위는 업무방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등을 주장하였다.

 본 판결은 ①의 주장에 대하여 검찰관이 제1회 공판기일에 「국기란 히노마루 기이다」라는 뜻을 석명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뒤, 국기라고 하는 용어는 법률 등에 따라 국가를 상징하는 기로서 쓰이도록 정하여진 기를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경우에 한하지 아니하고 사실상 국민의 다수에 의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기로서 인식되고, 쓰이고 있는 기를 말하는 경우도 있으며, 현행 법제상 히노마루 기를 가지고 일본의 국기라고 하는 뜻의 일반적인 규정은 존재하지 않으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선박법 등에 따라 히노마루 기를 타국과 식별하기 위한 국기로서 쓰도록 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국내관계에 있어서도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쓰이는 경우의 국기에 대하여는 아무런 법률도 존재하지 아니하며, 국민 일반으로 하여금 어떠한 행위도 의무지우지 아니하나, 현재 국민으로부터 히노마루 기 이외의 국기로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없고, 또한 다수의 국민이 히노마루 기를 국기로서 인식하고 쓰고 있으므로, 검찰관이 공소사실에 있어서 기물손괴죄의 대상물로서 기재한 「국기」란 「히노마루 기」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고, 소인의 특정에 흠결이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의 판시를 하였다. 본 판결은 공소사실에 기재된 「국기」가 「히노마루 기」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는 사안에 응하여 판단하였으므로 일반적으로 말하면 소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특정을 요한다고 생각할 것인지는 판례상에서 분명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실무상은 소인의 기재는 다른 범죄사실에서의 식별 특정으로 족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각주:3]
  1. 나하<SPAN style="COLOR: #8e8e8e">(那覇)</SPAN> 지방재판소 판결 쇼와 62년 (わ) 제346호 [본문으로]
  2. 원문을 직역하면 죄가 될 만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국의 일반적인 판결문에 준하여 범죄 사실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3. 『판례타임스』<SPAN style="COLOR: #8e8e8e">(判例タイムス)</SPAN> 제815호, 1993년 7월, 11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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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형법의 시작

일본에서 근대적 의미를 갖는 형법은 1880년(메이지 13년)에 태정관(太政官) 포고 제36호로서, 서양의 근대적인 형법을 계수하여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형법과 구별하여 「구 형법」이라고 불린다. 형법과 함께 치죄법(治罪法, 형사소송법에 해당한다.)이 제정되어 1882년(메이지 15년) 1월 1일에 이전에 시행되던 신률강령(新律綱領)·개정률례(改定律例)를 대신하여 시행되었다.

「구 형법」은 전4편 430조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메이지 5년무렵부터 사법성(司法省) 내에서 본격적인 형법 초안의 기초가 진행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안 등이 모두 불충분하자 사법성은 메이지 정부가 초청한 프랑스인 보아소나드(Gustave Emile Boissonade de Fontarabie)에게 프랑스 형법전을 기본으로 하는 형법 초안의 작성을 이뢰하였고, 그 초안을 바탕으로 원로원 내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후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로 교체되었다.)를 중심으로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및 호소카와 준지로(細川潤次郎) 등과 함께 「형법초안심사국」을 설치하여 심의를 통해 수정하였다.


「구 형법」의 특징


「구 형법」은 총칙과 각칙을 구분하고 죄형법정주의를 선언하였으며, 범죄를 중죄(重罪)·경죄(輕罪)·위경죄(違警罪)로 나누어 규정하고 있다. 또한 형벌의 종류를 사형, 도형(徒刑), 유형(流刑), 징역, 금옥(禁獄:중죄의 형), 금고, 벌금(경죄의 형), 구류, 과료(위경죄의 형)를 포함한 주형(主刑)과 박탈공권(剝奪公權), 정지공권(停止公權), 금치산, 감시, 벌금, 몰수의 부가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1810년에 제정된 프랑스 형법전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자수에 의한 죄의 감경(85조 이하), 범죄를 범한 자를 장닉(藏匿) 또는 은피(隱避)한 친족에 대하여는 죄를 묻지 아니하거나(153조) 친족간의 절도에 대하여는 죄를 묻지 아니하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 377조), 불경죄의 엄벌(117조 및 119조) 등 일본의 전통적인 법사상에 근거한 규정도 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이 문명국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측면에서, 대내적으로는 자유민권운동의 격화에 대항하기 위한 치안법제의 측면도 나타난다.

그런데 「구 형법」 제정 직후부터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정부내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 형법」이 프랑스법의 영향을 받아 국가에 의한 처벌권의 행사에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이나(더욱이 민법전에서도 프랑스법을 모델로 한 「구 민법」이 비난의 대상이 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유럽에서 새로운 형법이론(근대학파, 신파)이 탄생하고 종래의 고전주의(구파)와 심한 논쟁을 하고 있음에도 「구 형법」에는 그 성과가 반영되지 않는 것 등이 문제시되었다. 게다가 당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범죄의 증가에 대하여 대응하지 못한다는 불만도 비판에 박차를 가했다. 이 때문에 보안조례·치안경찰법 등의 새로운 치안입법이나 「도박범처분규칙」·「명령의 조규위반에 관한 형벌의 건」(1890년, 행정벌을 정하는 법령으로 당시는 죄형법정주의와의 관계에서 추진파인 이토 미요시(伊東巳代治)와 위헌론인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간의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등에 의하여 「구 형법」의 이념과의 모순을 품은 새로운 법령이 차례로 만들어져 일부에서는 「형법 불요론」까지 주장할 수 있는 시말(始末)이었다.

그러한 움직임에 사법성은 독일 형법을 중심으로 각국의 형법을 참고로 하여 새로운 형법을 제정하는 방침을 세웠다. 개정안은 1890년·1895년·1897년·1901년·1902년까지 다섯번에 걸쳐 의회에 제출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폐안되거나 변호사회(때로는 검찰관이나 재판관도 나섰다.)의 반대론 등에 의하여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현행 형법의 제정

제1차 사이온지(西園寺) 내각의 사법대신이었던 마쓰다 마사히사(松田正久)는 관료뿐만이 아닌 학자나 변호사, 제국의회 양원에서도 대표를 초청한 「법률취조위원회」(法律取調委員會)를 조직하고, 이에서 형법개정 논의를 행하도록 하였다. 마쓰다의 노고가 결실을 맺어 1907년(메이지 40년)에 현행 형법이 성립하였다(메이지 44년 4월 24일 법률 제45호).

새로운 형법에는 강력한 치안법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반영된 한편, 범죄유형이 「구 형법」에 비하여 추상적·포괄적으로 정하여지고, 법정형의 폭이 넓어졌다. 이를테면 「구 형법」에서 살인행위를 모살죄(謀殺罪), 고살죄(故殺罪), 독살죄(毒殺罪), 참각살죄(慘刻殺罪), 편리살죄(便利殺罪), 유도살죄(誘導殺罪), 오살죄(誤殺罪) 등으로 구분하고 그 법정형을 사형 또는 무기도형(無期徒刑)으로 정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형법에서는 이를 보통살인죄 하나로 정리하고 법정형을 ‘사형,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중죄, 경죄, 위경죄의 구별을 폐지하며 형벌의 종류도 간소화하였는데, 이는 19세기 말에 유행한 자유주의를 수정하려는 사상적 동향에 근거하여 당시의 형법이론과 형사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형법은 재판관의 해석이나 양형의 여지가 크고, 그 재량에 의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거나 반대로 누범에 대하여는 중한 처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범죄자의 갱생이나 사회방위를 위한 유연함을 겸비한 것이며, 당시의 국제수준에 비추어 뒤처지지 않는 형법전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의도가 운용에 지나치게 반영되면서 인권 침해의 위험도 있어, 실제로 형사재판에 있어서는 그 역사를 느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극복은 사법행정권이 내각의 일원인 사법대신에서 재판소로 옮겨지고, 인권의 존중을 강조하게 된 일본국헌법이 제정된 이후였다.

이후 현행 형법은 1921년(다이쇼 10년)부터 2007년(헤이세이 19년)에 이르기까지 총 스물세차례 개정되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1921년의 첫 개정에서는 업무상횡령죄의 법정형을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서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변경하였으며(제253조, 다이쇼 10년 4월 16일 법률 제77호), 1941년에는 노역장 유치기간 연장과 몰수의 요건 확장, 추징의 신설과 함께 강제집행부정면탈죄(강제집행방해죄) 및 경매등방해죄·담합죄, 「안녕질서에 대한 죄」, 업무상실화죄 및 중실화죄를 신설하였으며, 실화죄 및 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죄의 법정형을 가중하였으며, 회뢰죄(賄賂罪) 규정을 정비하였다(쇼와 16년 3월 12일 법률 제61호).

1947년에는 일본국헌법의 공포와 함께 그 정신, 특히 평등과 인권존중을 근거로 형법전을 전반에 걸쳐 개정하였다(쇼와 22년 10월 26일 법률 제124호).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황실에 대한 죄(제2편 제1장 제73조 내지 제76조의 대역죄 및 불경죄, 제131조의 황궁등침입죄)와 안녕질서에 대한 죄(제2편 제7장의2 제83조 내지 제86조의 이적행위의죄, 제89조의 외환원조죄 등을 전시동맹국에 대하여 적용하는 것), 외국원수·사절에 대한 폭행·협박·모욕죄(제90조 및 제91조) 및 간통죄(제183조), 친족상도례의 「가족」(제244조), 연속범규정(제55조), 재판확정후의 재범에 의한 가중규정(제58조), 자국민보호주의에 의한 외국범처벌규정이 삭제되었고, 공무원직권남용죄(제193조 내지 195조), 폭행죄(제208조), 협박죄(제222조), 명예훼손죄(제230조), 공연외설죄·외설판매물등죄(제174조 및 제175조)의 법정형이 가중되었다. 또한 중과실치사상죄(제211조)가 신설되었고, 명예훼손죄의 진실성의 증명에 의한 면책규정(제230조의2) 및 형의 소멸의 규정(전과말소제도, 제34조의2)이 신설되었으며, 친족간의 의한 범인장닉죄가 불가벌이던 것이 형의 재량적 면제로 개정되었다(제105조). 또한 폭행죄는 친고죄에서 비친고죄로 개정되었고, 집행유예의 요건이 완화되고 그 취소사유가 확장되었으며, 외국판결의 효력 규정이 수정되었다.

1953년에는 집행유예 후에도 다시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형의 집행유예의 요건이 완화되었고(제25조 및 제26조, 제26조의2, 제26조의3), 첫 집행유예 이후 다시 두번째로 집행유예를 받은 자에 대하여 필요적으로 보호관찰을 붙이도록 하는 규정(제25조의2)이 신설되었다(쇼와 28년 8월 10일 법률 제195호).

1954년에는 처음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자에 대하여 임의적으로 보호관찰을 붙일 수 있게 되었으며(제25조의2), 국외에 있는 일본 항공기 내의 범죄에 대하여 선박과 동일하게 기국주의(旗國主義)를 적용(제1조 제2항)하도록 개정하였다(쇼와 29년 4월 1일 법률 제57호).

1958년에는 증인등위박죄(証人等威迫罪, 제105조의2), 알선수뢰·증뢰죄(제197조의4), 흉기준비집합죄 및 흉기준비결합죄(제208조의3) 등이 신설되었고, 2인 이상의 자가 현장에서 공동으로 범한 강간 또는 준강간죄 및 그 미수(이른바 윤간죄)가 비친고죄로 개정(제180조 제2항)되었다(쇼와 33년 4월 30일 법률 제107호).

1960년에는 부동산침탈죄(제235조의2) 및 경계훼손죄(제262조의2)가 신설되었고(쇼와 35년 5월 16일 법률 제83호), 1964년에는 몸의 대금목적약취죄(몸값요구약취죄 및 그 예비죄, 제225조의 2)가 신설되는 등 약취 및 유인에 관한 죄(제33장)가 정비되었다(쇼와 39년 6월 30일 법률 제124호).

1968년에는 격증하는 교통사고에 대비하여 업무상과실치사상죄 및 중과실치사상죄의 법정형의 상한을 ‘3년 이하의 금고’에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로 가중하였고(제211조 제1항), 병합죄(경합범) 관계를 차단하는 확정판결을 금고 이상의 형에 처하는 것으로 한정(제45조)하였다(쇼와 43년 5월 21일 법률 제61호).

1980년에는 수뢰죄 및 알선수뢰죄의 법정형이 가중(제197조 및 제197조의2, 제197조의4, 제198조)되었고(쇼와 55년 4월 30일 법률 제30호), 1987년에는 컴퓨터범죄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자적 기록’의 정의를 규정하고(제7조의2), 전자적기록부정작출죄 및 공용죄(제161조의2) 및 전자계산기훼손등업무방해죄(제234조의2), 전자계산기사용사기죄(제246조의2)를 신설하였다. 또한 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죄(제181조 제1항) 등의 보호객체에 전자적 기록이 추가되었으며, 전후 경제 사정의 변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형법에서 정하는 벌금 및 과료의 액을 수정하고(제15조 및 제17조), 조약에 의한 국외범의 규정(제4조의2)을 신설하였다(쇼와 62년 6월 2일 법률 제52호).

1991년에는 각칙상의 죄에 대한 벌금을 가중하고 동시에 벌금등임시조치법에 의해 조정된 벌금을 1만 엔 이상으로(제15조), 과료를 천 엔 이상 1만 엔 미만(제17조)으로 형법이 직접 조정하였고(헤이세이 3년 4월 17일 법률 제31호), 1995년에는 주로 한자 및 가타카나(カタカナ)가 혼합된 문어체를 히라가나(ひらがな) 구어체로 고치고, 음아자(瘖瘂者, 농아자)에 대한 감경규정을 삭제하였으며(제40조), 최고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따라[각주:1] 존속살인 및 존속상해치사(제200조 및 제205조 제2항)을 삭제하였다(헤이세이 7년 5월 12일 법률 제91호).

2001년에는 지불용 카드 전자적 기록에 관한 죄(제18장의2 제163조의2 내지 제163조의5)가 신설되었으며(헤이세이 13년 7월 4일 법률 제97조), 위험운전치사상죄의 규정(제208조의2)이 신설되었고(헤이세이 13년 12월 5일 법률 제138호), 보건부조산부간호부법의 개정에 따라 「간호부」라는 용어를 「간호사」로 변경하였다(헤이세이 13년 12월 12일 법률 제153호).

2003년에는 국민 이외의 자의 국외범의 규정(제2조의2), 소위 소극적 속인주의 규정이 신설되었고(헤이세이 15년 7월 18일 법률 제122호), 같은 해에 공포된 중재법에서 중재인에 관한 증·수뢰죄 규정을 두고 있으므로 형법의 관련 규정에서 중재인을 삭제하였다(제197조, 제197조의2 및 제197조의3, 헤이세이 15년 8월 1일 법률 제138호).

2004년에는 법정형의 큰 개정이 있었는데, 총칙에서 ① 유기징역·금고의 법정형 상한을 1월 이상 20년 이하로 하였고(제12조 제1항 및 제13조 제1항), ②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나 금고를 감경하여 유기징역이나 금고로 하는 경우 그 장기를 30년으로 하였으며(제14조 제1항), ③ 유기징역 및 금고를 가중하는 경우 그 형을 30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14조 제2항). 또한 각칙상으로는 ① 강제외설죄(제176조) 및 준강제외설(제178조 제1항), 강간(제177조), 준강제외설 및 준강간(178조), 강간치사상(제181조 제2항), 살인(제199조), 상해(제204조), 상해치사(제205조), 위험운전치상(제208조의2 제1항) 등의 죄의 법정형을 가중하였고, ② 집단강간죄(제178조의2), 집단강간등치사상죄(제181조 제2항 및 제3항)를 신설하였고, ③ 강도치상죄(제240조)의 법정형을 감경하였다(헤이세이 16년 12월 8일, 법률 제156호).

2005년에는 형사시설및수형자의처우등에관한법률 제정과 함께 일부 규정을 개정하였고(헤이세이 17년 5월 25일 법률 제50호), 인신매매죄(제226조의2)를 신설하였다(헤이세이 17년 6월 22일 법률 제66호).

2006년에는 공무집행방해죄 및 절도죄의 선택형으로 벌금형을 추가하고, 업무상과실치상죄의 벌금형의 상한액을 가중하고, 노역장유치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였다(헤이세이 18년 5월 8일 법률 제36호).

2007년에는 자동차운전에 의한 사상사고의 실정 등을 감안하여 그 실정에 맞는 적정한 과형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동차의 운전상 필요한 주의의무를 게을리하여 사람을 사상에 이르게 한 자에 대하여 자동차운전과실치사상죄(제211조 제2항)을 신설하여 종래의 업무상 치사상죄보다 벌칙을 강화하고, 그 자동차의 범위를 종래의 「4륜 이상 자동차」에서 「자동차」로 하여 2륜차도 포함되도록 하였다(제208조의2, 헤이세이 19년 5월 23일 법률 제54호).

현행 형법이 시행된 뒤 1930년대를 전후하여 관료국가주의와 시민사회방위주의를 반영한 「개정형법가안」이 공표되는 등 전면개정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직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실제로 개정되지는 못했다.

종전 이후 신헌법의 정신을 반영한 형법 개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고도성장과 사회의 변화, 그리고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나 공모공동정범 등 현행 형법이 상정하지 않은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에 정부는 형법의 전면개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 5월 29일, 법제심의회총회가 전369조의 「개정형법초안」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 특징으로는 ① 죄형법정주의를 모두(冒頭)에 명시하고, 총칙에서 부작위에 의한 작위범,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 불능범, 간접정범, 공모공동정범 등을 규정하여 이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전체적으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용어를 사용하여 죄형법정주의의 요청에 부합하려고 한 점, ② 위법성의 인식을 결한 것에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않기로 하며, 결과적 가중범의 처벌에는 결과 발생의 예견 가능성을 요하며, 형은 범죄자의 책임에 따라 양정(量定)하여야 한다는 등 책임주의의 반영, ③ 징역 및 금고의 하한을 3월, 구류의 상한을 90일(병과시에는 120일)로 하고, 자유형의 집행에 관한 기본원칙 및 형의 적용에 관한 일반기준을 표시하며, 상습누범에 상대적 부정기형을 규정하고, 보안처분으로 치료처분 및 금절처분(禁絶處分)을 규정하는 등 형사정책상의 새로운 조치를 고려한 점, ④ 사전(私戰), 집단반항, 소동예비, 피보호자의 간음, 기업비밀의 누설, 자동차등의 불법사용, 자동설비의 부정이용, 무임승차, 준공갈 등 현행 형법에 없는 범죄를 신설한 점, ⑤ 존속살인 및 존속상해치사, 존속유기, 존속체포감금죄 등을 삭제하여 새로운 사회적 요청에 따라 범죄유형의 정비를 꾀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초안에 대하여 재야법조, 정신의학자 등을 비롯하여 각 방면에서 ‘범죄가 되는 행위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거나 ‘국가주의적’이라는 등 여러가지 비판이 쏟아졌고, 현재까지 이 입법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오츠카 히토시(大塚仁), 『형법개설 총론 [제3판 보정판]』(刑法概説 総論), 유히카쿠, 2005년.
  • 다테이시 니로쿠(立石二六), 『형법총론 [제2판]』(刑法総論), 세이분샤(成文社),2006년.
  1. 최대판<FONT color=#8e8e8e>(最大判: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FONT> 쇼와 45년 <FONT color=#8e8e8e>(あ)</FONT> 제1310호·형집 27권 3호 165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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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법(元号法)
쇼와(昭和) 54년(1979년) 6월 12일 법률 제43호


1 원호는 정령(政令)으로 정한다.
2 원호는 황위(皇位)의 계승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고친다.

부칙
1 이 법률은 공포일부터 시행한다.
2 쇼와(昭和)의 원호는 본칙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정하여진 것으로 본다.


원호를 고치는 정령(元号を改める政令)
쇼와 64년(1989년) 1월 7일 정령 제1호


내각은 원호법(쇼와 54년 법률 제43호)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이 정령을 제정한다.

원호를 헤이세이(平成)로 고친다.

부칙
이 정령은 공포한 날의 익일(翌日)부터 시행한다.


원호 사용의 법적 근거가 되는 원호법이다. 원호사용이 의무는 아니고, 사용하지 않는 때에 적용되는 벌칙규정 등은 없다. 원호법 제정 당시 국회 심의에서도 "원호법은 그 사용을 국민에게 의무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부 답변도 있었고, 제정 이후에도 원호 사용을 강제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행정조직 내의 지시가 있었다.[각주:1]

국가나 지방공공단체의 공문서에서는 일반적으로 원호를 사용하고 있다(황기(皇紀)는 사용하지 않음.). 다만 특허청이 발행하는 공개특허공보(公開特許公報)는 「헤이세이(平成) 20년 (2008년)」과 같이 원호 뒤에 서기를 병기하고 있다. 또한 여권의 경우 국외에서의 사용이 목적이므로, 예외적으로 생년이 서력으로 기재되어 있다.

원호와 관련하여 도난된 예금통장을 가지고 위조한 보험증으로 본인확인을 한 후에 은행에서 돈을 인출한 과실에 대하여 은행에 배상을 청구한 민사소송에서 원호 문제로 은행이 패소한 사건이 있었다. 위조한 보험증에는 생년월일이 "쇼와 원년 6월 1일"로 기재되었으나, 쇼와 원년은 1926년 12월 25일부터 31일까지밖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원년 6월 1일은 존재하지 않는 날짜임을 은행측이 알아차리지 못한 과실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원호제는 1868년(메이지 원년)에 개원조서(改元詔書)에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1912년의 다이쇼(大正)로의 개정부터 실시되었다.[각주:2] 그러던 것이 명문의 법적 근거였던 구 황실전범 제12조가 일본국헌법의 시행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이후에도 국회나 정부, 재판소의 공적 문서 등에서는 관례적으로 연호가 사용되었다. 쇼와 천황의 고령화로 인해 황위 계승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일본인의 87.5%가 원호를 사용하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여[각주:3], 1979년 6월 6일에 국회에서 원호법이 제정되었고, 12일에 공포 및 시행되면서 황위의 계승시에 한하여 정령으로 원호를 개정하게 되었다.

원호 「쇼와」(昭和)는 원호법 제1항의 규정에 따라 정하여진 것으로 보며(부칙 제2항), 원호 「헤이세이」(平成)는 원호를 고치는 정령(元号を改める政令, 쇼와 64년 정령 제1호, 1989년 1월 7일 공포 및 시행)에 따라 정하여졌다.
  1. 공문서의 서식에서는 생년 등을 기재할 때에 서력을 선택하거나 기재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므로, 사실상 서력이 금지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본문으로]
  2. 우에다 마사카즈<FONT color=#8e8e8e>(上田正一)</FONT>, 『일본국헌법』<FONT color=#8e8e8e>(日本国憲法)</FONT>, 사가노쇼인<FONT color=#8e8e8e>(嵯峨野書院)</FONT>, 2008년, 27쪽. [본문으로]
  3. http://www.ntv.co.jp/omo-tv/old/02/0606/0606.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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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법사 소고(日本憲法史 小考)



Ⅰ. 메이지(明治) 헌법


1. 총설

 (1) 봉건제도의 해체

  1) 막부정치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모든 정치권력을 쥐고 260년 동안 봉건적·쇄국적 체제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구미(歐美) 자본주의국가의 개국 요구나 강해진 도막운동(倒幕運動), 그리고 경제체제의 모순 등의 격증에 의하여 급속하게 권위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막부는 게이오(慶応) 3년(1867년) 10월 14일을 기하여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즉 정권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朝廷)에 다시 돌렸고, 이후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대호령(大号令)을 발하여 이에 천황 친정(親政)의 체제가 부활하였다.

  2) 번제(藩制)의 폐지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는 우선 번(藩, 당시 263개 이상의 번이 있었다.)을 폐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메이지(明治) 2년(1869년)에는 드디어 「판적봉환」(版籍奉還), 즉 번의 영지와 그 주민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되 그 관리의 담당은 번의 주인이던 다이묘(大名)들이 지번사(知藩事) 혹은 번지사(藩知事)의 형태로 맡게 되었으며, 이어 메이지 4년(1871년)에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게 되었다.

  3) 신분제도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신분은 공경(公卿)·제후(諸侯)·사(士)·농(農)·공(工)·상(商) 등의 계급이 나누어져, 각각의 신분에 의하여 엄격한 차별을 받는 원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신분제도를 폐지하는데 착수하였으나, 개혁은 불완전한 채로 끝났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이른바 화족(華族, 공경이나 제후가 변한 것)·사족(士族, 신하)·평민(농·공·상·민)의 3종의 신분을 새로이 만들었다. 결국 「사민평등」의 사상은 그림의 떡처럼 변했고, 역으로 인종적인 편견이나 부라쿠(部落) 차별 등의 차별을 오늘날까지 남기는 원인이 되었다.

 (2) 근대 민족국가로의 움직임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움직임을 내딛은 것은 1860년대에서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정치사상이나 헌법제도등의 많은 움직임이 있던 시기이다.

  1) 「공의사상」(公議思想)
  「공의사상」(公議思想)은 막부에서 메이지 유신에 걸쳐 일본의 지식층에서 탄생한 정치사상으로, 그 목적은 도쿠가와 막부의 군사적 독재정치에 저항하여 정치의 무대에 공경이나 제후 및 무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상을 명시하게 된 것이 게이오 4년(1868년)의 「5개조의 어서문(五ヶ条の御誓文)이다.

  2) 민선의회(民選議會)의 설치
  민선의회 설치의 움직임은 문명개화의 소리가 급속하게 높아지던 근대 유럽의 사상과 제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庶民)의 정치적 자각이 높아지면서 나타났다. 정한론(征韓論)에서 진 소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이 사쓰마(薩摩)의 번벌(藩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의 전제에 대항하여 1874년에 「민선의회설립의 건백서」(民選議会成立の建白書)를 정부에 주장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3)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와 흠정헌법(欽定憲法)
  민선의회를 개설하여 헌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정부 내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로 대표되며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급진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대표되며 프러시아의 군주주의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점진론」이 그것이다. 두 주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어전회의」(御前会議)에서 점진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자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면직되었다(이른바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다.). 그리고 메이지 14년(1881년) 10월 12일에 칙유(勅諭)가 내려졌고, 정부가 이를 받아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며 천황이 헌법을 제정하는 것 등을 발표하였다.

  4) 메이지 헌법의 제정과 공포
  메이지 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태도를 굳히고, 이토 히로부미를 각국의 헌법조사를 위하여 유렵으로 파견한다. 그는 주로 독일계의 헌법이론을 배우고, 군권(君權) 중심의 입헌제를 지지할 의지를 굳혀 귀국한다. 메이지 헌법 제정을 위한 구체적 작업은 1886년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와 함께 헌법과 관계법령안을 준비하여 1889년에 안이 완성되어 주상(奏上)하였다.
  이 안은 추밀원(枢密院)에서 심의하여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에 천황이 「대일본제국헌법」(이른바 메이지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는 일본의 첫 성문헌법이다. 그리고 1890년 7월에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어 제1회 제국의회(帝国議会)가 개설되었고, 메이지 헌법도 그 날부터 시행되었다.


2. 메이지 헌법의 성격

 (1) 개설(槪說)

  메이지 정부는 한편으로는 선진 여러 국가의 입헌주의 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적인 권력구조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서로 모순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메이지 헌법은 그러한 상황에서 제정된 헌법이므로, 그 성격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리, 그리고 군주주의의 원리의 타협의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제적인 성격이 강한 헌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적인 원리와 제도

  1) 의회제도
  법률이나 예산의 성립에 대하여 의회의 관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의회주의제도의 성격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①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원 행사를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은 점, ② 정당이나 군부, 관료의 힘을 억제할 수 없었던 점, ③ 천황은 많은 명령을 단독으로 발하는 것이 인정된 점 등은 불완전한 의회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대신(大臣)의 조언
  천황의 국무상의 행위에는 모든 대신의 보필(輔弼)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군통수권(軍統帥權)과 황실에 관한 사무 등은 대신의 조언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충분한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3) 신민(臣民)의 권리보장
  메이지 헌법도 근대입헌국가와 같이 「신민권리의무」(臣民權利義務)라는 표제로 일련의 자유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와 자유는 천황이 신민에 대하여 은혜적으로 준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연법사상에서 생긴 인권의 관념은 아니었다. 또한 그 보장에 있어서도 행정권이 아닌 입법에 의한 제약에는 어떠한 보장수단이 없었으므로, 「법률의 범위 내」에서의 보장에 지나지 않았다.

  4) 권력분립
  메이지 헌법도 「권력분립」(權力分立)을 위하여 국가권력을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으로 나누고, 제국의회와 재판소(裁判所)·내각(內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천황이 입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국무대신은 천황이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보필하는 지위」였으며, 재판소 또한 「천황의 이름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었던 등 모두 천황대권을 보좌하는 기관으로서의 분립제에 지나지 않았다.

  5) 사법권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사법권 독립의 원칙」을 취하여 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재판관의 신분보장을 두었다. 단 행정사건에 대하여는 별도의 행정재판소의 설치를 인정하고, 군인·화족 등 특별한 신분이나 사건에 대하여는 특별재판소의 설치도 허용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법권의 독립은 메이지 헌법 하의 민주적 여러 제도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실현을 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3) 반민주적인 원칙과 제도

  1) 천황주권(天皇主權)
  메이지 헌법은 「천황주권」을 근본원칙으로 하여 특이한 천황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정치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천황이라고 하는 천황주권의 근거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칙(神勅)」에 바탕한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처럼 무궁함)」에 있다는 설이다. 또한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감히 범하여서는 아니되는 이른바 천황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2) 대권중심주의(大權中心主義)
  메이지 헌법에 있어서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하는 것에 의하여 최고의 권위자로서 군림하였다.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總攬)한다」는 것은 입법권과 행정권 및 사법권 등의 권력이 결국에는 천황에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천황대권은 범위가 넓고, 특히 의회가 관여할 수 없는 천황의 권능이 크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은 천황제 관료에 의한 행정권 우위의 제도, 즉 「약한 의회에 대하여, 강한 정부」라고 하는 체제를 명실히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통수권(統帥權)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천황이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정하고, 이른바 「통수권의 독립」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용은 참모총장(參謀總長, 육군)과 군령부총장(軍令部總長, 해군) 등의 기관이 조언하여 정부 및 의회에서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별도의 계통의 권한이었다.

  4) 황실자율주의(皇室自律主義)
  천황제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황실에 관한 것은 황실 스스로가 정하도록 하는, 이른바 「황실자율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실시하기 위하여 황실전범(皇室典範)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여 메이지 헌법과 함께 최고의 위치에 두고, 양자의 사이에는 효력상의 우열이 없도록 하였다.


3. 메이지 헌법의 운용(運用)

 (1) 개설(槪說)

  메이지 헌법은 근대입헌주의와 절대주의라는 상반된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실제 정치에서 운용되는 것 또한 여러 가지로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서는 메이지 헌법사를 4가지의 시대로 나누고,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제1기 : 헌법시행(1890년, 메이지 23년)부터 청일전쟁(1894~189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메이지 헌법을 성립시킨 번벌정부(藩閥政府)와 의회가 헌법상의 권능을 근거로하여 격돌한 때이다. 정부는 「천황의 정부」로 어떠한 정당정치에서도 초연(初演)한, 의회에서 컨트롤 할 수 없는 이른바 「초연주의」(超然主義)의 방침이 취해졌다.

 (3) 제2기 : 청일전쟁 이후부터 1912년(메이지 4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정부가 정당과 제휴하는 방침을 취하여 정당도 또한 관료(官僚)·군벌(軍閥)에 앞서, 의회의 의 권한이 높아진 때이다. 정당의 근대화를 외치는 가운데 민주적인 원칙을 추진하자고 하는 움직임은 정당내각의 발전을 가져온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촉진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노동운동도 발전하게 되어 파업 등도 발생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곧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을 제정하여 탄압을 꾀하게 되었다.

 (4) 제3기 : 1912년(다이쇼 원년)부터 쇼와 초기 무렵까지

  이 시기는 자유주의적 세력이 차츰 세력을 넓히고, 정당의 비중이 다소 높아진 이른바 「정당내각」에 의한 정치가 행해진 때였다. 특히 2번에 걸친 「호헌운동」(護憲運動)은 정당내각 확립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성과로서 이른바 「헌정(憲政)의 상도(常道)[각주:1]가 헌법관습으로 인정되고, 정당내각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내각도 재벌(財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군벌관료와 손을 잡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등을 제정하기에 이르러 이 시기의 민주정치의 성격도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5) 제4기 : 쇼와 초기부터 1945년(쇼와 20년)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는 입헌주의의 기능이 절반은 정지한 때이다. 정치는 좌익운동을 강압적으로 끊으려는 방침을 취하고, 우익운동에 대하여는 영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로 인하여 우익은 군벌과 결탁하여 힘을 가지고 약한 의회를 더욱 후퇴시켰으며, 결국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5·15 사건」(1932년)[각주:2]이나 「2·26 사건」(1936년)[각주:3]의 발생과 함께 중일전쟁(1937년)의 격발이라는 어두운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군벌 및 관료의 독재는 「국가총동원법」을 낳았고, 이에 의회의 법률의결권은 실질적인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1940년(쇼와 15년)에는 각 정당이 어쩔 수 없이 해산되었고, 새로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大政翼賛会, 다이세이요쿠산카이)가 결성되는 등 일본의 정당정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부활하지 못했다.



Ⅱ. 일본국헌법의 제정


1. 총설

 (1) 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점령체제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포츠담 선언의 수락은 메이지 헌법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즉 그때부터 일본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바탕으로 위임된 것이 되는, 「간접통치」의 방식이 되었다.[각주:4] 그리고 이러한 점령체제는 「대일평화조약」(對日平和條約)[각주:5]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포츠담 선언은 13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헌법제정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규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우선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을 강화하는 한편 언론과 종교 및 사상과 같은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확립하는 것(제10항), 즉 신격천황제(神格天皇制)를 부정하고,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함과 함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적·평화적인 정치조직을 확립하는 것(제12항), 즉 의회제도와 선거제도의 개혁, 정당의 편성, 지방제도의 개혁 등을 행하는 것이다.

 (2) 헌법개정의 경과

  1) 마쓰모토(松本) 위원회의 조사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시데하라(幣原) 총리가 총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메이지 헌법의 민주화를 포함한 일본의 전통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성을 시사(示唆)하였다. 그에 이어 정부는 마쓰모토 국무대신을 주임으로 하는 「헌법문제조사위원회」(1945년(쇼와 20년) 10월 25일)를 설치하였다. 위원회는 이른바 「마쓰모토 4원칙」을 바탕으로 개정작업을 시작했으며, 다음 해 2월 8일에 총사령부에 제출하였다(이른바 「마쓰모토 안」).

  2) 맥아더 초안의 제시
  그런데 1946년 2월 1일에 마쓰모토 안이 마이니치 신문에 의하여 공개되었고, 총사령부도 이를 알게 되었다. 이를 안 맥아더는 그러한 보수적 감상의 정부에게는 민주적 헌법의 제정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마쓰모토 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방침을 굳혀 총사령부에서 독자적인 헌법초안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맥아더는 총사령부에 대하여 세가지 원칙[각주:6]과 이른바 SWNCC-228[각주:7]을 지침으로 하여 극비리에 작업을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총사령부는 곧 헌법초안을 완성하였고, 2월 13일에 일본정부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헌법초안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작성된 것도 놀랍지만, 당시의 정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혁명적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총사령부의 강한 의향과 국제적·국내적 여러 사정을 고려한 뒤 결국 초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 제국의회의 심의·공포·시행
  정부는 이 초안을 기본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3월 6일에 「헌법개정초안요강」으로 대중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그 초안은 중의원 총선거(4월 10일) 뒤에 열린 제90제국의회(6월 20일)에서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상정되었다. 중의원 및 귀족원은 그 초안을 수정가결하였고, 10월 29일에 추밀원에서 가결된 초안은 천황의 재가를 거쳐 1946년(쇼와 21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으로 공포되어 다음 해 5월 3일[각주:8]에 시행되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法理)

 (1) 개설(槪說)

  일본국헌법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바탕으로 점령통치하에서 총사령부가 원안을 작성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뒤에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를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의 군주주권원리에서 일본국헌법의 국민주권원리로의 이행은 헌법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

  1) 헌법개정무한계설
  헌법개정에는 내용상의 한계는 없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면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천황의 칙명으로 개정안이 발의되어 제국의회의 의결 및 천황의 재가를 거쳐 공포된 형식으로 성립된 것이다. 즉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므로 흠정헌법(欽定憲法)이며, 법적 연통성(連通性)을 가진다."는 것이다.[각주:9]

  2) 헌법개정한계설
  헌법개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견해에서는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의 「8월 혁명설」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통설). 그 근거로 ①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며, "일본의 최종(最終)의 정치형태"는 "일본국민의 자유에서 표명된 의사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메이지 헌법의 근본 바탕인 신권주권(神權主權, 천황주권)을 변경한 것, ② 더욱이 천황주권을 국민주권으로 전환한 것은 일본 정부도 또한 천황의 의사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등에서 그 변혁은 헌법적으로는 「혁명」이라고 한다.[각주:10]


참고문헌
  • 우에다 마사카즈(上田正一),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 사가노쇼인(嵯峨野書院), 2008년.
  1. 「헌정<FONT color=#8e8e8e>(憲政)</FONT>의 상도<FONT color=#8e8e8e>(常道)</FONT>」란 정부에 대하여 중의원의 다수당이 지배권을 갖는 정당내각제를 말한다. [본문으로]
  2. 「5·15 사건」이란 해군청년장교 일부가 수상관저를 급습하여 당시 호헌운동의 우두머리로 불리던 이누카이<FONT color=#8e8e8e>(犬養, 당시 78세) </FONT>총리를 살해하였다. 전전<FONT color=#8e8e8e>(戰前)</FONT>의 정당내각시대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으로, 국가를 전쟁의 늪에 깊이 빠뜨리는 기로로 몰고간 결정적인 요인이다. [본문으로]
  3. 「2·26 사건」이란 황도파<FONT color=#8e8e8e>(皇道派)</FONT> 청년장교가 1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쇼와 유신<FONT color=#8e8e8e>(昭和維新)</FONT>의 단행·존황토간<FONT color=#8e8e8e>(尊皇討奸 :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FONT> 등의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정부 요인을 살해하고 나가타초<FONT color=#8e8e8e>(永田町)</FONT> 일대를 점거한 사건이다. 이후 천황의 토벌명령과 함께 계엄령이 내려졌고, 진압되었다. [본문으로]
  4. 「간접통치」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원칙적으로는 일본정부를 통하여 행사하고, 때로는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5. 「대일평화조약」이란 일본과 49개 연합국이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소련과 인도는 불참하였다. [본문으로]
  6. ① 천황제를 개혁하는 것, ② 전쟁의 방기<FONT color=#8e8e8e>(放棄)</FONT> 및 군비의 불보지<FONT color=#8e8e8e>(不保持)</FONT>, 교전권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③ 봉건제를 폐지하는 세가지 원칙을 말한다. [본문으로]
  7. SWNCC는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FONT color=#8e8e8e>(국무-육군-해군 삼성 조정위원회)</FONT>의 약칭으로, SWNCC-228은 삼성 조정위원회 문서 228호 「일본 통치제도의 개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FONT color=#8e8e8e>(国民の祝日に関する法律)</FONT> 제2조는 이 날을 「헌법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사사키 소이치<FONT color=#8e8e8e>(佐々木惣一)</FONT>, 『일본국헌법론』<FONT color=#8e8e8e>(日本国憲法論)</FONT>, 유히카쿠, 1952년. [본문으로]
  10. 미야자와 도시요시, 『일본국헌법 <FONT color=#8e8e8e>(코멘타르 별책부록)</FONT>』, 315쪽, 닛폰효론샤, 1955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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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고지(佐藤幸治, 1937년 6월 9일 ~ )는 일본의 헌법학자로, 교토대학 명예교수이다. 1990년에 교토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학위논문은 「현대국가와 사법권」이다. 니가타 현 니가타 시 출신으로, 지도교수는 오오이시 요시오(大石義雄)다.

니가타 현립 니가타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대학 법학부에 입학. 1961년에 졸업한 후에 스이토모 은행(住友銀行)에 입사한다. 1년후에 퇴사한 후 다시 학문의 길을 선택해 교토대학 조수, 조교수를 거쳐 1975년부터 교토대학 교수를 지냈다. 2001년에 긴키대학(近畿大学) 법학부 교수를 거쳐 2004년부터 긴키 대학 법과대학원 교수로 있다. 교토대학에 이름이 같은 교수가 있으나, 심리학자다.

사토가 지은 책 『헌법』(憲法)은 사법시험의 바이블적인 존재였다. 사토는 사법시험위원을 지냈고, 헌법소송에 대한 명확한 기술과 내용적으로 이전의 교토대학계열의 책에 비해 도쿄대학과의 차이가 적어 기존의 기본서에서 갈아타기 쉬웠던 점이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와나미쇼텐에서 아시베 노부요시가 지은 헌법이 나오면서 사법시험의 바이블적 존재에서는 벗어났지만, 이후에도 외교관시험(외무공무원채용 1종시험. 2002년에 폐지)의 바이블로 여겨졌다.

사토 학설의 특징은 이하에 기술한 겻처럼 결론에 있어서 아시베로 대표되는 통설적 견해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그 결론으로 가는 이론적 구성이 독자적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

사토는 통설이 역사를 헌법이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기피하고, 지성만이 절대적이라고 하면서[각주:1] 실제로 살아있는 인간의 의식과 현실의 일상생활을 기초로 하는 개인주의적·현상학적·실존주의적인 입장에 서서[각주:2] 후술하는 도덕원리에 의하여 처음으로 인권의 근거의 기초를 확고히 할 수 있다고 하여 전체적으로 관념론적·법실증주의적 이론을 전개한다. 이로 인하여 내용이 마치 관념론적인 양상을 나타내면서 사토의 이론에 대하여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은 원인이 특유한 체계적 구성 또는 표현방법의 영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각주:3].

인권에 대하여는 인격적 자율의 존재로서 자기를 주장하여 그러한 존재로 계속하는 동시에 불가결한 도덕적 권리라고 하여 통설적 견해인 인격적 이익설을 취하고 있으나[각주:4], 그 근거에 관하여는 독자적인 견해를 주장하여 Alan Gewirth의 변증법적으로 필연적인 접근에 의거하여 도덕적인 권리인 인권을 정치적·법적 질서가 보호하는 것이 유형적 정합성이라고 하는 최고의 도덕적 원리에 의하여 정당화된다고 한다[각주:5]. 그러한 사상은 초실체법적 성질을 가지고 자연권론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자연권사상이라고 한다[각주:6].

일본국헌법의 성립 및 정통성에 대하여는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8월 혁명설도, 사사키 소이치가 주장하는 강압에 의한 제정론도 법을 넘어선 실력이 전제가 되는 것으로 모두 부정하고 있다[각주:7]. 사토에 따르면 이러한 실력을 이론으로 가져와 헌법을 법의 세계에서 추방하고, 정치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각주:8].

국민주권에 대하여는 아시베가 헌법을 제정하고 지탱하는 권위가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 「정당화의 계기」와 국민이 대표자를 통하여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권력적 계기」라고 하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으며, 국회의원의 소환제도는 헌법상 금지되어 있으나, 「권력적 계기」에 의하여 통치제도의 민주화의 요청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을 결론에 있어서는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토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기피하고, 「정당성의 계기」를 「정당성의 원리」로, 「권력적 계기」를 「실정헌법상의 구성원리」(통치제도의 민주화, 공개토론의 장의 확보의 요청)라고 해석하고 있다.[각주:9] 「실정헌법상의 구성원리」의 근거는 앞의 Alan Gewirth가 인권을 정치적·법적 질서가 보호하는 것이 정당화되어 (현재의 행위주체만이 아니라) 장래의 행위주체의 존엄과 이성적 자율을 위하여는 각 행위주체가 시민적 자유를 갖는 것이 요구되는 것과 평행하고 있다고 한다[각주:10].

국회가 「최고기관」이라고 하는 것의 의의에 대하여는 단순히 정치적 미칭으로 해석하여서는 안되며, 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비판하며 통괄기관설을 취하여 권한불명의 권능은 국회에 소속한다고 추정된다고 한다[각주:11]. 그러나 정치적 미칭설도 국회가 「전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것에서 권한불명의 권능은 국회에 소속한다고 추정된다고 하므로 양설의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다.

행정권의 의의에 대하여는 행정공제설(行政控除說)을 행정권의 내용·특질이 불명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다나카 지로(田中二郎)에 의한 적극적 정의에도 난점이 있다고 하며, 행정공제설의 소극적 정의를 전제로 하면서도 법원리기관으로서 사후적·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재판소와도, 회기제를 취하는 국회와도 다른 국가의 종합적인 정책에서 배려하는 기관이라는 점에 특질이 있다고 한다[각주:12]. 또한 의원내각제의 본질에 대하여는 아시베가 영국의 역사를 이유로 책임본질을 지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당시의 영국에 있어서 양대 정당제와 엄격한 당의(黨議) 구속이 배경으로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의원내각제가 권력분립의 일환인 이상 균형본질설이 타당하다고 한다[각주:13].

재판소에 대하여는 의회나 내각과 같은 능동적·적극적인 활동이 기대되는 「정치부문」과는 달리, 법에 의한 통치의 실현이 기대되는 수동적인 「법원리기관」이라고 한다. 위헌심사제에 대하여는 판례나 통설은 사법권의 개념은 역사적인 것으로서 이론적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명문의 규정으로 「사건성」을 요건으로 하는 미국의 헌법에 근거한 사법권의 개념을 일본국헌법이 계수(繼受)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일본국헌법 76조 1항이 정하는 「사법권」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성을 요건으로 하며, 구체적인 분쟁을 전제로 하지 않고 법령의 합헌성을 판단하는 재판권을 행사하는 추상적 심사제는 법개정에 의하여 채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토는 판례나 통설이 이야기하는 결론에는 찬성하면서도, 이러한 역사에 따른 설명은 불충분하다고 비판하며 「사법권」의 개념은 구체적인 사건을 전제로 당사자에 의하여 소송이 제기된 것을 계기로 공평한 재판소가 당사자의 주장 및 입증에 근거하여 법을 적용하여 결정하는 법원리적인 과정을 가지는 점에 본질이 있고, 사건성의 요건은 재판소가 법원리기관이라고 하는 것에서 도출되는 이론적인 요청이라고 한다.[각주:14]


사토와 법과대학원(로스쿨) 제도의 도입

사토는 헌법이라고 하는 학문의 성질상 다양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연구자 또는 인간으로서 공격받는 것을 각오하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지만[각주:15], 그 가운데에서도 많은 비판을 감수하면서 다카하시 히로시(高橋宏志)와 함께 법조양성과정에 「법과대학원」(일본판 로스쿨) 제도 도입을 추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법과대학원 제도 도입의 근본에 사법시험 수험생의 「예비교[각주:16] 통과」라는 비판을 두고 그 선봉에 서면서 “(예비교가) 실제로 어떠한 실정에 있는가 하는 것은 저는 상세하지는 않으나 저와 관계된 학생이나 여러 가지 것을 통하여 어떠한 교육이 되는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저 개인으로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사토는 당시 회장을 맡고 있던 사법제도개혁심의회의 답신에 있어서 대학과 수험예비교(법과대학원을 말한다.)의 더블스쿨화가 법조(法曹)의 자질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하였으나, 이 답신에 대하여 국회법무위원회에 있던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사토는 1번의 시험으로 결론을 짓는 시험만능주의에는 한계가 있으며, 프로세스를 중시하는 교육을 하여야 한다고 답변했으나 에다노는 “사토 선생님과 같은 분이 질문에 정직하게 바로 답해주시지 않으므로 곤란한 것입니다.”라고 한 뒤 대학의 수업보다 예비교의 수업쪽이 수험기술뿐만 아니라 법학의 기본을 이해시키는 점에서 질이 좋다는 것부터 더블스쿨화가 나타난 「현실과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비교의 실태를 파악하지도 않고, 단순히 관념적으로 「있어야 할 이야기」에 근거하여 대학관계자만으로 법조양성제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때문에 답신은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이상한 것이 아닌가하고 반론하였다.[각주:17]


주요 저서로 『헌법』(세이린쇼인, 1981년), 『헌법소송과 사법권』(憲法訴訟と司法権, 닛폰효론샤(日本評論社), 1984년), 『현대국가와 사법권』(現代国家と司法権, 유히카쿠, 1988년), 『요설 코멘타르 일본국헌법』(要説コメンタール 日本国憲法, 산세이도(三省堂), 1991년), 『현대국가와 종교단체』(現代国家と宗教団体, 이와나미쇼텐, 1992년), 『국가와 인권』(国家と人間, 방송대학교육진흥회, 1997년), 『일본국헌법과 「법의 지배」』(日本国憲法と「法の支配」, 유히카쿠, 2002년), 『헌법과 그 “이야기”성』(憲法とその“物語”性, 유히카쿠, 2003년), 『현대국가와 인권』(現代国家と人権, 유히카쿠, 2008년) 등이 있으며, 문하생으로 마쓰이 시게노리(松井茂記, 오사카대학 대학원 고등사법연구과 교수), 이치카와 마사토(市川正人, 리쓰메이칸대학 법과대학원 법무연구과 교수) 등이 있다.
  1. 사토 고지, 『헌법』<FONT color=#8e8e8e>(憲法, 초판)</FONT>, 세이린쇼인<FONT color=#8e8e8e>(青林書院)</FONT>, 1981년, 머리말 2쪽. [본문으로]
  2. 전게서, 머리말 2쪽. [본문으로]
  3. 전게서, 머리말 1쪽. [본문으로]
  4. 전게서, 360쪽. [본문으로]
  5. 별책 쥬리스트<FONT color=#8e8e8e>(ジュリスト)</FONT> 『헌법과 헌법원리』<FONT color=#8e8e8e>(憲法と憲法原理)</FONT> 수록 「인권의 관념」<FONT color=#8e8e8e>(人権の観念)</FONT>, 유히카쿠<FONT color=#8e8e8e>(有斐閣)</FONT>, 145~157쪽. [본문으로]
  6. 사토 고지, 『헌법』<FONT color=#8e8e8e>(憲法, 초판)</FONT>, 세이린쇼인<FONT color=#8e8e8e>(青林書院)</FONT>, 1981년, 37~39쪽 및 358쪽. [본문으로]
  7. 전게서, 71 ~ 74쪽. [본문으로]
  8. 전게서, 90쪽 및 91쪽. [본문으로]
  9. 전게서, 94 ~ 96쪽. [본문으로]
  10. 별책 쥬리스트<FONT color=#8e8e8e>(ジュリスト)</FONT> 『헌법과 헌법원리』<FONT color=#8e8e8e>(憲法と憲法原理)</FONT> 수록 「인권의 관념」<FONT color=#8e8e8e>(人権の観念)</FONT>, 유히카쿠<FONT color=#8e8e8e>(有斐閣)</FONT>, 145 ~ 157쪽. [본문으로]
  11. 사토 고지, 『헌법』<FONT color=#8e8e8e>(憲法, 초판)</FONT>, 세이린쇼인<FONT color=#8e8e8e>(青林書院)</FONT>, 1981년, 129쪽. [본문으로]
  12. 전게서, 191쪽. [본문으로]
  13. 전게서, 189쪽. [본문으로]
  14. 전게서, 265~273쪽. [본문으로]
  15. 사토 고지·다나카 시게아키<FONT color=#8e8e8e>(田中成明)</FONT> 공저, 『현대법의 초점』<FONT color=#8e8e8e>(現代法の焦点)</FONT>, 유히카쿠 리브레, 1987년, 14쪽. [본문으로]
  16. 일본 법과대학원 제도 도입에서도 한국의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와 같이 법과대학원이 변호사시험 준비를 위한 통과기관으로 전락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본문으로]
  17. 2001년<FONT color=#8e8e8e>(헤이세이 13년)</FONT> 6월 20일의 <A href="http://www.shugiin.go.jp/itdb_kaigiroku.nsf/html/kaigiroku/000415120010620020.htm" target=_blank>제151회 국회 법무위원회에서의 답변</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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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베 노부요시(芦部信喜, 1923년 9월 17일 ~ 1999년 6월 12일)은 일본 나가노 현 고마가네(駒ヶ根) 시 출신의 헌법학자이다. 1990년에 일본학사원 회원이 되었고, 1993년에 문화공로자가 되었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공법학회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전국헌법연구회 대표와 국제인권법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저작 『헌법』(憲法, 이와나미쇼텐)은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생애

구제 이나중학교(伊那中学校, 현 나가노현 이나기타 고등학교(長野県伊那北高等学校))와 구제 마쓰모토고등학교(松本高等学校, 지금의 신슈대학 문리학부이다.)를 거쳐 1943년 10월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구 일본군 이등병과 소위 등을 거쳐 1946년에 복학, 1949년에 졸업했다. 1962년에 「헌법제정권력의 연구」(憲法制定権力の研究)로 법학박사(도쿄대) 학위를 취득했다.

1949년 도쿄대학 법학부 조수(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 아래에서 헌법을 전공), 1952년 동 대학 조교수를 거쳐 하버드 대학 로스쿨로 유학을 다녀온 뒤인 1963년에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1980년에 법학부장을 거쳐 1984년에 정년퇴임하여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84년에 가쿠슈인대학(学習院大学) 교수와 1994년에 방송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아사히신문사 지면심의회 회장으로 있었으며, 규슈대학, 나고야대학, 교토대학, 홋카이도대학의 대학원 등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법제심의회 위원, 종교법인심의회 회장, 전파감리심의회 회장 등도 역임했다.

나카소네(中曽根) 정권에서 야스쿠니 간담회의 멤버였으며, 당시에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합헌이라고 하여 야스쿠니 간담회의 다수의견에 대하여 소수의견을 표명했다.

1999년에 도쿄대학병원에서 간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75세.

아시베는 전전(戰前)의 통설적 견해이자 스승인 미야자와의 학설을 계승한 뒤, 미국의 헌법학과 판례를 선구적으로 도입하여 전후(戰後)의 헌법학계에서의 학설논의를 리드하고,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아시베의 헌법학론[각주:1]

아시베는 헌법학은 「대단히 범위가 넓은 학문」으로, 행정법이나 형법 등의 인접과목이나 역사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의 인접과학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헌법학 자체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① 헌법의 일반이론의 고찰이나 헌법의 정형적 비교를 시험하는 일반헌법학·비교헌법학(이른바 국법학)
 ② 개별국가의 헌법이나 헌법상의 특수한 제도를 대상으로 하는 개별헌법학·특수헌법학

그리고 개별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헌법학에서도 그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 가치판단을 포함한 실천적 작용인 헌법해석학
 ⓑ 헌법동태(실태)의 분석을 행하는 헌법사회학
 ⓒ 헌법이나 그 사상·이론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헌법사학(학설사, 이론사, 사상사 등을 포함)
 ⓓ 입법정책을 대상으로 하는 헌법정책학

그리고 위의 ⓐ부터 ⓓ까지의 방법도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헌법해석학)와 ⓑ·ⓒ·ⓓ와의 관계는 과학(인식)과 해석(실천)의 관계의 문제라고 한다. 아시베는 「법의 과학과 해석은 독립한 가치를 가지고 서로 다른 것에 종속하는 것은 아니다. 상호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미야자와의 이론을 따른 것이다.

객관적 인식의 작용인 「법의 과학」과 주관적 의욕의 작용인 「법의 해석」의 문제는 이른바 미야자와설(宮沢說)이라고도 불리는데,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는 「법의 해석을 행하는 것은 그 전제로서 현행법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나, 그를 인식하기 위하여는 과거의 실정법이나 외국의 실정법을 알 필요가 있으므로 현행법학·법사학·비교법학 등의 법의 과학이 당연히 요청되어, 해석자(실천인)는 법의과학의 추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법은 모두 종국적으로는 구체적·개별적으로 실현되는(적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법의 과학자는 반드시 법의 해석 또한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였다.

아시베도 「일응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헌법해석과 헌법과학이라는 두가지 방법이 있지만, 헌법해석은 항상 헌법과학을 항상 헌법과학을 무시하여 행하여 질 수는 없으며, 헌법과학도 과학이라는 틀에서 독립하지 않고 반드시 인간의 사회에 구체화되어 그 의미가 발휘되는 것이므로, 구체적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여 그에 맞추어 이른바 그를 규범의 테두리에 있다는 틀에서 해석이라는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헌법해석학이라는 것은 결코 헌법과학과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헌법해석학이 헌법사회학·헌법사학·헌법정책학과 밀접히 관계하고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한 「이 경우에 양자는 결코 각자 개별적으로 독립한 문제가 아니라 밀접히 관계가 있다고 한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교과서 등을 읽어가는 경우에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사실이란 것인지를 알고, 교과서에서 판례의 해설이 어느정도의 해석을 하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바는 해석이 과학인가와 같이 「이것이 유일절대의 바른 객관적인 규범의 의미」라고 이야기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아시베의 학설

먼저 헌법이 역사의 소산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시민혁명을 거쳐 발전해 온 근대헌법은 무엇보다도 “자유의 기초법”이라는 점에 특질이 있고, “개인의 존중원리”와 그에 기초한 체계를 근본규범으로 하는 가치질서라고 한다. 그러한 입장에서 헌법은 국법질서에 있어서 가장 강한 형식적 효력을 가지는 “최고법규”이며,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제한규범”이기도 하지만[각주:2], 근대헌법을 지탱하는 고전적인 입헌주의의 사상은 현대에 있어서는 사회국가·복지국가의 사상과 양립하여 민주주의와도 밀접하게 결합하는 등 변용하고 있다고 한다.[각주:3] 그리고 일본국헌법의 제정과정에는 역사상 다양한 정치적 요인이 개입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결국에는 국민 스스로 헌법제정권력을 발동하여 제정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미야자와의 “8월 혁명설”을 지지하여[각주:4], 그 결과 앞의 특질을 모두 갖춘 일본국헌법이 제정되었다고 본다.

다음으로 인권도 헌법과 같이 역사의 소산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일본국헌법의 제정과정이나 인권선언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일본국헌법은 메이지헌법 하의 외형적 인권선언과 달리 자유권뿐만 아니라 사회권도 함께 “인간의 존엄성의 원리”에 바탕하여 고유성·불가침성·보편성을 가진 자연권으로서 보장하고 있다고 한다[각주:5]. 인권을 “공공의 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에서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는 자유국가적 공공의 복지와 사회국가적 공공의 복지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내재적 제약설”을 취하여, 미야자와설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미야자와가 그 내용은 많은 부분 판례가 축적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하던 것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권리의 제약범위를 확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 뒤, 기본적 인권의 제약범위를 결정하는 “위헌심사기준”으로 미국에서 카로리누 판결에서 제창된 경제적 자유에 비하여 정신적 자유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이중의 기준설”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였다[각주:6]. 그리고 이중의 기준론의 근거로 대표민주제라는 통치시스템을 취하는 제도 하에서는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면 민주정의 과정에 있어서 의회에서 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중시하고, 통치기구와 인권을 이론적으로 가교하는 길을 열어 구체적인 소송에서 인권보장의 목적을 생각하는 “헌법소송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회는 전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에 의하여 조직된다”고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미야자와는 ‘대표’라는 것은 법적인 의미가 아니라 국회의 의사가 국민의 의사라고 간주된다고 하는 “정치학적 대표”를 의미한다고 하였으나, 아시베는 미야자와설을 기본적으로는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국회와 국민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덮으려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지고, 보다 민의를 반영하도록 하는 선거제도를 개정하는 운동을 방해하여 왔다고 비판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사회구조가 복잡화하고, 국민의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있는 역사에 비추어 보면, ‘대표’라는 것은 국회와 국민의 의사가 사실상 일치하거나 적어도 유사하여야 한다는 헌법상의 요청이 있다고 하는 “사회학적 대표”를 의미한다고 하고, 국민의 의사를 공평하고도 충실하게 국회에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제정하는 것이 헌법상의 요청이라고 한다[각주:7].

그리고 내각에 속하는 ‘행정권’의 의미에 대하여 국가작용의 분화의 역사에서 보면 모든 국가작용으로부터 입법작용과 사법작용을 제하고 남은 작용이라고 하는 ‘행정공제설’이 타당하다고 하고[각주:8], 의원내각제의 본질에 있어서도 그것이 영국 헌정사에 있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한 정치형태라고 하면서 의원내각제를 일본국헌법이 채용한 역사에 비추어보면, 의회와 정부가 일응 분열하여 정부가 의회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진다고 하는 점이 그 본질이며, 정부가 의회의 해산권을 가질 수는 없다는 “책임본질설”을 취한다[각주:9]

또한 재판소에 속하는 사법권의 개념 자체는 역사적인 것이며 이론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고 하며, 재판소의 판단인 판례(判例)에는 일정한 “법창조기능”이 인정되며, 일정한 정책형성기능도 갖는다고 한다[각주:10]. 아시베에 따르면 고전적인 입헌주의는 현대에서는 민주주의와 모순하지 않도록 변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헌심사제는 미국 역사상 헌법의 최고규범성을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확립된 제도로 인권보장의 수단이며, 또한 인권에는 대표민주제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있으므로, 재판소가 위헌심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주의원리와는 아무런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며, 현대에서는 재판소가 일정한 공공정책을 형성하는 것이 기대된다고 한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헌심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될 것도 있다고 한다.[각주:11]


주요 저서

『헌법과 의회정』(憲法と議会政, 도쿄대학출판회, 1971년)
『헌법소송의 이론』(憲法訴訟の理論, 유히카쿠, 1973년)
『현대인권론』(現代人権論, 유히카쿠, 1974년)
『헌법소송의 현대적 전개』(憲法訴訟の現代的展開, 유히카쿠, 1981년)
『헌법제정권력』(憲法制定権力, 도쿄대학출판회, 1983년)
『사법의 방향과 인권』(司法のあり方と人権, 도쿄대학출판회, 1983년)
『헌법의 논점 Ⅰ~Ⅲ』(憲法の焦点Ⅰ~Ⅲ, 유히카쿠리브레, 1984년~1985년)
『국가와 법 Ⅰ』(国家と法Ⅰ, 방송대학교육진흥회, 1985년)
『헌법판례를 읽다』(憲法判例を読む, 이와나미쇼텐, 1987년)
『헌법학 Ⅰ~Ⅲ』(憲法学Ⅰ~Ⅲ, 유히카쿠, 1992~1998년)
『헌법』(憲法, 이와나미쇼텐, 초판 1993년 - 신판 1997년 - 신판보정판 1999년 - 제3판 2002년 - 제4판 2007년)
『인권과 헌법소송』(人権と憲法訴訟, 유히카쿠, 1994년)
『인권과 의회정』(人権と議会政, 유히카쿠, 1996년)
『종교·인권·헌법학』(宗教·人権·憲法学, 유히카쿠, 1999년)
  1. 다카미 가쓰토시<FONT color=#8e8e8e>(高見勝利)</FONT>, 『아시베 헌법학을 읽다 - 통치기구론』<FONT color=#8e8e8e>(芦部憲法学を読む~統治機構論~)</FONT>, 유히카쿠, 2004년. [본문으로]
  2. 아시베 노부요시, 『헌법 [초판]』, 이와나미쇼텐, 1993년, 4~12쪽. [본문으로]
  3.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13~17쪽. [본문으로]
  4.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27~31쪽. [본문으로]
  5.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71~74쪽. [본문으로]
  6. 아시베 노부요시, 『헌법소송의 현대적 전개』, 유히카쿠, 1981년, 68쪽. [본문으로]
  7. 아시베 노부요시, 『헌법 [초판]』, 이와나미쇼텐, 1993년, 218쪽. [본문으로]
  8.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242쪽. [본문으로]
  9.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249쪽. [본문으로]
  10. 아시베 노부요시, 전게서, 255쪽. [본문으로]
  11. 아시베 노부요시, 『헌법의 초점Ⅱ』, 유히카쿠 리브레, 1984년, 1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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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평석이라는 것을 판례에 붙여야 하겠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부언을 몇자 적어둔다. 쇼와 45년도(1970년)부터 쇼와 48년도(1973년)에 걸친 이 사건과 동일하게, 이 시기는 일본 최고재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시대로, 재판장이자 재판관인 이시다 가즈토(石田和外)라는 장관의 시대에는 이른바 사법행정의 반동화로 불리는 최고재 사무총국을 거점으로 하는 사법관료를 중심으로 정치성 있는 사건은 집권당이었던 자유민주당의 성향에 적합하게 판결을 내리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각주: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일부 친노동조합적 성향을 갖는 판결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최고재가 두 얼굴을 가진 시기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참고로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는 외교관 출신으로, 판결 1년 전의 최고재판소재판관국민심사에서 불신임률 15.71퍼센트를 얻어 역대 최고를 기록한 바 있다. 물론 이 판결과 관계는 전혀 없다.

판결과 전혀 관계없는 소개를 더 하자면 일반의견과 달리 존속살인에 대한 특별규정 자체가 위헌이라는 의견을 낸 다나카 지로(田中二郎)는 2차대전 이전부터 1960년대까지 행정법학자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기본적인 법전을 갖지 않는 행정법에 있어서 미노베 다쓰키치 교수가 수립했던 자유주의적 행정법 이론을 계승 및 발전하여 행정법에서의 통칙적 역할을 맡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 판결에 있어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문언상의 문제도 있겠으나, 한국에 있어서 이러한 판결이 나온 1973년을 돌아볼 때에 무려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큰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1973년을 즈음하여 일부 학자들이 일본의 판결에 영향을 받아 잠깐 논의하기는 하였으나, 이후의 연구는 거의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그 합헌과 위헌을 논하는 점에 있어서도 검토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합헌이라는 견해가 거의 통설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도 아쉬운 점이 많다. 이 점이 해당 판결문의 전문을 번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1. 이에 대하여는 하세가와 마사야스(長谷川正安), 『일본의 헌법』(제3판), 이와나미 쇼텐, 1994년. 최은봉이 한국어로 소개한 바 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헌법』(최은봉 옮김,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13, 소화출판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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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쇼와 48년) 4월 4일
존속살인 법정형 위헌사건(존속살인피고사건)
[각주:1][각주:2]

원문(일본어) 다운로드 (누지름)



주문
 원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2년 6개월에 처한다.
 이 판결의 확정일로부터 3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이유

변호인 오누키 다이하치(大貫大八)의 상고 취지 가운데 위헌을 말하는 점에 대하여

 소론은 형법 200조는 헌법 15조에 위반하여 무효이므로, 피고인의 본 건 소위에 대하여 형법 제200조를 적용하는 원판결은 헌법의 해석에 잘못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안에서는 헌법 14조 1항은 국민에 대하여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규정이므로, 동항 후단 열거의 사항은 예시적인 것으로서 이와 함께 평등의 요청은 그 성질에 즉응(卽應)하여 합리적인 근거에 기한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차별적인 취급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당 재판소 대법정판결[각주:3]에서 밝힌 바와 같다. 즉 형법 200조는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죽인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이에 대하여 특별한 신분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동법 199조에서 정한 보통살인의 소위와 같은 유형의 행위에 대하여 그 형을 가중하고 있고, 이른바 가중적 신분범의 규정에 해당[각주:4], 이에 의하여 형법 199조 이외에 동법 200조를 둔 것은 헌법 14조 1항의 의미에 있어서 차별적인 취급에 해당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형법 200조가 헌법의 위 조항에 위반하는지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이는 그처럼 차별적인 취급이 합리적인 근거에 기한 것인 경우인지를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당 재판소는 쇼와 25년 10월 이래, 형법 200조가 헌법 13조, 14조 1항, 24조 2항 등에 위반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는 당연한 것이라는 취지의 판단을 한 바 있다. 또한 처음에 형법 200조가 헌법 14조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대법정 판결[각주:5]도 법정형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는 유감의 취지를 괄호서에서 판시하였던 것 이외에도 정상(情狀), 특히 많은 고민을 요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사안에 대하여 합헌성에 저촉됨이 없다고 하며 다른 이유에서 동조의 적용을 배제한 사례도 없는 것이 아니다[각주:6]. 또한 현행 형법은 메이지 40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바탕으로 한 제23회 제국의회의 협찬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서, 쇼와 22년에 일본국헌법을 바탕으로 한 제1회 국회에서 헌법의 이념에 적합하도록 그 일부를 개정한 때에도 형법 200조는 이 개정에서 제외하고, 이후 지금까지 동조에 관한 각별한 입법상의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동조 설치의 상상적 배경에는 중국의 옛 법제에 연원을 둔 우리나라의 율령제도나 도쿠가와 막부의 법제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존속살해에 대한 중벌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으며, 특히 동조가 배우자의 존속에 대한 죄를 또한 포함하고 있는 점은 일본국 헌법에 의해 폐지된 ‘가’(家)의 제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외국의 입법례를 보면 위와 같은 중국의 옛 법제 이외에 로마의 옛 법제 등에서도 부모를 살해한[親殺] 경우에 엄히 벌하는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근대에 들어서 존속살해에 대한 중벌 규정이 남아있는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이를 폐지하거나 완화하고 있으며, 또한 단순히 존속살해에 대하여 중한 벌을 주는 것 이외에도 비속이나 배우자 등의 살인에 대해서도 근친살해가 되는 가중요건을 둔 범죄유형으로서 규정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 예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최근 발표된 우리나라의 개정형법 초안에서도 존속살해에 대한 중벌 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당 재판소가 소론 형법 200조의 헌법적합성에 바탕을 두고 검토한 것은, 우선 동조의 입법목적을 바탕으로 이것이 헌법 14조 1항이 허용하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판단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형법 200조의 입법목적은 존속을 비속 이외의 그 배우자가 살해하는 것을 두고 일반에 대하여 고도의 사회적 도의적 비난을 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행위를 통상의 살인의 경우보다 엄중하게 처벌하고, 특히 강하게 이를 금압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해석된다. 또한 대강 친족은 혼인과 혈연을 주(主)된 기반으로 하여 서로의 자연적인 경애와 친밀한 정으로 맺어짐과 동시에, 그 사이에 저절로 장유(長幼)의 구별이나 책임의 분담에 따르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고, 통상 비속은 부모, 조부모 등의 직계존속에 의하여 양육되어 성인이 될 뿐만 아니라, 존속은 사회적으로도 비속의 소위에 따르는 법률상, 도의상의 책임을 지므로, 존속에 대한 존중과 보은은 사회생활상의 기본적인 도의라고 말할 수 있고, 이러한 자연적인 애정 또는 보편적 윤리의 유지는 형법상의 보호를 받을 만한 가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하는 행위는 이러한 결합의 파괴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인륜의 큰 근본[大本]에 반하고, 그러한 행위를 굳이 하는 자의 배륜이성(背倫理性)은 특히 중하게 비난할만 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때, 존속의 살인은 통상의 살인에 비해 일반적으로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처벌에 반영하는 것 또한 일률적으로 불합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피해자가 존속인 경우를 범죄의 정황 가운데 하나로 구체적 사건의 양형(量刑)에 있어서 중시하는 것은 헌법이 허락할 뿐 아니라, 이에서 나아가 이를 유형화하여 법률상 형의 가중요건으로 하는 규정을 마련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차별적 취급이며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흠결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 하더라도 또한 헌법 14조 1항에 위반된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보통살인 이외에 존속살인이라는 특별한 죄를 두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 자체는 바로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형벌 가중의 정도 여하에 따라서는 그 차별의 합리성을 부정할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가중의 정도가 극단(極端)에 다다라, 앞에서 본 입법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심하게 균형을 잃고, 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때에는 그 차별은 현저하게 불합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해당 규정은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형법 200조를 보면 동조의 법정형은 사형 및 무기징역형뿐으로 보통살인죄에 관한 동법 199조의 법정형이 사형, 무기징역형의 외에 3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비교할 때에 형종(刑種) 선택의 범위가 지극히 무거운 형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명백하다. 나아가 현행 형법에서는 여러 감경규정이 존재하고 이에 대하여 법정형을 수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현행법상 허용되는 2회의 감경을 더하더라도 존속살해에 대하여 유죄로 판명된 비속에 대하여 형을 언도할 때에는 처단형의 하한은 징역 3년 6월의 밑으로 할 수 없고, 그 결과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정상이 있더라 하더라도 법률상 형의 집행을 유예할 수 없으므로 일반살해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비속이 아무 과책(過責) 없는 존속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것과 같은 때에는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에서 약간도 물러설 수 없겠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보통살인죄의 규정을 적용하여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 반면에 존속으로서 비속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여 결국에는 비속으로 하여금 존속을 살해하도록 하는 사태에 이르게 하는 사례도 나타나므로, 그 경우에 비속의 행위가 반드시 현행법이 정하는 존속살해의 중형을 받아야 할 만큼 준엄한 비난의 가치가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양형의 실상을 보더라도 존속살해의 죄만으로 법정형이 부과되는 사례가 거의 없고 그 대부분이 감경을 더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도 현행법상 허락되는 2회의 감경을 더하는 경우가 적지않을 뿐만 아니라 그 처단형의 하한에 해당하는 징역 3년 6월의 형이 선고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이는 비속의 배륜이성(背倫理性)이 반드시 항상 크다고 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존속살해의 법정형이 극단적으로 무겁게 규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살펴볼 때 존속살해의 법정형은 그것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에 한정되어 있는 점[각주:7]에 비추어 매우 과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앞에서 이야기한 입법목적, 즉 존속에 대하여 경애(敬愛)와 보은(報恩)이라는 자연적 정애(情愛) 또는 보편적 윤리의 유지와 존중의 관점에 비추어도 이를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차별적 취급으로 정당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이상의 이유에서 형법 200조는 존속살해의 법정형을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한(限)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그 입법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한도를 매우 초과하고 있으며, 보통살인에 관한 형법 199조의 법정형에 비하여도 현저하게 불합리한 차별적 취급을 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으며, 헌법 14조 1항을 위반하여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존속살해에 대하여도 형법 199조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반하는 당 재판소(최고재판소)의 종래 판례는 이를 변경한다.

 따라서 이와 견해를 달리하여 형법 200조는 헌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하여 피고인의 본 건 소위에 동조를 적용하고 있는 원 판결은 헌법의 해석에 오인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오인이 판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명확하므로 소론은 결국 이유있다고 할 것이다.


그를 제외한 상고취지에 대하여

 소론은 단순히 법령을 위반하고, 사실을 오인한 주장으로 적법한 상고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상 형사소송법 405조 1호 후단, 410조 1항 본문에 따라 원 판결을 파기하고, 동법 413조 후단에 따라 피고사건에 대하여 더욱 판결한다.

 원 판결이 확정한 사실에 법률을 적용하면 피고인의 소위(所爲)는 형법 199조에 해당하므로 소정의 형 가운데 유기징역형을 선택하며, 이는 심신미약의 상태에서의 행위이므로 동법 39조 2항, 68조 3호에 따라 법률상의 감경을 하고, 그 형기의 범위 내에서 피고인을 징역 2년 6월에 처하며, 또한 피고인은 소녀시절에 친부로부터 패륜의 행위를 받아 이후 본 건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이러한 부부와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고, 그간에 수인의 아이까지에 이르는 비참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본 건 이외에는 어떠한 비행도 보이지 않는 점, 본 건 발생 직전에 겨우 정상적인 결혼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친부가 이를 싫어해 어디까지나 피고인을 자기의 지배 아래에 두어 추행을 계속하고자 한 것이 본 건의 연유인 것, 이로 인하여 친부로부터 여러 날에 있어 협박과 학대를 받아 고뇌와 연민이 극에 다다른 점, 이유 없는 친부의 폭언에 촉발된 증오로부터 도망치려하다가 결국 본 건에 이른 것, 범행 이후 즉시 자수한 것 이외에 재범의 우려는 생각할 수 없는 것 등 제반의 정상에 비추어 볼 때 동법 25조 1항 1호에 따라 이 재판 확정일로부터 3년간 위 형의 집행을 유예하며, 제1심 및 원심에 있어서의 소송비용은 형소법 181조 1항 단서를 적용하여 피고인에게 부담시키지 않는 것으로서 주문대로 판결한다.

 이 판결은 재판관 오카하라 마사오(岡原昌男)의 보족의견(補足意見), 재판관 다나카 지로(田中二郎)와 동(同) 시모무라 가즈오(下村三郎), 동 이로카와 고타로(色川幸太郎), 동 오스미 겐이치로(大隅健一郎), 동 오가와 노부오(小川信雄), 동 사카모토 요시카쓰(坂本吉勝)의 각 의견 및 재판관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의 반대의견이 있는 것 외에 재판관 전원 일치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재판관 오카하라 마사오(岡原昌男)의 보족의견은 다음과 같다.

1.
 본 판결의 다수의견은 형법 200조가 보통살해 이외에 존속살해라는 특별한 죄를 두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 자체는 위헌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가중의 정도가 매우 엄한 것에 있어서 동조는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고 하지만, 이에 대하여 (갑) 형법 200조가 존속살해라는 특별한 죄를 두고 있다는 것 자체로 위헌이라고 하는 의견, 및 (을) 형법 200조는 존속살해라는 죄를 두고 있는 점에 있어서도, 형의 가중의 정도에 있어서도 전혀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대의견이 있으므로, 나는 다수의견에 속하는 사람의 한명으로서 이에 대하여 약간의 소신을 표하고 싶다.

2.
 위 (갑)의 견해는 요컨대 형법 200조는 (1) 친자 외에 부부나 형제자매 기타 친족의 결합 가운데 비속의 존속에 대한 관계만을 다루고 있는 점, 및 (2) 일본국헌법의 기본이념에 배치(背馳)되는 특수한 신분제 도덕의 유지와 존속을 목적으로 하는 점이 인정되는 점에 있어서, 헌법 14조 1항이 허용하는 합리적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1)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본 건에서 당 재판소가 해야하는 일은 본 건의 구체적 쟁송에 있어서 헌법상의 논점, 즉 현행 실정법인 형법 200조의 합헌성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이고, 친족간의 살인에 있어서 어떠한 입법을 하는 것이 적절하고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견은 이를 당연한 전제로 굳이 동조의 입법정책으로서의 당부(當否)의 여부에 구애될 것은 아니고, 동조의 합헌성만을 검토한 뒤 동조가 두는 차별은 헌법상 그 자체로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의 점을 실정법의 합헌성이 다투어지는 본 건 헌법소송에 있어서의 판단의 이유로 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다음 (2)로 설시된 여러 점은 모두 정당하므로 나도 형법 200조가 지난 날의 ‘가’(家)의 제도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존속과 비속 사이의 권위와 복종의 관계를 지극히 중시하는 사상을 배경으로 하며, 이에 기초하여 가족 간의 윤리 및 사회적 질서의 유지와 존속을 위한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은 형법 200조의 성격은 존속살해가 되는 죄를 두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정형이 극단적으로 중한 형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고 있으므로, 다수의견이 존속살해의 법정형은 “존속에 대하여 경애(敬愛)와 보은(報恩)이라는 자연적 정애(情愛) 또는 보편적 윤리의 유지와 존중의 관점에 비추어도 이를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같은 견지에 서서 그 이치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본다. 즉 (2)를 논하는 각 의견의 취지에는 모두 찬동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를 가지고 형법 200조가 존속살해를 두고 있는 것 자체의 위헌성의 근거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동조의 법정형의 불합리성의 근거로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또한 (을)의 반대의견은 주로 형법 200조의 법정형은 극단적으로 중한 것이라고 해석하는지의 여부에서 다수의견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 가운데 입법의 연혁 및 재판소의 헌법판단의 자세에 대한 언급에 관하여 한마디 하고 싶다.

 동 의견이 지적하는 입법의 연혁은 역사적 사실로서 명확한 것이다. 또한 국가의 입법권은 국권의 최고기관인 국회에 속하는 것(헌법 41조), 또한 국회의원은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지는(헌법 99조) 것에서 입법부인 국회는 법률의 제정과 함께 헌법에 적합하도록 그 내용을 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구 헌법(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하여 제정된 법률 가운데 지금까지 개폐되지 않은 규정에 있어서도 입법부는 암묵적으로 이를 일본국헌법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것도 위 의견이 이야기하는 대로이다. 그리고 재판소는 구체적 쟁송에 대하여 특정한 법규의 합헌성에 다툼이 있는 경우에, 이에 대하여 심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해당 법규의 내용의 당부(當否)가 입법 정책의 당부의 문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는 문제의 법규를 위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더욱이 법규의 내용의 당부가 입법정책 당부의 범위에 머무르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에 있어서는 재판소는 앞에서 이야기한 헌법 적합성에 대한 입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삼권분립의 제도 아래에서 위헌입법심사권의 원래의 목표로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以上)에 의하면, 헌법상의 효력의 다툼이 있는 특정한 법규의 내용이 입법의 연혁, 운용의 실정, 사회의 통념, 여러 나라의 법제 기타 제반의 상황에 비추어보아 상당한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당부(當否)가 반드시 입법정책의 당부의 범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문이 생기는 경우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또한 이를테면 형법과 같이 사회생활상의 강행규범으로서 가치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기본법규에 대하여는 시대의 진운(進運)과 사회정세의 변화 등에 맞추어, 당초에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고 하는 규정이 현재에 있어서 헌법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재판소는 이미 앞에서 기술한 겸억(謙抑)의 입장에 매여 있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헌법에 부여하고 있는 위헌입법심사의 권한을 행사하여 당해 규정의 헌법적합성에 대하여 검토하여야 하며, 그 결과 만약 당해 규정의 불합리성이 헌법의 특정한 조항이 허용하는 한도를 넘어서 입법부의 재량의 범위를 일탈하고 있다고 인정된다면 당해 규정의 위헌을 선명(宣明)할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본 판결의 다수의견이 형법 200조의 합헌성에 관한 당 재판소의 선례 외에 동조의 입법의 연혁, 여러 국가의 입법례, 최근의 입법 경향 등을 아울러 이에 비추어 보고, 동조의 헌법적합성에 대하여 다시 고찰하는 취지를 설시(說示)한 후 처음으로 실질적인 판단에 들어간 것은 위와 같은 견지에 서서 모든 자의를 배제한 신중한 검토를 더한 것이다. 또한 다수의견이 동조를 위헌이라고 하는 것과 함께 그 법정형에 대하여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피한 것으로 사항의 성질상 불가피한 것일뿐더러, 그 말 외에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고, 그 판단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으며, 결코 가볍게 위헌의 판단을 행한 것이 아닌 것이다. 반대의견이 다수의견과 결론을 달리 하는 것은 단지 입각하고 있는 점이 다른 것에 기초한 것이며,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다수의견도 좀 더 신중을 가진 판단이었다고 하는 점에는 다소 승복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다나카 지로(田中二郎)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 판결이 존속살인에 관한 형법 200조를 위헌무효로 하고, 동조를 적용한 원 판결을 파기하고 보통살인에 관한 형법 199조를 적용하여 피고인을 징역 2년 6월에 처하고 3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그 결론에는 찬성하지만, 다수의견이 형법 200조를 위헌이라고 한 이유에는 동조할 수 없다. 즉 다수의견은, 요컨대 형법 200조에 대하여 보통살인과 구별하여 존속살인에 관한 특별한 죄를 정하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 자체를 가지고는 위헌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다만 그 형의 가중의 정도가 매우 엄한 점에 있어서, 동조는 헌법 14조 1항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보통살인과 구별하여 존속살인에 관한 규정을 두어 존속살인에 대하여 차별적 취급을 하도록 하는 자체가 법적 평등을 규정한 헌법 14조 1항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바에서 보면 본 건(件)과는 직접 관계는 없으나, 존속살인에 관한 형법 200조의 규정뿐만 아니라 존속상해치사에 관한 형법 205조 2항, 존속유기에 관한 형법 218조 2항 및 존속의 체포감금에 관한 형법 205조 2항의 각 규정 또한 피해자가 직계존속이라는 이유로 특히 가중규정을 두어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으로 모두 위헌무효로 풀이해야 하므로, 여기에도 (견해의) 차이가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존속살인에 관한 형법 200조를 위헌무효라고 풀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만 나의 생각하는 바를 쓰는 것으로 한다. 그는 다음과 같다.

1.
 일본국헌법 13조의 모두(冒頭)에서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 존중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는 개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하여 모든 개인에 대하여 인격 가치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으로, 민주주의가 바탕하는 기초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인 것으로서, 동 14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인종, 신조, 성별, 사회적 신분 또는 문벌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고에 서서 이와 동일한 취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풀이해야 한다. 이 조항에는 인종이나 신조, 성별 등이 열거되어 있으나 다수의견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러한 열거는 단지 그 주요한 예시적 열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이 열거사항에 직접 해당하느냐와 관계없이 개인의 존엄과 인격가치의 평등을 존중·보장한다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에 비추어서 불합리하다고 보이는 차별적인 취급은 모두 이 조항들의 취지에 위반하는 것으로 그 효력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헌법이 앞에서의 의미와 같이 법적 평등을 존중하고 확보해야 할 것으로 삼은 것은 봉건시대의 권위와 예종(隸從)의 관계를 타파하고, 인간의 개인으로서의 존엄과 평등을 회복하여 개인이 각각 개인의 존엄을 자각한 것에 바탕하여 평등한 입장에 대하여 서로 협력하고, 평화로운 사회와 국가를 형성해야 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국헌법의 정신 또한 이에 있는 것이라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나도 일체의 차별적 취급이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차별적 취급이 합리적인 이유에 기초한 것으로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이미 많은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승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그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차별적 취급인 것인가와 그 ‘합리적인 차별’과 ‘합리적이지 않은 차별’을 구별하는 기준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점에 대하여 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헌법이 기조(基調)로 삼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으로 볼 때 개인의 존엄과 인격가치의 평등을 존중해야 한다는 헌법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이와 모순·저촉하지 않는 한도에서의 차별적 취급만이 허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본 건에 대하여는 존속살인에 관하여 보통살인과 구별하여 특별한 규정을 두는 것이, 앞의 기준에 비추어 과연 ‘합리적인 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여기서 다수의견은 (1) 존속살인에 대하여 보통살인과 구별하여 특별한 규정을 두는 것에는 합리적 근거가 있으므로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하며, 다만 (2) 형법 200조가 정하는 법정형이 지나치게 엄한 점에 대하여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1)의 견해는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매우 문제가 있다. 또한 만일 (1)의 견해를 시인할 수 있다고 하는 경우에도 (2)의 견해가 과연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하여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차례로 나의 의문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1) 형법 200조의 존속살인에 관한 규정을 두는 것에 이른 사상적 배경에는 봉건시대의 존속살인 중벌의 사상이 있는 것이라고 풀이될 뿐만 아니라, 동조가 비속에 해당하는 본인 이외에 배우자의 존속살인에 대하여도 동렬(同列)에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 보아도, 동조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구 헌법 시대에 특히 중시된 이른바 ‘가족제도’와의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헌법은 봉건제도의 잔재를 배제하고, 가족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兩性)의 본질적 평등을 확립하는 것을 근본적 바탕으로 하여(헌법 24조 참조), 이러한 견지에 서서 민법의 개정에 따라 ‘가’(家), ‘호주’(戶主), ‘가독상속’(家督相続) 등의 제도를 폐지하는 등 헌법의 취지를 근본으로 삼아 필요한 개정을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헌법의 취지에 비추어볼 때 존속이 단지 존속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거나, 본인 이외에 배우자를 포함한 비속의 존속살인은 그 배덕성(背德性)이 현저하고, 특히 강한 도의적 비난의 가치가 있다거나와 같은 이유에 의하여 존속살인에 관한 특별한 규정을 두는 것은 일종의 신분제 도덕의 견지에 선 것이라고 해야하며, 앞에서 이야기한 구 가족제도적 윤리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개인의 존엄과 인격가치의 평등을 기본적인 입각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이념과 저촉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극히 농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외국의 입법례에 있어서 존속살인 중벌의 규정이 점차로 자취를 감추고, 이에 관한 규정이 있던 경우에도 이를 폐지 또는 완화하는 경향에 있는 것도 앞에서 이야기한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의 침투와 그 철저함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우리나라의 개정형법 초안이 이런종류의 규정을 두지 않는 것 또한 이러한 흐름에 따른 것과 다르지 않다.

 나도 직계존속과 비속이 자연적 정애(情愛)와 친밀한 정에 따라 맺어져,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이 자식으로 당연히 지켜야하는 기본적 도덕인 것을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인정(人情)이 자연히 바탕하는 심정의 발로로서의 자연적·인간적 정애[각주:8]가 부모와 자식을 묶는 끈으로서 강해지는 것을 강하게 기대하고 있지만, 그것은 바로 개인의 존엄과 인격가치의 평등이라는 원리 위에 서서 개인의 자각에 기초하여 자발적으로 준수되어야 하는 도덕이며, 결코 법률을 가지고 강제하거나 특히 엄한 형벌을 과(科)하는 것에 의해 준수시키거나 그렇게 해야할 것이 아니다. 존속살인의 규정이 있다고 하여 ‘효’(孝)라는 덕행이 지켜지고, 이 규정이 없어서 ‘효’라는 덕행이 쇠퇴한다고 하는 사고방식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존속살인에 관한 규정은 상술(上述)한 견지에서 다만 입법정책의 당부(當否) 여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헌법을 관통하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에 저촉하여, 직접적으로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나는 존속살인에 관하여 보통살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헌법 14조 1항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다수의견이 설시(設示)하는 바와 같이 이 자체가 헌법 14조 1항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입장에 서고자 한다면, 존속살인에 대하여 어떠한 형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는 오히려 입법정책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적합하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수의견은 “존속의 살해는 통상의 살인에 비해 일반적으로 고도의 사회적 도의적 비난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 처벌에 반영하는 것 또한 일률적으로 불합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존속살해의 법정형은 그것이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에 한정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매우 과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중략) 즉 존속에 대하여 경애(敬愛)와 보은(報恩)이라는 자연적 정애(情愛) 또는 보편적 윤리의 유지와 존중의 관점에 비추어도 이를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합리적 근거에 기초한 차별적 취급으로 정당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존속살해가 통상의 살인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유로 이를 처벌에 반영시켜도 불합리하지 않다는 관점에 서게 되면, 존속살해에 대하여 통상의 살인에 비해 엄격한 법정형을 정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고, 처단형 3년 반까지 감경할 수 있는 현행의 법정형이 엄격함을 잃게 되어 그 점에 대하여 위헌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법정형의 균형이라는 입법정책의 당부(當否)의 문제에 해당하고, 형법 200조가 정하는 법정형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인지는 헌법 14조 1항이 정하는 법 앞의 평등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헌법 36조가 정하는 잔학형에 해당하는지 여부의 관점에서 합헌인가 위헌인가의 판단을 더하여야 마땅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일본국헌법의 제정과 함께 행해진 형법의 개정에 즈음하여 ‘충효’(忠孝)라고 하는 덕목을 기반으로 하는 규정 가운데 ‘충’(忠)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면서 ‘효’(孝)에 관한 규정을 존치한 것은, 헌법의 근본이념 및 헌법 14조 1항의 바른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쇼와 24년(1949년) 10월 11일의 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각주:9]이 존속상해치사에 관한 형법 205조 2항은 헌법 14조에 위반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단을 한 것[각주:10] 또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최고재판소의 지도적 판결의 바탕에서 형법 200조가 실제상 어떻게 운용되어 왔는지 하는 것도 앞의 규정의 존재 의의를 반성하는 동시에 약간의 참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존속살인사건에 대한 제1심 판결의 과형의 실상을 볼 때, 통계에 따르면 쇼와 27년(1952년)부터 쇼와 44년(1969년)에 이르는 18년간 존속살인사건의 총수 621건 가운데 사형을 언도한 것은 단 5건(0.81%), 무기징역형을 언도한 것은 61건(9.82%)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는 감경조치를 통해 15년 이하의 징역형을 언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5년 이하의 징역형을 언도한 것이 164건(26.4%)에 달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다수의견이 존속살인은 일반살인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로는 본 건의 경우와 같은 극단적인 예는 없더라도,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행해진 범행으로서 강한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가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형법 200조의 존재는 구체적 사안에 입각한 양형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하여 재판관을 고려(苦慮)케 하고, 때로는 굳이 동조의 위헌무효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 실정이다. 최고재판소 자체도 쇼와 32년(1957년) 2월 20일의 대법정 판결[각주:11]에 있어서, 냉대에 괴로워하다가 망부(亡夫)의 부모 등을 살해하고자 한 미망인에게 형법 200조를 적용한 원판결을 파기하고, 동조의 “배우자의 직계존속”은 현재 생존하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여 형법 200조의 적용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그 결론은 타당하여 지지해야할 것이지만, 동조의 해석으로서는 문제가 있는데 앞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근본에 서서 살필 때 형법 200조 그것의 합헌성에 대하여 검토를 더해야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분명 존속살인의 안에는 천인(天人)조차 허락하지 않는 악역(惡逆)하고 비도(非道)한 것도 있어 극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존속살인이라는 특별한 취급을 하는 것에 대한 근거나 그를 합리화하는 것이 될 수는 없고, 이러한 사안은 보통살인에 대하여도 자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처벌은 보통살인에 관한 법정형으로 충분하므로, 개정 형법 초안이 존속살인에 관한 규정을 폐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견지에 서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4.
 다수의견이 존속살인에 대하여 합리적인 정도의 가중규정을 두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은, 그를 위헌이라고 하는 판단을 하는 것의 사회적 영향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였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상상하지만, 살인은 존속살인이든 보통살인이든 가장 강한 도의적 비난을 받을 범죄임에는 말 할 필요도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존속살인에 관한 규정이 위헌무효라고 하는 판단을 하더라도 이러한 기본적인 도덕이 경시되거나 반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비난이 완화된다든가 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 일반상식 또는 도덕관을 경시한 결과로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5.
 마지막으로 시모다 재판관의 반대의견에 대하여 한마디 더하고 싶다.

 시모다 재판관의 반대의견은 그 결론 및 이유의 골자에 있어서 내가 찬성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말한 바에서 명확하기 때문에 여기에 다시 말하는 것을 생략하고, 여기에서는 시모다 재판관이 취하는 재판소의 위헌심사권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만 나의 의견을 말하기로 한다.

 앞의 점에 관한 시모다 재판관의 의견은, 국민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입법부가 제정한 실정법규는 이를 존중하는 것이 “헌법의 근본원칙인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취지에 따르는” 것이고, 재판소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 사항에 대하여 입장을 만드는 것은 “사법의 겸억(謙抑)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될 우려가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기초로 하는 것으로, 형법 200조에 대하여도 쇼와 22년(1943년)에 형법의 일부개정이 행해졌을 때에 일부러 그 개정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이를 “당시 입법부가 본조에 대하여 헌법에 적합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며, 그 후 여러 논의가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동조(同條)에 관한 입법상의 조치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입법부가 현시점에 있어서 동조(同條)의 합헌성은 물론 입법정책 당부(當否)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동조(同條)의 존치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해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경위(經緯)를 고려한다면 사법의 겸억(謙抑)과 입법부의 판단의 존중의 필요는 형법 200조의 경우에 있어서 일단 더욱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또한 입법론으로서도 “장래의 시기에 어떠한 존속살(尊屬殺) 처벌 규정을 제정 또는 개폐(改廢)해야 하는지의 판단은 모두 입법부의 재량(裁量)에 맡겨야 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고 하고 있다.

 나도 사항의 성질에 따라서는 입법부에 상당히 광범한 재량권을 인정할 경우가 있는 것, 그리고 그 재량권의 범위 내에 있어서는 입법정책의 문제로서 재판소로서도 이를 존중하는 것을 요하며, 이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해야할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거나 재판소가 안이하게 그러한 사항에 서서 그 당부(當否)를 판단하지 않는 것 또한 시모다 재판관이 주장하는 대로라고 생각한다. 또한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규정은 가능한 헌법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와 조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석을 해야 하고, 그 자구의 표현에만 매여서 쉽게 위헌무효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도 전부터 내가 주장해 온 바이며 당 재판소의 판례가 취하는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시모다 재판관의 의견은 “헌법의 근본원칙인 삼권분립의 취지”와 “사법의 겸억(謙抑)의 원칙”을 내세워 입법부의 재량적 판단에 맡길 수 있는 범위를 부당하게 확장하고, 또한 입법부가 합헌이라고 판단한 이상 이에 대한 재판소의 개입은 이미 허락되지 않는다는 식의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그 진의(眞意)의 정도는 명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본 건에 대하여 시모다 재판관이 주장하는 바에 한하여 본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입법부로서[각주:12] 그 행위가 위헌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굳이 이를 강행한다고 하는 것은 나치 정권 하의 위헌입법과 같은 때, 이른바 혁명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과 같은 경우는 별도로 하고,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통상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로는 입법부의 주관에 있어서는 합헌이라고 판단한 입법에 대하여도, 이를 객관적으로 본 경우에 과연 합헌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그 경우에 합헌인가 위헌인가의 심리판단을 재판소의 중요한 권한으로 인정하자는 것이 재판소의 위헌입법심사권의 본래의 취지인 것이다. 따라서 재판소의 위헌입법심사권이 명문으로 인정되는 현행 헌법 하에서는 입법부 자체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고 하는 것은 재판소의 위헌입법심사권의 행사를 부정하여 이를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기본적 인권의 존중 확보의 요청과 공공의 복지의 실현의 요청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사상적인 가치관의 대립에 따라 중점을 두는 바가 다르며, 이해의 대립도 얽히고, 견해의 현저한 차이가 보이는 시대에 있어서는 국회의 다수의 의견에 따라서 제정된 법률이라는 것을 두고 항상 합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법률에는 일응 ‘법률의 유효추정’(합헌성의 추정)이 부여되어 있지만, 그것이 과연 합헌인가는 사실 재판소의 심리판단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대개 사법의 겸억(謙抑)의 원칙만을 강조하여 재판소의 위헌입법심사권의 행사를 부정하거나, 이를 극도로 제한하자고 하는 태도는 우리 현행 헌법이 정하는 삼권분립제의 참된 의의(意義)를 오해한 것에 바탕하여 재판소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권능인 위헌입법심사권을 스스로 방기(放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며, 헌법의 바른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어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재판관 오가와 노부오(小川信雄), 동 사카모토 요시카쓰(坂本吉勝)는 재판관 다나카 지로의 위 의견에 동조한다.


재판관 시모무라 가즈오(下村三郎)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 판결이 원 판결을 파기하고, 형법 199조를 적용하여 피고인을 징역 2년 6월에 처하며 3년간 형의 집행을 유예하는 결론에는 찬성하지만, 다수의견이 원 판결을 파기해야 한다고 하는 사유에는 동조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다음에 그 이유를 말한다.

 헌법은 그 14조 1항에 있어서 국민에 대하여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선명(宣明)하였다. 이는 국민이 각각 평등한 입장에 서서 상호(相互)가 경애(敬愛)하고 부조(扶助)하고 협력(協力)하여 평화로운 국가의 건설에 공헌하는 것을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취지에 따라 민법에 있어서는 ‘가’(家), ‘가독상속’(家督相続), ‘호주’(戶主) 등의 제도가 폐지되는 등 각 법률에서도 필요한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형법 200조와 같은 규정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그 존치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아, 당 재판소도 종래 존속살인과 보통살인을 각자 별도로 규정하여 존속살인에 대해 형을 가중하는 것은 신분에 의한 차별적 취급이지만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서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온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시대의 추이, 국민사상의 변천, 존속살인사건의 실정(實情) 등에 비추어 보면 존속비속간의 상호경애, 부조, 협력 등의 관계를 보지(保持)하는 것은 이를 자연의 정애(情愛)의 발로, 도의, 관행 등에 맡기는 것이 상당하고, 존속살인에 대하여 특별한 처벌규정을 존치하여 존속살인의 발생을 방지해야 할 필요는 이미 사라졌고, 이러한 규정을 존치하는 것이 타당한 양형을 함에 방해가 되는 경우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보통살인에 대하여 특별히 존속살인에 대한 처벌규정을 존치하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은 그 합리적인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 되고, 형법 200조는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하여야 한다. 따라서 형법 200조는 헌법에 위반하지 않는다고 하여 피고인의 본 건 소위(所爲)에 대하여 형법 200조를 적용하고 있는 원 판결은 헌법 14조 1항의 해석을 오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오인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를 파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판관 이로카와 고타로(色川幸太郎)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다수의견은 이를 요약하면 형법 200조가 존속살인을 보통살인과 구별하여 규정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신분에 의한 차별적 취급이지만, 그러나 존속살인은 배륜이성(背倫理性)이 현저하므로 이러한 소위(所爲)를 금압(禁壓)할 목적에서 특별한 죄를 두어 그 형을 가중하는 것은 헌법상 허용되는 합리적인 차별이며 직접 위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위 조항은 가중의 정도가 극단에 다다라 위의 입법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는 심하게 균형을 잃고 있으므로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 라고 설시(說示)하고 있다. 위 내용 가운데 형법 200조는 신분에 의한 차별적 취급의 규정이라고 하는 점과 함께 이 규정이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는 결론에는 나도 찬성하지만, 존속살인에 대하여 보통살인과 다른 특별한 죄를 규정하는 것이 헌법상 허용되는 범위의 합리적 차별이라는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는 것이다.

2.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수의견은 존속살인이 보통살인에 비하여 그 자체가 특히 무거운 비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고 한 그 점에서 앞의 양자(兩者) 사이의 차별적 취급의 합리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며, 그 논리는 대강 다음과 같이 전개되어 있다.
  1. 존속과 비속[각주:13]은 혼인과 혈연을 주된 기반으로 하는 친족이다.
  2. 친족은 자연의 경애(敬愛)와 친밀한 정으로 맺어진 결합이다.
  3. 그 결합에는 장유(長幼)의 구별이나 책임의 분담에 따른 질서가 존재한다.
  4. 부모는 자식을 양육·성장하도록 하고, 또한 자식의 행위에 대하여 법률상, 도의상의 책임을 진다.
  5. 부모에 대한 존속보은(尊屬報恩)은 사회생활상의 기본적 도의이며 보편적 윤리이다.
  6. 앞에서 기술한 사랑과 위의 윤리는 형법상 보호할 가치가 있다.
  7. 존속살인은 앞에서 기술한 결합의 파괴(破壞)이며 인륜의 대본(大本)에 반(反)한다.
  8. 존속살인은 이처럼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받는 것인바, 이를 양형의 정상(情狀)으로 삼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며, 그런 이상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유형화하여 법률상의 가중요건으로 하는 것은 당연 허용된다. 이상이다.
3.
 이를 요컨대 다수의견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살인을 가지고 보통살인과 비교할 수도 없다고 하는 이유를 그 행위는 자연적 애정을 유대로 하여 일정한 질서를 갖는 친족결합의 파괴이며, 이는 부모에 대한 망은(忘恩)의 행위라고 하는 두 가지 점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인과 혈연을 주된 기반으로 하여 서로의 자연적인 친밀한 정으로 맺어져 있는” 친족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뿐만이 아니다. 부부를 비롯하여 형제자매 역시 그렇다. 부부는 원래 타인이 같은 뜻으로 맺어진 것이지만, 그 사이의 자연적 정애(情愛)는 피가 섞인 부모자식[親子]에 비하여 모자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부부와 그 일방의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어느 것이 강하게 맺어져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부부관계는 부모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강한 의미의 결합을 가지고, 사회의 근원적인 기초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4]. 다수의견은 친족 사이에서 “장유의 구별이나 책임의 분담에 따른 일정한 질서”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 또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 특유한 것은 아니다. 부부에게는 부모자식[親子]의 사이보다 명확한 ‘책임의 분담’이 존재하고, 또한 형제자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장유(長幼)의 구별이 있다. 이러한 친족관계에는 ‘일정한 질서’가 엄격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간에 살인행위가 있었다면 그것이 ‘결합의 파괴’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에 대하여 보통살인과는 구별되는 다른 죄가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자식[親子] 간에서도 자식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같은 경우이다. 최근에 빈번히 발생하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살인 등은 진실로 자연의 정애(情愛)에 바탕한 결합의 파괴이며, 또 그 대부분은 허용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범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종래 이러한 살인에 대하여 가중규정은 물론 그 입법에의 요청마저 사라져 찾기 힘든 상태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하면 다수의견이 지적하는 배륜이성(背倫理性)이 특히 중하다는 이유는 이를 주(主)로 하여 상고 후단의 이유, 즉 부모에 대한 망은의 소행이라고 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4.
 이 점에 대하여 다수의견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또한 자식의 “소위(所爲)에 대하여 법률상, 도의상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식은 이에 대하여 ‘보은’(報恩)할 의무가 있어 이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 “사회생활상의 기본적 도의”이며 “보편적 윤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생각이 그대로 승인될 수 있는 것인가.

 (가) 우선 부모가 자식의 소위(所爲)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하는 의미를 검토해보고 싶다. 법률상의 책임에 관한 한 만약 잘못이 아닐지라도 그 말은 매우 부정확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형법은 책임원칙이 관통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서만 형벌을 부과 받는 것이며, 타인의 행위로 처벌받는 일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행정형법에 있어서는 역시 양벌(兩罰) 규정이 있으나 그 본질은 감독상의 부작위책임의 추구이며, 순수한 타인의 행위에 의한 형사책임은 아니다. 이른바 양벌(兩罰)을 과(科)하는 것은 사용자 기타 감독자가 되는 경우만이며, 부모가 되는 경우에 책임을 묻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죄가 구족(九族)에게 미치는 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이며, 근대 형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또한 민사상으로는 불법행위법의 분야에 있어서는 부모의 감독책임을 인정하는 경우(민법 714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이 미성년이며, 그 행위의 책임을 변식(弁識)할 수 없는 때로, 또한 그 부모가 감독상의 의무를 해태(懈怠)하였을 때라는 지극히 예외의 경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피해자의 구제라고 하는 견지(見地)에서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지만, 그는 제외하고서 민사상에서도 또한 자기책임이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인(萬人)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과 같은 사회적 윤리규범은 없는 것이고, 책임을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 대하여 비난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식의 소행에 대하여 부모를 엄격하게 규탄하는 것은 실은 근대 이전에 보이는 사회의 모습으로, 개인의 독립과 인격의 존엄을 기조(基調)로 하는 현대의 도리의 감각으로 본다면 그 풍조를 억제하는 것이야말로 분명 조장·고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 다수의견은 부모에 의한 양육과 그에 대한 ‘보은’(報恩)을 이야기하고 있다. 확실히 부모가 자식을 한 사람의 몫을 하도록 기르는 것에는 큰 노고(勞苦)를 수반하는 것이며, 때로는 자기희생마저도 감수하여야 하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다. 자식이 부모의 비호와 양육의 노력에 감사하는 뜻을 갖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지만, 이를 ‘은혜’[恩]라고 하면서 아이가 부모의 ‘은혜’[恩]에 보답하는 것이 사회생활상의 ‘기본적 도의’, ‘보편적 윤리’이며 일단 이에 벗어나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는 물론 법률적으로도 중한 비난을 가하여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은[각주:15] 바로 구래(舊來)의 효(孝)의 관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또한 다수의견은 그 강조하는 위의 덕목이 구래(舊來)의 효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이유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조정(措定)하여 이하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당연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효는 말할 필요도 없이 유교에 있어서 가장 중하다고 여겨진 도덕이다. 고대 유교가 이야기한 효는 다소 변용은 된 것이나, ‘충’(忠)과 함께 도쿠가와(徳川) 시대의 무가사회를 지배하는 확고한 근간(根幹)의 도덕이 되고, 또한 도쿠가와 말기에는 심학(心學)의 보급 등에 따라 농공상(農工商)의 서민에게도 어느정도 침윤(浸潤)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에 있어서는 일부 부유한 계급을 제외하고는 일반 정민(町民)이나 농민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퍼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고, 효의 관념을 기조로 하는 가족제도도 서민층의 사이에 있어서는 결국 확립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明治) 초두(初頭)에 정부가 중요한 교화정책으로 삼아 국민에 대하여 철저하게 한 결과, 봉건적인 효(孝)라는 덕목을 마치 만고불역(萬古不易)의 보편적 윤리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지나지 않고, 요컨대 역사의 일정 시기에 특수한 가족제도가 배경으로 가꾸어지고, 그리고 또한 역(逆)으로 이러한 가족제도가 정신적인 지주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며, 결코 고금동서(古今東西)를 통하여 변한 것이 없는 자연법 도덕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형법 200조의 입법취지가 봉건적 시대로부터의 전승을 통한 가족제도의 유지, 강화에 대해서인 것은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하여 범해진 경우에도 존속살인으로 하는 최초의 제안, 즉 메이지(明治) 34년 형법개정안에서 그 취지를 밝힌 공적인 ‘참고서’(參考書, 법전조사회 편)라고 칭한 문헌이나 그 후 현행법과 메이지 40년 개정안에 관한 정부의 형법개정이유서 안에서 역력히 볼 수 있고, 또한 그 당시에 있어서 지도적인 형법체계서가 분명 지적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가족제도가 이미 헌법의 취지에 배치(背馳)되는 것으로서 부정된 오늘, 효를 형법의 기초관념으로 하자고 하는 것이라면 시대착오라고 평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다) 헌법과의 관련에 있어서는 한편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효는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있어서 부모와 자식의 사이는 상호 독립한 인격 대 인격의 관계와는 서로 대척적(對蹠的)인 권위와 복종이 지배하는 세계와 다르지 않고, 존비(尊卑)의 구별[각주:16]은 영구히 존재하고, 뿐만 아니라 그간의 신분적 질서의 엄수가 절대적인 요청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자면 효는 부모에 대하여 자식의 예종(隸從)의 도덕인 것이다. 부모의 은혜는 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어서 이에 무정량(無定量), 무한정의 봉사의 정성을 바치고, 부모를 절대자로서 존중·복종하며, 자신의 힘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그것이 유교에 있어서 효(孝)라는 것으로, 그 끝은 부모, 부모가 아니라면 자식, 그 자식에게까지 미치는 효가 된다. 이는 중국의 설화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상식에 반하는 이러한 맹목적인 절대복종을 내용으로 하는 효는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기저(基底)로 하는 민주주의적 윤리와 서로 맞지 않는 것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윤리야말로 헌법의 기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수의견이 입각한 바에 근본적인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나는 부모를 중(重)하게 생각하여 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자식에 있어서 지켜야 할 중요한 도덕이라는 점을 털끝만큼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래 도덕은 원래 독립한 인격의 자발(自發)에 있어서의 내면적인 요청 내지 결정에 의하여야 가장 높은 정신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므로, 법률을 가지고 도덕을 강제하지 않는 이유는 도덕의 진가를 해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물론 법률을 통한 도덕의 고양 또한 대책으로서 삼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으므로, 묶어서 양 분야를 준별(峻別)하자고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그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가치를 보호법익으로 하는 입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유의하여야 하는 것은 그 도덕이 헌법의 정신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신중하게 음미(吟味)할 필요성이다. 해당 도덕이 헌법의 원칙[建前]인 개인의 존엄과 인간의 평등의 원리에 배반하는 것인 때에는 그 입법화는 물론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한다. 효의 도덕은 과연 일본의, 어떤 의미로는, 아름다운 전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연의 정애(情愛)와 상호부조(相互扶助)를 기조(基調)로 하는 근대적인 친자관계[각주:17]에까지 승화하지 않는 폐절(廢絶)된 낡은 가족제도와 결부된 채인 도덕을 한결같이 온존(溫存)하고 보호하며 강화하자고 하는 법률[각주:18]은 헌법에 따라 부정되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라) 또한 이어서 부모의 ‘은혜’[恩]에 대하여 한마디 해두고 싶다.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에 의한 반대급부로서 충근(忠勤)에 힘쓴다고 하는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의 관계는 지역의 동서(東西)를 불문하고 봉건시대에 있어서 주군(主君)과 무사(武士)의 관계에서 볼 수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경애하여 이를 소중히 해야한다는 감정 내지 도덕감은 그와는 질을 달리하는 인간의 정(情)으로서 자연히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각주:19]. 진정한 효는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에 보답한다고 하는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제일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힘쓰는 것도 은혜를 팔아 다른 날에 그 반대급부를 받고자 하는 저의에 따른 것은 우선 아닌 것이다. 그는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넘치는 자연의 인정(人情)의 발로(發露)인 것이다. 법률의 면에 있어서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감호(監護) 및 교육’은 부모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이며(민법 820조), 그에 의하면 또한 양육의 비용도 자식이 특별한 재산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부모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의 육성 및 교육은 양친의 자연의 권리이며, 이는 무엇보다도 양친에게 과하고 있는 의무이다”(독일 연방공화국 기본법 제6조 제2항). 따라서 이를 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에 대한 ‘보은’(報恩)을 자식의 지고(至高)의 의무라고 단정하여 여기에서 형법 200조의 주된 존재이유를 구하자고 하는 것은 현행법의 원칙[建前]에도 맞지 않아 분명 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다수의견은 양형에 맞추어 피해자가 부모인 것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이상 그를 유형화하여 법률상 형의 가중요인으로 하는 규정을 두더라도 합리성을 잃은 차별적 취급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부모라고 하는 단지 그 이유를 가지고 양형상 불리하게 취급하는 것은 결국 위헌의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이유로서는 상술(上述)한 바를 모두 채용(採用)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부모에게 각별히 허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방종(放縱)과 무뢰(無賴)의 극에 달하여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사회의 건전(健全)한 정서적 감각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그 때 재판소에 있어서는 이에 정상(情狀)을 중히 여겨 어떠한 주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친살(親殺)이라는 한 가지만으로 의거한 판단이 아니다. 양형에 있어서 정상의 감안과 참작은 극히 구체적, 특수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므로 이 경우 그 특별한 배경이 고려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 있어서 존속살인사건의 양형의 실제를 보아도 다수의견이 이야기하는 대로 다른 범죄와 병합죄의 관계가 된 경우에는 각별히 “양형의 실상을 보더라도 존속살해의 죄만으로 법정형이 부과되는 사례가 거의 없고, 그 대부분이 감경을 더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도 현행법상 허락되는 2회의 감경을 더하는 경우가 적지않을 뿐만 아니라, 그 처단형의 하한에 해당하는 징역 3년 6월의 형이 선고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라는 것이므로 피해자가 부모라는 것만으로 종래 무거운 형이 부과된 것이 아니다. 다수의견이 전술(前述)한 견해는 과거의 실례(實例)에 비추어 볼 때 이야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느낀다.

6.
 이상 나는 다수의견에 동조하기 어렵다는 내 나름의 몇몇 이유를 솔직하게 피력(披瀝)하였다. 그러나 본 판결이 갖는 획기적인 의의(意義)는 이를 평가하는 데에는 모자랄 것이 없는 것이고, 나는 다수의견이 당 심(審)이 다년에 걸쳐 고지(固持)한 견해를 일척(一擲)하고 형법 200조에 대해 위헌이라고 한 그 용단(勇斷)에는 깊은 경의(敬意)를 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만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일보(一步) 더 나아가 부모이며 아이라는 이유에 형법상 차별하여 취급하는 자체를 헌법에 부합하지 않는 입법이라는 것까지 밟아 나갔더라면 하는 것에 여전히 유감의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기도 하다[각주:20].


재판관 오스미 겐이치로(大隅健一郎)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형법 200조의 규정이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하는 본 판결의 결론에는 찬성하지만, 그 이유에는 동조하기 어려우므로 그 점에 대하여 의견을 말한다.

1.
 다수의견에 따르면 보통살인에 관한 형법 199조 외에 존속살인에 대하여 그 형을 가중하는 동법 200조를 두는 것은 헌법 14조 1항의 의미에 있어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하나, 헌법의 위 조항은 사항의 성질에 즉응(卽應)한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하는 것이 아닌 한 차별적인 취급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형법 200조가 헌법의 위 조항에 위반하는가 아닌가는 그 차별적 취급이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 존속살인은 배륜이성(背倫理性)이 특히 강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이 즉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러나 형법 200조는 존속살인의 법정형을 사형 및 무기징역에 한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그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한도를 훨씬 넘고, 보통살인의 법정형에 비하여 현저히 불합리한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으로,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가운데 형법 200조의 규정을 두는 것이 헌법 14조 1항의 의미에 있어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한다는 점, 헌법 14조 1항에 있어서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하는 차별은 허용된다고 하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없으나, 존속살인에 대하여 그 형을 가중하는 형법 200조의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헌법상 허용되는 합리적 차별이라고 하는 점에는 찬성할 수 없다.

2.
 다수의견이 존속살인이라는 특별한 죄를 두고, 그 형을 가중하는 것 자체가 즉시 불합리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는 이유는 (1) 친족은 혼인과 혈연을 주된 기반으로 하여, 서로 자연적인 경애(敬愛)와 친밀(親密)한 정에 따라 맺어진 동시에 그 사이 저절로 장유(長幼)의 구별이나 분담(分擔)에 따른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며, (2) 통상 비속(卑屬)은 부모, 조부모 등 직계존속(直系尊屬)에게 양육되어 성인이 될 뿐만 아니라, 존속은 사회적으로도 비속의 행위에 대하여 법률상, 도의상의 책임을 지므로 존속에 대한 존중과 보은(報恩)은 사회생활상의 기본적 도의라고 한다면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하는 행위는 이러한 결합의 파괴이며,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며, 존속에 대한 존중 및 보은과 같은 자연적 정애(情愛) 내지 보편적 윤리의 유지는 형법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데에 있다.

 이 가운데 (1)에 있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직계의 존속과 비속과의 사이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관계가 아니며, 부부(夫婦)나 형제자매 등의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인정되는 관계로, 그것이 존속살인에 대하여만 특별한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의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은 명확하므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다수의견이 존속살인에 대하여 특별한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2)에 있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좌우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생각건대 형법 200조 설치의 사상적 배경으로는 중국 옛 법제에 연원(淵源)하여 우리나라의 율령제도나 도쿠가와 막부의 법제에 나타나는 존속살(尊屬殺) 중벌의 사상이 있는 것이라고 풀이되는 이외에, 특히 동조가 배우자의 존속에 대한 죄도 포함하고 있는 점은 일본국헌법에 의하여 폐지된 ‘가’(家)의 제도와 깊은 관련(關連)을 가진다고 인정되며, 또 여러 외국의 입법례를 보아도 근대에 있어서는 존속살(尊屬殺) 중벌의 사상이 점차 그 자취를 감추며 존속살(尊屬殺) 중벌의 규정을 처음부터 갖지 않는 나라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이를 가지고있던 나라에 있어서도 근시(近時)에 들어서 이를 폐지 또는 완화하고 있는 것이 현상인 것은 본 판결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다.

 이미 이것이 형법 200조의 규정의 근저(根底)에 있는 존속살(尊屬殺) 중벌의 사상 또는 다수의견이 그 합리적 근거로서 이야기하는 존속에 대한 존중과 보은하여야 하는 도덕관념이 반드시 보편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의 바탕에 존립하는 것임을 엿보기에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형법 200조는 피해자가 가해자 또는 그 배우자의 직계존속이라고 하는 것만에 의하여 존속살인을 보통살인에 비하여 특히 중하게 벌하자고 하는 것이므로 직계존속은 직계존속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상 무조건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 되므로, 일종의 신분제 도덕의 견지에 서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는 주로 존속과 비속사이에 있어서의 권위와 복종 내지 존비의 신분적 질서를 중시하는 호주(戶主) 중심의 구(舊) 가족제도적 도덕관념을 배경으로 하여, 이에 기초한 가족간의 윤리 및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로 그것은 국민에 대하여는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 14조 1항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 헌법의 이념에 기초하여 행해진 쇼와 22년(1947년) 법률 제124호에 의한 형법의 일부개정과 함께 당연 삭제되었어야 할 규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직계존속과 비속은 통상 서로의 자연적 경애와 친밀한 정(情)에 의하여 맺어져 있고[각주:21], 동시에 자식이 부모를 중시하여 소중히 하는 것은 자식이 지켜야 할 도덕이지만, 그러나 그는 개인의 존엄과 인격의 평등이라는 원칙 위에 서서 자각하여 강요당하지 않는 도덕이어야 하며[각주:22] 당사자의 자발적인 준수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법률을 가지고 강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도덕적 규범이 법률적 규범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자식의 부모에 대한 위의 도덕은 법률을 가지고 강제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강제하는 것은 존속은 존속이라는 이유로 특히 이를 중히 하여야 한다고 하여 법률이 합리적 이유가 없는 일종의 신분적인 차별을 두는 것이므로,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헌법 14조 1항의 정신과 서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존속살(尊屬殺)이 되는 특별한 죄를 인정하여 그 형을 가중하는 형법 200조의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는 불합리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한다고 풀이하는 것이고, 그 법정형이 부당하게 무거운가 아닌가를 문제로 삼을 것 까지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4.
 또한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나는 존속에 대한 비속의 살해행위에 대하여만 그 형을 가중하는 형법 200조의 규정은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지만, 이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부부 상호간 및 부모자식[親子] 등의 직계 친족 상호간의 살해행위(배우자 살해, 부모 살해, 자식 살해 등)에 대하여 근친살(近親殺)이라는 특별한 죄를 두어 그 형을 가중하는 것은 그 가중의 정도가 합리적인 범위를 넘지 아니하는 한 반드시 위 헌법 조항에 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부언(附言)하고 싶다. 또한 그러한 규정을 두는 것의 요부(要否) 내지 적부(適否)에 대하여는 나는 소극적 의견이지만, 그것은 법률정책의 문제이다.


재판관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의 반대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는 헌법 14조 1항이 규정하는 법 앞에 있어서의 평등의 원칙을 낳은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처음부터 존속·비속의 친족적인 신분관계는 동조(同條)의 사회적 신분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이에 바탕하여 형법상의 차별을 두는 것의 당부(當否)는 원래 동(同) 조항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본 판결의 다수의견은 존속·비속의 신분관계에 기초한 형법상의 차별도 동(同) 조항의 의미에 있어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한다는 전제에 서서, 존속살해에 관한 형법 200조의 규정의 합헌성에 대하여 판단을 더하고 있으므로, 지금 나도 위의 점에 대하여 상론(詳論)함은 잠깐 접어두고, 만약 다수의견이 위의 전제에 서는 것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안이하게 동조(同條)의 합헌성을 부정하는 동(同) 의견의 결론에 찬성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하에 그 이유를 기술하고자 한다.

1.
 먼저 다수의견에 따라 형법 199조의 보통살해의 규정 외에 존속살해에 관한 형법 200조를 두는 것이 헌법 14조 1항의 의미에 있어서 차별적 취급에 해당한다고 풀이하는 경우, 동(同) 의견이 따르는 취급도 합리적인 근거를 갖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하여 존속살해에 관한 형법 200조는 이것이 즉시 위헌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 점은 상당히 사료(思料)하는 바이지만, 다수의견이 더욱 나아가 동조(同條)가 그 법정형이 극단적으로 중하게 되어 이미 합리적인 근거에 바탕한 차별적 취급으로 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하여, 따라서 동조(同條)는 헌법 14조 1항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하는 결론에 대하여는 나는 도저히 동조(同調)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위 점에 관한 다수의견의 골자는 존속살해에 대한 형법 200조가 정하는 형은 사형 및 무기징역형에 한하여 보통살해에 대한 동법(同法) 199조의 법정형에 비하여 형의 선택의 범위가 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 결과 존속살해를 범한 비속에 과할 수 있는 형의 범위도 저절로 한정되었으며 특히 어떠한 경우에도 집행유예를 붙일 수 없는 것이 되는 등 양형상 현저한 불편이 존재하는 것을 강조하여 그 법정형의 설정에 대하여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법정형을 어떻게 정할지는 본래 입법부의 재량(裁量)에 속하는 사항으로, 만일 기존 규정과 다른 규정과의 사이에 법정형의 불균형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원칙으로서 입법정책의 당부(當否)의 문제로 머무를 뿐 즉시 헌법상의 문제를 낳는 것이 아닌 것은 일찍이 당 재판소 쇼와 23년(1948년) (れ) 제1033호, 동년 12월 15일 대법정 판결·형집 2권 13호 1783항이 나타내는 바이다.

 그리고 다수의견이 이야기하는 대로 존속의 살해는 그 자체가 인륜(人倫)의 대본(大本)에 반하여 그 행위를 범한 자의 배륜이성(背倫理性)은 고도의 사회적·도의적 비난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형법 200조는 이러한 소위(所爲)를 통상의 살인의 경우보다 엄중하게 처벌하여 또한 강하게 이를 금압(禁壓)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 법정형이 특히 엄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하여야 한다. 생각건대 그러한 가치판단에서는 국민 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는 입법부가 법률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국민의 도덕·감정, 역사·전통, 풍속(風俗)·습관(習慣) 등 여러 면의 견지에서 많은 자료에 기초하여 충분한 토의(討議)를 거쳐 도달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실정법규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의 근본원칙인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취지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기 위하여, 재판소가 그러한 사항에 들어서는 것은 사법의 겸억(謙抑)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되는 우려가 있으므로 충분히 신중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여야 한다.

2.
 현 형법에 있어서 존속살해의 규정의 연혁을 되돌아보면 현행 형법은 이른바 구형법(舊刑法)[각주:23]을 개정한 것이지만, 그 개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일반적으로 법정형의 범위를 넓혀 재판관의 재량에 의한 타당한 형을 과(科)할 여지를 확대하는 것이며, 이러한 취지에 따르면 현행법(現行法)의 200조는 구법(舊法) 362조 1항이 존속살해의 형을 사형에 한하고 뿐만 아니라 그 365조가 위의 형에 대하여는 유서·불론죄(宥恕·不論罪:용서하는 것을 논하지 않는 죄), 즉 형의 감면 등에 관한 규정의 적용을 일절(一切) 금하고 있던 것을 바꾸어 존속살해의 법정형에 새로이 무기징역형을 더하고, 또한 감면규정 등의 적용도 가능하게 한 것으로서 구법(舊法)에 비하여 현저하게 형을 완화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제국의회 회의록에 따르면 일부의원에게서 효도의 장려를 위하여 법정형을 의연(依然:여전)히 사형만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이 있고, 장시간의 토의 끝에 드디어 이 주장을 물리치고 현행법의 성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형법 200조의 법정형은 극단적으로 무겁다고 하는 다수의견이 반드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연혁에 비추어 보아도 명확한 것으로 또한 동조(同條)를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볼 때 위헌이라고 한다는 그 결론도 전제를 결(缺)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다수의견도 지적하는 대로, 쇼와 22년(1947년) 제1회 국회에 있어서 형법의 규정을 신헌법(新憲法)의 이념에 적합하게 하기 위하여 그 일부개정이 행하여 졌을 때에도, 동법(同法) 200조는 일부러 그 개정으로부터 제외되었던 것이고, 위는 당시 입법부가 본조에 대하여 헌법에 적합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에 25년이 경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동안 다수의견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동조(同條)에 있어서 양형상의 곤란(困難)이 논의되었고 또한 동조(同條)의 위헌론까지 나타나 최근에는 동조(同條)의 삭제를 담은 개정형법 초안도 발표되는 것에 다다른 것은 사실이지만[각주:24], 오늘날까지 여전히 동조(同條)에 관한 입법상의 조치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입법부가 현시점에 있어서 동조(同條)의 합헌성은 물론 입법정책 당부(當否)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동조(同條)의 존치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해야 한다. 이러한 경위(經緯)를 고려한다면 사법의 겸억(謙抑)과 입법부의 판단의 존중의 필요는 형법 200조의 경우에 있어서 일단 더욱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다수의견의 이 점에 관한 판시는 극히 간단하여 “존속살해의 법정형은 존속에 대하여 경애(敬愛)와 보은(報恩)이라는 자연적 정애(情愛) 또는 보편적 윤리의 유지와 존중의 관점에 비추어도 이를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는 자의를 배제한 객관성 있는 결론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다수의견이 지적하듯이 존속살해의 중벌 규정이 시대에 따라 완화되고 있는 내외(內外)의 입법경향에 대하여는 나도 결코 눈을 감자고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장래의 입법론으로서는 나에게도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각주:25] 재판관으로서는 입법론을 말하는 입장이 아니며, 장래의 시기에 어떠한 존속살(尊屬殺) 처벌 규정을 제정 또는 개폐(改廢)해야 하는지의 판단은 모두 입법부의 재량(裁量)에 맡겨야 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사법의 기본법규인 형법의 중요규정에 대하여 전술(前述)한 연혁이 있는 것도 고려하지 않고, 전회(前回)의 개정에서 긴 시간도 지나지 않은 현재에 어째서 재판소가 갑자기 위헌의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지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또한 본판결에서는 존속살해를 중하게 처벌하는 형법 200조의 입법목적 자체를 위헌이라고 하는 의견도 붙어있으므로, 이 점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 싶다. 이는 동시에 동조(同條)의 법정형에 대하여 “충분히 납득할 만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논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부모자식의 관계는 사람의 지혜를 넘어선 지고(至高)하고 정묘(精妙)한 대자연의 은혜[惠]에 의해 발생하여 인류의 존속과 문명 전승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가장 존중해야 할 인간관계의 하나로서, 그 사이에 있어서, 자연의 정애(情愛)로 맺어진 질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고금동서가 달랐던 것이 아니다[각주:26]. 또한 자연발생적인 정애(情愛)에 따른 질서가 있는 인간관계가 존속·비속의 관계이며, 이를 옛날의 노예제나 귀족·평민의 구별, 또는 사농공상 사민(四民)의 제도의 시절, 헌법 14조 1항의 규정과는 분명 양립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인위적·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동일하게 논하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서 다수의견도 이야기하듯이 이러한 자연적 정애(情愛) 내지 보편적 윤리의 유지 및 존중의 관점에 서서 존속에 대한 경애·보은을 중시하여야 할 것이라는 그 점에 입각하여 입법상의 배려(配慮)를 마련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라고 할 바가 아니며, 그 구체화로서 현행의 형법 200조 정도의 법정형을 규정하는 것은 동조(同條)의 입법목적 실현의 수단으로서 결코 불합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에 대한 경애·존중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또한 합리적이어서 보편성을 갖는 것인 이상 형법 200조의 규정을 가지고 역사상의 한 시기에 있어서 존재한 것에 지나지 않는 봉건도덕을 새삼스레 고취하고 조장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논란(論難)할 필요가 없는 것은 많은 말을 요하지 않고, 또한 위 규정은 물론 부모에 대한 불효인 형사법상의 특별한 행위유형을 두어 그 위반을 처벌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효도’(孝道)를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말할 필요는 없다. 또한 형법 200조의 입법에 있어서 당초에 구(舊) 가족제도와의 관련이 고려되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는 것, 동조(同條)가 가족제도와 일체 불리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며, 특히 그러한 제도가 폐지된 신 헌법하의 오늘에 있어서 동(同) 제도와의 관련에서 발생하는 폐해에 대하여 굳이 우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친족관계 가운데 비속의 존속에 대한 관계만을 가지고 특별규정을 두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는 견해도 있으나, 같은 근친에 있어서도 부부상호간이나 형제자매간 등에 있어서 친애와 긴밀의 정(情)은 비속의 존속에 대한 보은, 존경의 마음과는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므로 간단하게 이를 동일시하여 논할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또한 본건에서 다투고 있는 것은 존속살해를 정한 형법 200조의 합헌성이기 때문에 이것이 합리적인 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점을 물으면 충분하므로, 다른 존속살해와 비슷하게 강한 비난을 받을 행위유형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는 본건의 논점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또한 다수의견은 형법 200조에 있어서 과형상의 곤란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확실히 현실의 사안에 관한 구체적인 판단을 임무로 하는 재판과 달리, 입법은 장래의 사상(事象)에 관한 예측에 입각하는 것이므로, 특수한 예외의 사안에 대하여 입법부가 책정(策定)한 실정법규를 가지고 적절한 양형에 곤란을 느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본건 또한 분명 그 예외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피고인이 처한 비참한 경우를 깊게 불쌍히 여기는 점에 있어서 나도 또한 결코 다른 사람에 비해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상(情狀)의 작량(酌量)은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행하는 것이 재판관의 직책이며, 그 범위 내에서 어떤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타당한 결과에 다다를 수 없는 경우가 생긴것이라면 이에 대하여는 현행법제에 있어서는 은사(恩赦)나 가석방(假釋放) 등 행정당국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므로, 다수의견과 같이 연민(憐憫)할 가치가 있는 피고인의 소위(所爲)로 또한 과형상에서도 난점이 있는 경우일지라도 즉시 그 처벌규정 자체를 위헌, 무효로 단정하는 것에 의하여 이에 대처한다는 것은 사리에 있어서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우려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
 마지막에 다나카 재판관은 그 의견 가운데 위헌입법심사권에 관한 나의 견해와 충돌하고 있으므로, 이 점에 대하여 더욱 보족(補足)하고 싶다. 나는 어떤 법률의 규정을 “입법부가 합헌이라고 판단한 이상 이에 대한 재판소의 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국회의 다수의 의견에 따라 제정된 법률인 것에 대하여는 항상 즉시 합헌이라고 단정한다”는 것도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헌법은 최고재판소에 대하여 일체의 법령 및 처분의 헌법에 적합하는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할 최종적 권한을 주고 있고(헌법 81조), 이 점에 있어서 사법은 입법 및 행정에 대하여 우위에 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나는 사법이 이러한 우위에 있기 때문에 재판소로서는 이러한 권한의 행사에 따라 신중 위에 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도덕적 규범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형법의 규정에 대하여 위헌심사를 행하는 것에 대하여는 재판소의 판단에 의하여 단지 해당 사안의 당사자의 이익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넓게는 세도(世道) 인심(人心)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가장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존속살해의 문제 이외에 이를테면 사형의 존폐, 안락사 방조의 가부(可否) 등 형법상의 제문제(諸問題)를 둘러싸고 내외에 많은 논의가 행하여지고 있으며, 안에서는 전후(戰後)의 사상적 혼란을 타고 지나친 의론(議論)이 행하여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시대에 형법의 관련 법규에 대하여 재판소가 위헌입법심사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하여는 무엇보다 시류(時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장기적인 시야에 서서 이들 법규의 배후에 흐르는 인류보편의 도덕원리에 깊이 생각하여 주도(周到:두루 이르는)와 동시에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요청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국민감정, 전통, 풍속(風俗), 습관(習慣) 등을 충분히 고려하고, 또한 종교, 의학, 심리학, 기타 여러 분야에 걸친 견해와 자료를 참작(參酌)하여 종합적으로 행할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넓게 국민 각층, 각계의 의견을 대표하여 반영하는 입장에 있는 입법부의 판단은 재판소로서도 충분히 이를 존중하는 것이 삼권분립(三權分立)의 근본취지에 적합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입법상의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 예견되지 않는 시기에 있어서라면 몰라도, 현재와 같이 법제심의회를 중심으로 하여 형법개정안 작성의 작업이 진척중이라면 이에 기초하여 멀지않은 장래에 정부 원안이 작성되고 국회제출이 진행되는 것이 예상되며, 또한 그러한 경우 이를 받은 입법부에 있어서 토의(討議)의 귀추를 아직 예견할 수 없는 시기에 있어서, 갑자기 재판소가 입법부의 검토에 예단(豫斷)을 주고 또는 입법에 먼저 끼어드는 것으로도 보여질 우려가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과연 사법의 겸억(謙抑)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것인지 깊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차제(次第)로 보아 결론으로서 나는 존속살해에 관한 형법 200조의 입법목적이 헌법에 위반한다고 하는 각 재판관의 의견(목적위헌설)에도, 또한 입법목적은 합헌이라고 하면서 그 목적달성의 수단으로서의 형의 가중방법이 위헌이라고 하는 다수의견(수단위헌설)의 어디에도 동조(同調)할 수 없는 것이며, 동조(同條)의 규정은 그 입법목적에 있어서도 그 목적달성의 수단에 있어서도 충분히 합리적 근거를 갖는 것으로서, 어떠한 헌법위반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건 상고 취의(趣意) 가운데 위헌을 말하는 점은 이유가 없는 것으로 사료(思料)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적법한 상고이유라고 할 수 없으므로 본건 상고는 이를 기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찰관 요코이 다이조(横井大三), 동 요코미조 준노스케(横溝準之助), 동 야마무로 아키라(山室章) 공판 출석


  쇼와(昭和) 48년 4월 4일
   최고재판소 대법정(大法廷)

    재판장 재판관 이시다 가즈토(石田和外)
        재판관 오스미 겐이치로(大隅健一郎)
        재판관 무라카미 도모카즈(村上朝一)
        재판관 세키네 고사토(関根小郷)
        재판관 후지바야시 에키조(藤林益三)
        재판관 오카하라 마사오(岡原昌男)
        재판관 오가와 노부오(小川信雄)
        재판관 시모다 다케조(下田武三)
        재판관 기시 세이이치(岸盛一)
        재판관 아마노 부이치(天野武一)
        재판관 사카모토 요시카쓰(坂本吉勝)


 재판관 다나카 지로(田中二郎), 동 이와타 마코토(岩田誠), 동 시모무라 가즈오(下村三郎), 동 이로카와 고타로(色川幸太郎)는 퇴관하였으므로 서명날인하지 않는다.

    재판장 재판관 이시다 가즈토(石田和外)



주석
  1. <FONT color=#009966>최대판<FONT color=#8e8e8e>(最大判:최고재판소 대법정 판결)</FONT> <SPAN style="COLOR: #009966">쇼와 45년 (あ) 제1310호·형집 27권 3호 165항</SPAN></FONT> [본문으로]
  2. 필자주<br /># 尊屬殺 : 존속살, 존속살인, 존속살해<br /># 普通殺 : 보통살인, 보통살해<br /># 親 : 부모<br /># 子 : 자식<br /># 法の下の平等 등의 표현은 원문 그대로 번역하자면 법 아래의 평등이 될 것이나, 이해를 돕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통용될 수 있는 법 앞의 평등이란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3. <SPAN style="COLOR: #009966">최대판 쇼와 37년 (オ) 제1742호, 쇼와 39년 5월 27일·민집 18권 4호 676항</SPAN> [본문으로]
  4. <FONT color=#009966>최판<FONT color=#8e8e8e>(最判:최고재판소 판결)</FONT> <FONT color=#009966>쇼와 30년 (あ) 제3263</FONT><FONT color=#009966>호,</FONT> <FONT color=#009966>쇼와 31년 5월 24일 제1소법정판결·형집 10권 5호 734항</FONT></FONT> [본문으로]
  5. <SPAN style="COLOR: #009966">최대판 쇼와 24년 (れ) 제2105</SPAN><FONT[ FONT 쇼와 footnote]최대판 제2105< (れ) 24년><FONT color=#009966>호, 쇼와 25</FONT><FONT color=#009966>년 10월 25일·형집 4권 10호 2126항.</FONT> [본문으로]
  6. <SPAN style="COLOR: #009966">최대판 쇼와 28년 (あ) 제1126</SPAN><FONT color=#009966>호, 쇼와 32년 2월 20일·형집 11권 2호 824항, </FONT><FONT color=#009966>쇼와 36년 (あ) 제2486호, 최판 쇼와 38년 12월 24일 제3소법정 판결·형집 17권 12호 2537항.</FONT> [본문으로]
  7. 현행 형법상 이는 외환유치죄<FONT color=#8e8e8e>(外患誘致罪)</FONT></FONT>를 제외하고 가장 무거운 것이다. [본문으로]
  8. 이는 다수의견이 말하는 것과 같이 “은의</FONT>”<FONT color=#8e8e8e>(恩義)</FONT>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9. <FONT color=#009966>형집 4권 10호 2037항.</FONT> [본문으로]
  10. 그 취지는 형법 200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고 풀이된다. [본문으로]
  11. <FONT color=#009966>형집 11권 2호 824항.</FONT> [본문으로]
  12. 행정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본문으로]
  13. 이하 묶어 부모와 자식으로 칭한다. [본문으로]
  14. 뿐만 아니라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한 뒤에는 친자의 관계는 대부분 분해되어 사회의 기초구조의 실질을 잃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과거 10년 사이의 이른바 핵가족의 격증은 구미<FONT color=#8e8e8e>(歐美)</FONT></FONT>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좋은가 나쁜가,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의 문제를 넘어선 현대사회의 필연적인 경향이다. [본문으로]
  15. 다수의견의 설시<FONT color=#8e8e8e>(說示)</FONT></FONT>는 지극히 간결하나 부연한다면 상술한 바일 것이다. [본문으로]
  16. 현행 민법이 모처럼의 개정임에도 불구하고, 존속비속의 호칭을 답습한 것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17. 이것이 헌법이 예정하는 친자관계일 것이다. [본문으로]
  18. 형법 200조가 그 하나이지만. [본문으로]
  19. 고대의 유교에서도 가르치는 효는 급부와 반대급부의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0. 형법 200조는 합헌이라고 하는 시모다 재판관의 반대의견에 대하여는 특히 언급하지 않더라도 상술<FONT color=#8e8e8e>(上述)</FONT></FONT>한 사견은 그에 대하여도 비판이 될 것이다. 시모다 재판관의 의견은 차별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도 재판소의 겸억<FONT color=#8e8e8e>(謙抑)</FONT>을 이야기하는 점에 있어서도 너무나 헌법의 원점<FONT color=#8e8e8e>(原點)</FONT>을 떠나있는 감이 있어 이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본문으로]
  21. 이 자연적 정애<FONT color=#8e8e8e>(情愛)</FONT></FONT>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다수의견과 같이 이와 동<FONT color=#8e8e8e>(同)</FONT> 의견의 이른바 존속에 대한 존중과 보은의 윤리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본문으로]
  22. "그것은 다수의견이 말하는 바와 같이 받은 은의<FONT color=#8e8e8e>(恩義)</FONT></FONT>에 대한 보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정<FONT color=#8e8e8e>(人情)</FONT>의 자연<FONT color=#8e8e8e>(自然)</FONT>에 기초한 심정<FONT color=#8e8e8e>(心情)</FONT>의 발로<FONT color=#8e8e8e>(發露)</FONT>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3. [본문으로]
  24. 그리고 위 초안은 지금 시안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본문으로]
  25. 현행 형법 200조에서 동조<FONT color=#8e8e8e>(同條)</FONT></FONT>의 법정형의 하한<FONT color=#8e8e8e>(下限)</FONT>인 무기징역형과 보통살해에 관한 동법<FONT color=#8e8e8e>(同法)</FONT> 199조의 하한<FONT color=#8e8e8e>(下限)</FONT>인 3년의 징역형의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적인 유기징역형을 추가설정하여 현행법의 존속살해 중벌을 다소 완화하여 과형상의 곤란을 해결하는 것은 입법론으로서는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바일 것이다. [본문으로]
  26. 그리고 그것은 의제적<FONT color=#8e8e8e>(擬制的)</FONT></FONT>인 친자관계<FONT color=#8e8e8e>(親子關係)</FONT>인 양친자관계<FONT color=#8e8e8e>(養親子關係)</FONT>, 나아가서는 배우자의 존속과의 관계에 대하여도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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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帝國憲法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 공포
메이지 23년(1890년) 11월 29일 시행


고문(告文)

천황 짐(朕)은 삼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신령께 고하노니, 천황 짐은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처럼 무궁한)의 광모(宏謨:큰 뜻)에 따라 유신(惟神:신령)의 보조(寶祚:보위)를 승계하고, 구도(舊圖:옛 뜻)를 보지(保持)하여 감히 실추(失墜)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살피건대 세국(世局:시국)의 진운(進運)에 응하고 인문의 발달에 따라, 가로되 황조황종의 유훈(遺訓)을 명징(明徵)하여 전헌(典憲)을 성립하고 조장(條章)을 소시(昭示:선포)하여, 안으로는 자손이 솔유(率由:따름)할 바로 하고 밖으로는 신민익찬(臣民翼贊)의 길을 넓히고, 영원히 준행(遵行:그대로 따름)하게 하여 더욱 국가의 비기(丕基:왕업)을 공고히 하여 팔주(八洲:일본) 민생의 경복(慶福)을 증진해야 할 것이므로 이에 황실전범(皇室典範) 및 헌법을 제정합니다. 살피건대 이는 황조황종께서 후예(後裔)에게 남기신 통치의 홍범(洪範)을 소술(紹述:이음)하는 것에 따라 짐이 몸소 체득하여 거행하는 것은 황조황종 및 우리 황고(皇考:선대 임금)의 위령(威靈)에 의자(倚藉:의지)하는 것에 그 연유를 두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황 짐은 우러러 황조황종 및 황고의 신우(神祐:도움)를 빌고 함께 짐이 현재와 장래에 신민을 솔선하고 또한 헌장(憲章)을 이행(履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원컨대 신령은 이를 살피소서.


헌법발포칙어(憲法發布勅語)

짐은 국가의 융창(隆昌)과 신민(臣民)의 경복(慶福)을 중심의 흔영(欣榮)으로 삼으며, 짐이 조종(祖宗)에게 받은 대권(大權)에 의해 현재와 장래의 신민에 대하여 이 불마(不磨)의 대전(大典)을 선포(宣布)한다.

살피건대 우리 조(祖)와 종(宗)께서는 신민(臣民)의 조선(祖先)의 협력(協力)과 보익(輔翼:보좌)에 의해 우리 제국을 조조(肇造:처음 만듦)하여 무궁히 드리웠다. 우리 신성한 조종의 위덕(威德)과 함께 신민이 충실히 용무(勇武)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순공(殉公)하였으므로 광휘(光輝)로운 국사(國史)의 성적(成跡)을 남긴 것이다. 짐은 우리 신민이 곧 조종의 충량(忠良)한 신민의 자손임을 회상(囘想)하고, 그 짐의 뜻을 봉체(奉體)하고, 짐의 일을 장순(奬順:따라 수행함)하고, 더불어 화충협동(和衷協同:마음을 합하여 협력함)하여 더욱 우리 제국의 광영(光榮)을 중외(中外)에 선양(宣揚)하고 조종의 유업을 영구히 공고하게 하려는 희망을 함께 하여 이 부담을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상유(上諭)

짐은 조종(祖宗)의 유열(遺烈)을 이어받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제위(帝位)에 올라, 짐이 친애하는 바의 신민이 곧 짐의 조종께서 혜무자양(惠撫慈養:사랑해 어루만지고, 자애롭게 기름)하신 바의 신민임을 헤아려, 그 강복(康福)을 증진하고 그 의덕(懿德:아름다운 덕)과 양능(良能)을 발달시키도록 하고, 또한 그 익찬(翼贊)에 의하여 함께 더불어 국가의 진운(進運)을 부지(扶持:도와 지탱하다)할 것을 바라며, 메이지(明治) 14년 10월 12일의 조명(詔命)을 이천(履踐:따름)하여 이에 대헌(大憲)을 제정하고 짐이 솔유(率由)하는 바를 밝히고, 짐이 후사(後嗣) 및 신민(臣民)과 신민의 자손되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순행(循行)하는 바를 알게 한다.

국가통치의 대권은 짐이 이를 조종에게서 이어받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바이다. 짐과 짐의 자손은 장래 이 헌법의 조장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을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짐은 우리 신민의 권리 및 재산의 안전을 귀중(貴重)하고 또한 이를 보호하며 이 헌법 및 법률의 범위 내에서 그 향유(享有)를 완전하게 할 것을 선언한다.

제국의회는 메이지 23년에 이를 소집하고, 의회 개회의 때를 이에 따라 헌법이 유효하게 하는 때로 한다.

장래 만일 이 헌법의 어떠한 조장(條章)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한 시의(時宜:마땅한 때)가 이르면 짐과 짐의 계통(繼統)의 자손은 발의(發議)의 권(權)을 가지며 이를 의회에 부치며, 의회는 이 헌법에서 정하는 요건에 의하여 의결하는 외에는 짐과 짐의 자손 및 신민이 엄하게 이의 분경(紛更:어지러이 고치다)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짐과 재정(在廷)의 대신은 짐을 위하여 이 헌법을 시행하는 임무를 가지며, 짐의 현재 및 장래의 신민은 이 헌법에 대하여 영원히 순종의 의무를 질 것이다.

어명어새(御名御璽)

메이지(明治) 22년 2월 11일

내 각 총 리 대 신  백작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추 밀 원   의 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외  무   대  신  백작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해  군   대  신  백작 사이고 주도(西鄉從道)
농 상 무  대  신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  법   대  신  백작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
대장대신 겸 내무대신  백작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육  군   대  신  백작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문  부   대  신  자작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체  신   대  신  자작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대일본제국헌법

제1장 천황(天皇)

제1조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天皇)이 이를 통치한다.

제2조
 황위(皇位)는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남자손(皇男子孫)이 이를 계승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總攬)하고 이 헌법의 조규(條規)에 따라 이를 행한다.

제5조
 천황은 제국의회(帝國議會)의 협찬(協贊)을 거쳐 입법권을 행한다.

제6조
 천황은 법률을 재가(裁可)하며 그 공포 및 집행을 명한다.

제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며 그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衆議院)의 해산을 명한다.

제8조
 천황은 공공의 안전을 보지(保持)하거나 그 재액(災厄)을 피하기 위하여 긴급한 필요에 따라 제국의회의 폐회의 경우에 법률을 대신하는 칙령(勅令)을 발한다.
 이 칙령은 다음 회기에 제국의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만일 의회에서 승락(承諾)하지 않는 때에는 정부는 장래에 향하여 그 효력을 잃음을 공포하여야 한다.

제9조
 천황은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安寧秩序)를 보지(保持)하고 신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명령(命令)을 발하거나 또는 발하도록 한다. 단 명령으로 법률을 변경할 수는 없다.

제10조
 천황은 행정각부의 관제 및 문무관의 봉급을 정하고 또한 문무관을 임면(任免)한다. 단 이 헌법 또는 다른 법률에 특례를 둔 경우에는 각각 그 조항에 따른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2조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 및 상비병액(常備兵額)을 정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하며, 제반의 조약을 체결한다.

제14조
 천황은 계엄(戒嚴)을 선포한다.
 계엄의 요건 및 효력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제15조
 천황은 작위(爵位)와 훈장(勳章) 기타의 영전(榮典)을 수여한다.

제16조
 천황은 대사(大赦)와 특사(特赦), 감형(減刑) 및 복권(復權)을 명한다.

제17조
 섭정(攝政)을 두는 것은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대권을 행한다.


제2장 신민권리의무(臣民權利義務)

제18조
 일본신민의 요건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19조
 일본신민은 법률과 명령이 정하는 바의 자격에 따라 균등하게 문무관에 임명되며 또한 기타의 공무(公務)에 취임할 수 있다.

제20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좇아 병역의 의무를 진다.

제21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좇아 납세의 의무를 진다.

제22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제23조
 일본신민은 법률에 따르지 않고서 체포(逮捕)나 감금(監禁), 심문(審問) 및 처벌(處罰)을 받지 아니한다.

제24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재판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25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허락 없이 주소(住所)의 침입을 받거나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한다.

제26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서(信書)의 비밀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제27조
 일본신민은 그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처분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28조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아니하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위배되는 한에서 신교(信教)의 자유를 가진다.

제29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언론과 저작, 인행(印行) 및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제30조
 일본국민은 상당한 경례(敬禮)를 지켜 따로 정하는 바의 규정(規程)에 좇아 청원을 할 수 있다.

제32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전시(戰時) 또는 국가사변(國家事變)의 경우에 따라 천황대권이 시행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제32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육해군의 법령 또는 기율(紀律)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군인에게 준용한다.


제3장 제국의회(帝國議會)

제33조
 제국의회는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의 양원으로 이를 성립시킨다.

제34조
 귀족원은 귀족원령(貴族院令)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족과 화족(華族) 및 칙임(勅任)된 의원으로 이를 조직한다.

제35조
 중의원은 선거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선된 의원으로 이를 조직한다.

제36조
 누구라도 동시에 양 의원(議院)의 의원(議員)이 될 수 없다.

제37조
 무릇 법률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칠 것을 요한다.

제38조
 양 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또한 각각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제39조
 양 의원의 한 쪽에서 부결된 법률안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제출할 수 없다.

제40조
 양 의원은 법률 또는 기타의 사건에 대하여 각각 그 의견을 정부에 건의(建議)할 수 있다. 단 채납(採納)되지 못한 것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건의할 수 없다.

제41조
 제국의회는 매년 그를 소집한다.

제42조
 제국의회는 3개월을 그 회기로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칙령(勅令)으로 이를 연장할 수 있다.

제43조
 임시긴급(臨時緊急)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상회(常會)의 외에 임시회(臨時會)를 소집할 수 있다.
 임시회의 회기를 정하는 것은 칙령에 의한다.

제44조
 제국의회의 개회 및 폐회와 회기의 연장 및 정회(停會)는 양원이 동시에 이를 행하여야 한다.
 중의원의 해산을 명받은 때에는 귀족원은 동시에 정회되어야 한다.

제45조
 중의원의 해산을 명받은 때에는 칙령으로 그 새로운 의원을 선거하게 하여 해산의 날로부터 5개월 이내에 이를 소집하여야 한다.

제46조
 양 의원은 각각 그 총 의원의 삼분의 일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의사(議事)를 열고 의결을 할 수 없다.

제47조
 양 의원의 의사(議事)는 과반수로 의결하며 가부동수인 때에는 의장이 결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48조
 양 의원의 회의는 공개한다. 단 정부의 요구 또는 그 원(院)의 의결에 따라 비밀회로 할 수 있다.

제49조
 양 의원은 각각 천황에게 상주할 수 있다.

제50조
 양 의원은 신민(臣民)이 정출(呈出)한 청원서를 받을 수 있다.

제51조
 양 의원은 이 헌법 및 의원법(議院法)이 정하는 이외에 내부의 정리(整理)에 필요한 제(諸)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제52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의원(議院)에 대하여 발언한 의견 및 표결에 대하여 원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단 의원(議員) 스스로 그 언론(言論)을 연설이나 간행, 필기(筆記) 또는 기타 방법으로 공포하는 때에는 일반(一般)의 법률에 따라 처분된다.

제53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현행범죄 또는 내란이나 외환에 관한 죄를 제외하고 회기 중에 그 원(院)의 허락 없이 체포(逮捕)되지 아니한다.

제54조
 국무대신(國務大臣) 및 정부 위원(委員)은 언제라도 각 의원(議院)에 출석하고 또한 발언할 수 있다.


제4장 국무대신 및 추밀고문(樞密顧問)

제55조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輔弼)하며 그 책임을 진다.
 무릇 법률이나 칙령(勅令) 기타 국무에 관한 조칙(詔勅)은 국무대신의 부서(副署)를 요한다.

제56조
 추밀고문(樞密顧問)은 추밀원 관제가 정하는 바에 따라 천황의 자순(諮詢)에 응하여 중요한 국무를 심의(審議)한다.


제5장 사법(司法)

제57조
 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법률에 따라 재판소가 이를 행한다.
 재판소의 구성은 법률을 따라 이를 정한다.

제58조
 재판관은 법률이 정하는 자격을 갖춘 자에 따라 이를 임명한다.
 재판관은 형법의 선고(宣告) 또는 징계의 처분에 따르는 외에는 직(職)을 면하지 아니한다.
 징계의 조규(條規)는 법률이 정하는 바를 따른다.

제59조
 재판의 대심(對審)이나 판결은 그를 공개한다. 단 안녕질서(安寧秩序) 또는 풍속(風俗)을 해할 염려 있는 때에는 법률에 따라 또는 재판소의 결의를 따라 대심의 공개를 정지(停止)할 수 있다.

제60조
 특별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경우는 다른 법률이 정하는 바를 따른다.

제61조
 행정관청의 위법처분에 따라 권리를 상해(傷害)한 경우의 소송으로서 다른 법률에 따라 정하는 행정재판소의 재판에 속하는 경우에는 사법재판소가 그를 수리하지 못한다.


제6장 회계(會計)

제62조
 새로운 조세(租稅)를 매기거나 세율(稅率)을 변경하는 것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단 보상(報償)에 속하는 행정상의 수수료(手數料) 및 기타의 수납금(收納金)은 전항에 따르지 아니한다.
 국채(國債)를 기채(起債)하거나 예산(豫算)에 정하는 것을 제외한 국고의 부담이 되는 계약을 하는 것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한다.

제63조
 현행의 조세는 새로 법률에 따라 이를 고치지 않는 한은 기존에 따라 이를 징수한다.

제64조
 국가의 세출(歲出)과 세입(歲入)은 매년 예산으로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한다.
 예산의 관항(款項)을 초과하거나 또는 예산 외에 생긴 지출이 있을 때에는 후일(後日) 제국의회의 승락(承諾)을 구할 것을 요한다.

제65조
 예산은 먼저 중의원에 제출하여야 한다.

제66조
 황실경비(皇室經費)는 현재의 정액(定額)에 따라 매년 국고에서 이를 지출하며, 장래 증액(增額)을 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제국의회의 협찬을 요하지 아니한다.

제67조
 헌법상의 대권에 기한 기정(既定)의 세출 및 법률의 결과에 따르거나 법률상 정부의 의무에 속하는 세출은 정부의 동의 없이는 제국의회가 이를 폐제(廢除)하거나 또는 삭감할 수 없다.

제68조
 특별한 수요(須要)로 인한 때에 정부는 미리 연한(年限)을 정하여 계속비(繼續費)로서 제국의회의 협찬을 구할 수 있다.

제69조
 피할 수 없는 예산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또는 예산 이외에 생긴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예비비를 둘 수 있다.

제70조
 공공의 안전을 보지(保持)하기 위하여 긴급의 수용(需用)이 있는 경우에 이를 내외의 정형(情形)으로 인하여 정부가 제국의회를 소집할 수 없는 때에는 칙령에 따라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따름은 다음의 회기에 제국의회에 제출하여 그 승락(承諾)을 구할 것을 요한다.

제71조
 제국의회에서 예산을 의정(議定)하지 않거나 또는 예산 성립에 이르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전년도의 예산을 시행할 수 있다.

제72조
 국가의 세출과 세입의 결산은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이 이를 검사하고 확정하며, 정부는 그의 검사보고와 함께 이를 제국의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회계검사원의 조직 및 직권(職權)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제7장 보칙(補則)

제73조
 장래 이 헌법의 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칙령(勅令)을 따라 의안(議案)을 제국의회에 부쳐야 한다.
 이 경우에 양 의원은 각각 그 총원(總員) 삼분의 이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의사를 열 수 없으며, 출석의원 삼분의 이 이상의 다수를 얻지 않으면 개정의 의결을 할 수 없다.

제74조
 황실전범(皇室典範)의 개정은 제국의회의 의결을 거침을 요하지 않는다.
 황실전범을 따라 이 헌법의 조규를 변경할 수 없다.

제75조
 헌법 및 황실전범은 섭정(攝政)을 두는 동안에 이를 변경할 수 없다.

제76조
 법률이나 규칙, 명령 또는 하등(何等)의 명칭(名稱)을 쓰는가에 얽매이지 않고 이 헌법의 모순(矛盾)되지 않는 현행의 법령은 모두 준유(遵由)의 효력을 가진다.
 세출상 정부의 의무에 관한 현재의 계약 또는 명령은 모두 제67조의 례(例)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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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은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 확립된 일본의 헌법 학설이다. 통치권(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독일의 공법학자 게오르그 옐리네크(Georg Jellinek)로 대표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국가주권설과 군주주권설·인민주권설

‘주권(이 경우에는 국가의 최고결정권을 지칭)은 누구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에 ‘군주’라고 대답하는 것이 군주주권설이며, ‘국민’ 또는 ‘인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국민주권설 또는 인민주권설이지만, ‘국가’라고 대답해 주권의 소재를 애매하게 만든 것이 국가주권설이다. 군주주권설과 국민주권설의 중간적 위치에 서서 양 학설을 절충한 이론이므로, 정치체제의 변화에서 온건하지만 진보적인 사상으로 널리 수용될 수 있다.


천황기관설의 역사

대일본제국헌법의 해석은 당초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호즈미 야쓰카(穂積八束) 등이 주창한 천황주권설이 지배적인 학설의 위치에서, 번벌(藩閥) 관료 세력의 전제지배(초연 내각)를 이론적인 면에서 지탱했다. 천황주권설은 주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학설로, 군주주권설이 일본에 적용된 형태이다. 또한 이러한 천황주권설은 궁극적으로는 천황의 선조(황조황종)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칙주권이라고도 불렸다(왕권신수설이 일본에 적용된 형태).

천황기관설의 시작 이러한 천황주권설에 대해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徳郎)는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귀속된다’고 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하여, 천황은 국가의 여러 기관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 천황기관설을 주창해 천황의 신격적 초월성을 부정했다. 이치키 교수가 도입한 국가법인설은 19세기 초기의 독일에서 인민주권설에 대응하여 군주주권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외견적 입헌군주제). 청일전쟁 이후에는 정당 세력과 타협을 꾀하고 있던 관료세력에게, 최고기관인 천황의 권한을 절대시한다는 이유로 중용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천황기관설은 이치키 교수의 제자이자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에 의해 의회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미노베는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의 독일의 군권 확대에 대한 저항 이론으로 국가법인설을 다시 이끌어 낸 옐리네크의 학설을 통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는 내각을 통해 천황의 의사를 구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은 정당정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론적 구성을 갖는다.[각주:1]

  • 국가는 하나의 단체로 법률상의 인격을 갖는다.
  •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속하는 권리다.
  • 국가는 기관에 의해 행동하며, 일본에서 그 최고기관은 천황에 해당한다.
  • 통치권을 행하는 최고권한인 주권은 천황이 갖는다.
  • 최고기관인 조직의 차이에 따라 정체가 구별된다.

다이쇼 시대 초기에는 호즈미 교수의 제자였던 도쿄제국대학 교수 우에스키 신키치(上杉慎吉)와 미노베의 논쟁이 일어난다. 서로 천황의 왕도적 통치를 이야기하지만, 우에스기는 천황과 국가를 동일시해 ‘천황은 자신을 위해 통치한다’거나 ‘국무대신의 도움 없이 통치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미노베는 ‘천황은 국가인민을 위하여 통치하는 것이지, 천황 자신을 위해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

이러한 논쟁 이후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사사키 소이치(佐々木惣一)도 거의 같은 학설을 따랐으며,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은 통설로 자리잡아갔다. 민본주의와 함께 의원내각제의 관행, 정당정치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유지하고, 미노베의 저서가 고등문관시험 준비의 필독서가 되면서 다이쇼 시대 중기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는 천황기관설이 국가가 공인한 헌법학설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같은 시기의 섭정이자 나중에 천황이 되는 쇼와 천황 또한 천황기관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미노베와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던 우익 사상가 기타 잇키도 한때는 천황기관설을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천황기관설 사건

군부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국체명징운동이 일어나고,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사실상 탄압되면서 천황기관설도 국체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격되기 시작했다.

1935년 2월 19일에는 귀족원 본회의에서 육군 중장 기쿠치 다케오(菊池武夫) 남작이 미노베 다쓰키치(당시 귀족권 칙선의원·도쿄제국대학 명예교수·제국학사원 대표·문관고등시험위원) 의원의 천황기관설을 가리켜, ‘완만한 모반이며, 명백한 반역’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미노베 의원을 가리켜 ‘학문을 이용하는 도둑’(学匪)이라거나 ‘모반인’ 등으로 맹비난했다.

이 연설을 계기로 군부와 우익 세력에서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월 25일에는 미노베가 천황기관설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한 ‘일신상의 변명’이라는 해명 연설을 발표하자, 회의장에서는 박수가 쏟아졌으며, 기쿠치 남작도 ‘이정도면 문제 없’다고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회의장 밖에서는 우익단체나 군인 단체가 소란을 피웠고, 개중에는 기관설을 오해해 ‘외람되게도 천황폐하를 기관총(기관차라는 설도 있음)에 빗대는 것은 무슨 일이냐’하며 격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노베의 해명 연설에도 불구하고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고, 연설내용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우익이나 군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야당과 정우회는 기관설론자였던 추밀원 의장 이치키 기토쿠로나 내각법제국 장관 가나모리 도쿠지로 등의 실각,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의 타도 등을 계획했다. 정부는 의회 폐회 후 군부대신의 요구에 따라 미노베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며, 출판법 위반을 명목으로 하여 《헌법촬요》나 《축조헌법정의》(逐条憲法精義), 《일본국헌법의 기본주의》의 3종의 저서를 발행금지 처분에 처했다. 또한 문교부는 ‘국체명징훈령’을 발표했으며, 곧 8월 3일과 10월 15일의 양회에 걸쳐 국체명징성명을 발표하여 통치권의 주체는 천황에게 있다고 발표했고, 천황기관설의 교수를 금지했다.

미노베는 내무성에 불경죄로 고발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담당한 검사는 물론 미노베의 저서를 통해 천황기관설을 배우고, 미노베가 시험관으로 있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가 된 사람이었다. 조사가 끝난 뒤, 미노베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9월 18일에 귀족원 의원을 사직했다. 다음해 미노베는 천황기관설에 반대하는 우익에게 폭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1937년, 문부성은 《국체의 본위》라는 책을 발행해 전국의 교육기관에 배포했다. 이 책은 일전의 국체명징성명을 바탕으로, 천황기관설은 서양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기관설 문제는 서양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부 지식인들의 폐풍에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

2006년, 미국의회도서관에서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헌법학자 19명에 대해 일본 문부성 사상국이 보복경고를 통해 전향이나 사상의 수정을 강요한 내용을 담은 기록이 발견되었다. 미국이 종전 이후 일본에서 접수한 〈각 대학에 있어서의 헌법학설 조사에 관한 문서〉로, 약 450쪽 분량이다. 개인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정부에 의한 사상통제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천황기관설의 사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 헌법 개정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천황기관설의 중추였던 미노베는 헌법 개정에 단호히 반대했지만, 정부나 여러 정당의 헌법 초안은 모두 천황기관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황을 최고기관으로 하지 않고, 국민주권의 원칙에 입각한 일본국 헌법이 성립하면서, 천황기관설은 헌법 해석 학설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1. 중의원헌법조사회 사무국이 작성한 〈메이지헌법과 일본국헌법에 관한 기초적 자료〉에서 인용·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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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 1873년 5월 7일 ~ 1948년 5월 23일)는 일본의 헌법학자이다. 천황기관설로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수학자인 기쿠치 다이로쿠의 장녀인 미노베 다미코이며, 장남 미노베 료키치는 도쿄 도지사를 지냈다.

효고 현에서 한방의사였던 미노베 슈호(美濃部秀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천황기관설을 주창했던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徳郎)의 제자로 지내다가 졸업했다. 내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899년에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1900년에 도쿄제국대학의 동교수가 되었다. 1902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이때의 제자로 공법학자 다가미 조지가 있다.

1912년에 발표한 《헌법강화》(憲法講話)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있다고 하는 독일의 게오르그 옐리네크의 국가법인설에 근거한 천황기관설을 발표했다. 이후 호즈미 야쓰카의 후계자로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천황주권설을 주장한 우에스기 신키치와 논쟁을 전개했다. 이즈음 천황기관설은 학계와 정계 등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국가공인의 학설처럼 되어갔다.

1932년에는 학사원 대표의 칙선의원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34년에 국체명징운동이 일어나면서, 천황기관설이 배격되기 시작하였다. 1935년의 귀족원 본회의에서 기쿠치 다케오 의원이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자, 군부나 우익 등에서 천황기관설과 미노베 다쓰키치에 대한 배격이 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미노베는 ‘일신상의 변명’ 이라 불리는 해명을 했지만, 저서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했고, 불경죄 의혹으로 조사를 받아, 귀족원 의원을 사퇴하게 되었다(천황기관설 사건). 천황주권을 외친 우에스기 신기치는 1929년에 사망했지만, 국체명징성명등을 통해 천황기관설 대신 천황주권설이 공인되었다. 미노베는 1936년, 천황기관설 사건에 분개한 우익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헌법 개정에 대한 움직임이 높아지면서, 내각의 헌법문제조사회 고문이나 추밀고문관 등으로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국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한 헌법개정은 국체의 변경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구 자유주의자의 한계’라고 불렸다. 국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한 일본국 헌법이 성립하면서, 천황기관설은 학설로서의 운명을 마쳤다.

미노베는 헌법 개정 권력은 헌법의 근본규범에 대한 개정권은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일본제국 헌법과 일본국 헌법의 연속성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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