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종御製문/2. 소설편(小說篇)'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6.02.26 담임꽃 (2)
  2. 2005.11.28 학교칠우쟁론기(學校七友爭論記)
  3. 2005.08.15 황천(黃天)
  4. 2005.08.06 급장전(級長傳)
  5. 2005.07.03 운수 좋은 날
담임꽃

오늘도 또 우리 학생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원서를 쓰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네이스로 접속하려니까 메신저에서 찌르릉 찌르릉 하고 창의 잡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창을 바꿔 보니 아니나 다르랴 교감이 또 얼리었다.

점선생반 학생(언수외가 잘뜨고 똑 스카이가게 생긴 놈)이 언수외 낮은 우리 학생을 2순위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2년제 하고 점수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지방대하고 내신을 쪼았다.

[중략]

나흘 전 고대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여선생이 원서을 내러 가면 갔지 남 원서 내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고대내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체만척체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선생이 남 일하는 놈 보구….

"그럼 혼자 내지 떼루 내듸?"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내신 계산하기 좋니?"

또는,

"2학기 성적이나 나오거든 하지 벌써 수시를 쓰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등록 요강이 풀리더니 이 놈의 여선생이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네이스를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프린터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뽑았는지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배치표 세 장이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반엔 샤대 없지?"

하고 생색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테니 여기서 얼른 원서를 써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모의지원이 잘 맞는단다."

"난 모의지원 안써준다. 너나 써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배치표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학교에 들어온 것은 근 삼년째 되어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선생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배치표를 다시 집어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제 자리로 횡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교감이이,

"너 얼른 원서를 써 줘야지?"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쓸 때 되면 어련히 쓸라구!"

이렇게 천연덕스레 받는 점선생었다. 본시 부끄럼을 타는 계집애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등어리를 파이프로 한번 모질게 후려쌔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배치표를 안 받아보는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반엔 샤대 없지.'는 다 뭐냐. 그러잖아도 저희는 특반이고 우리는 그 반에서 남은 학생을 나눠 쌈을 붙이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중략]

"예이 낮다! 낮다!"

"낮은 걸 널더러 입때 끼고 있으랬니? 망할 여선생 같으니"

하였다. 그리고 나의 등뒤를 향하여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이 바보 담임아!"

"애! 너 무능담탱이지?"

그만도 좋으련만,

"얘! 너 느 반 실장이 2년제라지?"

"뭐 울 실장이 그래 2년제야?"

할 양으로 열벙거지가 나서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더니 그때까지 모니터 위로 나와 있어야 할 점선생의 대가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다 돌아서서 오자면 아까에 한 욕을 모니터 옆으로 또 퍼붓는 것이다. 욕을 이토록 먹어 가면서도 대거리 한 마디 못하는 걸 생각하니 책상끝에 채이어 발톱 밑이 터지는 것도 모를 만큼 분하고 급기야는 두눈에 눈물까지 불끈 내솟는다.

그러나 점선생의 침해는 이것뿐이 아니다.

[중략]

"이놈아! 너 왜 남의 원서를 찢어 버리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반 원선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봉급이 떨어지고 자리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선생이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원서 찢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오엠알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선생! 점선생! 이년이 자습 감독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교감이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선생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복도를 살금살금 기어서 교무실로 내려간 다음 나는 도서관을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자습실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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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학교 칠우는 학교 교실 가온데 일곱 벗이니 수업하는 선생는 백묵(白墨)과 칠판, 지우개로 수업사우(授業四友)를 삼았나니 교실 학생인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오. 이러므로 학습 돕는 유를 각각 명호를 정하여 벗을 삼을새, 하이테크로 하이텍씨(廈離宅氏)라 하고, 수학의 정석으로 정석(定石)양반이라 하고, 개념원리를 개념탑재선생(槪念搭載先生)이라 하고, 성문영어로 성문지재(成文之材)라 하고, 누드교과서로 나체박사(裸體博士)라 하고, 모나미펜으로 일오삼선생(一五三先生)이라 하며, 모의고사로 대성중앙종로정일 사선생(四先生)이라 하여, 칠우를 삼아 학교 교실내 아츰 소세를 마치매 칠위 일제히 모여 종시 하기를 한가지로 의논하여 각각 소임을 일워 내는지라.

일일(一日)은 칠위 모혀 학습의 공을 의논하더니 하이텍씨가 긴 허리를 자히며 이르되,

"제우(諸友)는 들으라. 나는 에이포지(十六絶紙), 교과서, 연습장, 공책, 프린트물(遺認物), 요점정리를 다 내여 펼쳐 놓고 필기를 마련할 새, 흑백청홍(黑白靑紅)이며 공식(供識) 지도(地圖)를 나 곧 아니면 어찌 적으리오. 이러므로 학지공(學之功)이 내 으뜸되리라."

정석양반, 껍질을 훌떡 벗고 퍼런 속을 드러내며 이르되,

"하이텍씨야 그대 아모리 필기를 잘 한들 정석 내지 아니하면 점수 제되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마라."

개념탑재선생 이르되,

"양우(兩友)의 말이 불가하다. 공식 열몇이든 적용 후에 공식이라 할 것이니 공식에 능소능대 (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개념탑재를 어찌 하리오. 이문제 저문제 심화문제 신유형 개념을 이루미 나의 개념이면 마음대로 하리오. 하이텍씨의 필기 내고 정석 양반 공식 세워 내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삼 공이라 자랑하나뇨."

성문지재 얼골이 프르락희락 하야 노왈,

"개념아, 네 공이 내 공이라. 자랑마라. 네 아모리 잘난 체하나 수학만 만점인들 내 아니면 네 어찌 성공하리오."

나체박사 웃고 이르되,

"지재님네, 위연만 자랑마소. 이 젊은이 수말 적기로 학생들 사탐과탐 가볍지 아니하게 자습 도와 드리나니, 고어에 운(云) 탐구 이백 만점이 될 지언정 언수외 삼백점 만점은 되지 말라 하였으니, 성문지재는 개념탑재선생의 뒤를 따라 다니며 무삼 말 하시나뇨. 실로 얼골이 아까왜라. 나는 매양 정석의 똑같은 내용에 질리었으니 낯가족이 두꺼워 견딜 만하고 아모 말도 아니 하노라."

일오삼선생 이르되,

"그대네는 다토지 말라. 나도 잠간 공을 말하리라. 정석쓴 놈, 개념 쓴 놈, 누드교과서 쓴 놈, 그 놈들이 나 곧 아니면 어찌 펜 없을 때 배우리오. 연필 짧아진 것도 내의 머리를 한번 떼어내면 짧은 흔적이 감초여 하이텍씨의 공이 날로 하여 광채 나나니라."

사선생 크나큰 입을 버리고 너털웃음으로 이르되,

"일오삼선생아, 너와 나는 소임 같다. 개념이나 정석은 수리뿐이라. 나는 천 만 가지 과목에 아니 참예하는 곳이 없고 가중한 학생들은 하로 할 일도 열흘이구기여. 내신이 주역주역한 것을 내의 광둔(廣臀)으로 한 번 쓰치면 점수오답 낱낱이 펴이며 수능과 성적이 고하지고 더욱 수능 한달 전을 만나면 소님이 다사하야 일일도 한가하지 못한지라. 학생이 나 곧 아니면 어찌 성적을 가늠하며 더욱 공부하는 놈들이 게을러 벼락치기 하는 것을 나 아니면 어찌 파악하며, 세상 학생 어찌 배치표를 보리오. 이러므로 작의 공이 내 제일이 되나니라."

교실 학생이 이르되,

"칠우의 공으로 학습을 다스리나 그 공이 학생의 쓰기에 있나니 어찌 칠우의 공이라 하리오."

하고 언필에 칠우를 밀치고 교과서를 돋오고 잠을 깊이 드니 하이텍씨가 탄식고 이르되,

"매야 할 사람이오 공 모르는 것은 학생이로다. 잉크 다 쓰고 버려내면 자기 공이라 하고, 내 심이 아작나면 무조건 내 탓이라 하니 어찌 야속하고 노흡지 아니리오."

정석 양반 이어 가로대,

"그대 말이 가하다. 공식 정리할 때는 나 아니면 못하려마는 지겹니 두껍니 하고 내어 던지며 표지를 각각 잡아 흔들 제는 토심적고 노흡기 어찌 측량하리오. 내 공을 모르니 어찌 애원하지 아니리오."

개념탑재선생 한숨 지고 이르되,

"너는커니와 내 일즉 무삼 일 사람의 손에 보채이며 요악지성(妖惡之聲)을 듣는고. 각골 통한(刻骨痛恨)하며, 더욱 나의 해답지 안사고 해설 없음을 욕하며 휘드르며 내가 힘껏 수리영역을 돕는 줄은 모르고 마음 맞지 아니면 책의 중간를 브르질러 재활용수거함에 넣으니 어찌 통원하지 아니리요. 사람과는 극한 원수라. 갚을 길 없어 이따감 문제를 꼬아두면 속이 좀 시원하나, 더욱 애닯고 못 견디리로다."

나체박사 눈물지어 이르되,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삼 죄로 나체 이름을 입어 선생마다 내 이름 망측하기를 욕하니 섧고 괴롭기 칙량하지 못할레라."

일오삼선생 척연 왈,

"그대와 욕되기 한가지라. 내 머리를 열고 속을 빼고, 우겨 누르니 황천(皇天)이 덮치는 듯 심신이 아득하야 내의 목이 따로 날 적이 몇 번이나 한 동 알리오."

칠우 이렇듯 담논하며 회포를 이르더니 자던 학생 믄득 깨쳐 칠우다려 왈,

"칠우는 내 허믈을 그대도록 하느냐."

사선생 고두사왈(叩頭謝曰),

"저렴한 것들이 망녕되이 헴이 없는지라 족가지 못하리로다. 저희들이 재죄 있이나 공이 많음을 자랑하야 원언(怨言)을 지으니 마땅 결곤(決棍)하암즉 하되, 평일 깊은 정과 저희 조고만 공을 생각하야 용서하심이 옳을가 하나이다."

학생 답왈,

"사선생 말을 좇아 물시(勿施)하리니, 내 내신을 망쳐도 선생에게 성함이 모의고사 공이라. 은혜를 잊지 아니하리니 파일을 지어 그 가온데 넣어 서랍에 지녀 서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선생은 고두배사(叩頭拜謝)하고 제붕(諸朋)은 참안(慙顔)하야 물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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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난 여름날, 아침부터 아내가 긁는 바가지에 쫒겨난 김은 오늘도 미쓰코씨 앞을 떠돈다. 9원에 산 10년차 낡은 공단 양복에 헐어빠져 이제는 회색으로 보이는 구두를 신고, 주머니에 든 단돈 70전을 손에 꼭 쥔다. 오늘은 화신백화점으로 갈까, 경성역으로 갈까. 그의 발이 휘청하며 고인 흙탕물을 밟고 자빠진다. 첨벙. 길 가던 사람 몇이 잠깐 쳐다보더니 우스운 듯 피식 웃고는 제 갈길 간다. 아침부터 젠장맞을 날이었다. 정신을 차린 김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나 물을 털어본다. 영락없이 물에 젖은 새앙쥐 꼴이다. 이래서는 경성역이든 어데든 갈 수 없다. 에잉, 재수도.

싸구려구만. 3원 이상은 못 쳐주겠다는 전당포 주인에게 고향의 모친이 마지막으로 사준 유품 같은 양복이라며 엉겨 붙은 덕일까, 3원 20전 쳐주고 2원짜리 쥐색 양복을 하나 사기로 한다. 김의 행색은 영락없이 공사판 노동자가 안 입던 양복을 입고 나온 꼴이다. 소매는 죽 삐져나와 덜렁거리고, 바지 끝은 구두에 끌린다. 별 수 있나, 그게 값이 제일 헐은걸세. 대꾸도 못한다. 별 수 있나. 김은 다시 걷는다. 갈림길이다. 이리가면 화신백화점이고, 저리가면 황금정인가? 동척을 따라서는 가본 일이 없기에 알 수 없다. 화신백화점 쪽으로 걷는다. 자꾸 신문 돌리는 애가 오른쪽으로 부딪힌다. 한번만 더 부딪히면 고놈의 신문을 다 불살라 버릴테다. 입에 풀을 칠했나. 김은 자꾸 입 속으로 말을 되뇌이지만, 내뱉지는 못한다. 어느새 경성역이다. 자네는 경성역 커피를 먹어 본 일이 있는가? 아니지, 아니지. 조선은행 앞의 그 다방커피와는 비할 바가 못되네. 다방 커피가 우물에서 길어온 물이라면 경성역 커피는 펌쁘에서 퍼 올린 물일세. 소설 나부랭이를 쓴다는 구보라는 작자가 말했던가. 김의 생각에는 우물물이나 펌쁘물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서도 뭔가 다른 것이 있으니까 조선은행 앞 다방거리의 아침부터 커피한잔 시켜놓고 앉아서 예술이 어쩌니 하던 하이카라의 모던한 청년들이 모두 경성역으로 몰려갔으리라. 하지만 김에게는 경성역에서 커피를 마실 돈이 없다. 아니 돈은 있다. 그것도 1원 90전이라는 거금(어디까지나 김에게뿐이지만)이 손에 있는데 경성역의 그깟 커피 한 잔 못 마시랴. 하지만 김은 거금(이것도 어디까지나 김에게만)을 투자하면서 경성역의 커피를 마실만큼 큰 배포는 가지지 못했다.

20분쯤 걸었나. 화신백화점이다. 화신백화점의 즐거운 분위기를 느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오늘도 들어갈 용기는 차마 나지 아니한다.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하던 김은 그대로 보신각 끄트머리에 주저앉는다. 전차가 지나간다. 인력거가 지나간다. 지나가던 아해는 꽥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그 자리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아니한다.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를 다그치다 뺨을 후려갈긴다. 호외가 돈다, 신문이 돈다, 하늘이 돈다. 하늘이 노랗다. 1원 90전 짜리 부자 김씨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본다. 황천(黃天)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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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어(天漁)


급장이란, 반장(班長)들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2학년에 한 급장이 살았다. 이 급장은 어질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매양 담임이 새로 부임하면 으레 몸소 그 교무실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이 급장은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학교의 급식비 지원을 타다 먹은 것이 쌓여서 천 끼에 이르렀다. 교육청 감사(監使)가 각급학교(各級學校)를 순시하다가 그 학교에 들러 급식의 장부를 열람하고 대노해서,

“어떤 놈의 작자가 이처럼 급식을 축냈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해서 그 급장을 잡아 가두게 했다. 담임은 그 급장이 가난해서 갚을 힘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차마 가두지 못했지만 무슨 도리가 없었다.

급장 역시 밤낮 울기만 하고 해결할 방도를 차리지 못했다. 그 학모(學母)가 역정을 냈다.

“너는 평생 모의고사만 좋아하더니 학교의 급식비를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구나. 쯧쯧 실장, 실장이란 한 푼어치도 안 되는 걸.”

그 학교에 사는 한 학생이 가족들과 의논하기를,

“급장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항상 비천(卑賤)하지 않느냐. 대의원회의도 못하고, 급장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해야 하고, 엉금엉금 가서 청소당번 지시를 받는데, 빗자루를 땅에 대고 실내화로 기는 등 우리는 노상 이런 수모를 받는단 말이다. 이제 그 급장이 가난해서 타먹은 급식비를 갚지 못하고 시방 아주 난처한 판이니 그 형편이 도저히 급장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장차 그의 급장을 사서 가져보겠다.”

학생은 곧 급장을 찾아가 보고 자기가 대신 급식비를 갚아 주겠다고 청했다. 급장은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그래서 학생은 즉시 급식비을 은행에 가져가서 급장의 스쿨뱅킹에 넣었다.

담임은 급장이 급식비를 모두 갚은 것을 놀랍게 생각했다. 담임이 몸소 찾아가서 급장을 위로하고, 또 급식비를 갚게 된 사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급장이 빗자루를 들고 교실을 쓸고 짧은 걸레를 빨고 창문에 엎드려 ‘학생’이라고 자칭하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지 않는가. 담임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부축하고,

“너는 어찌 이다지 스스로 낮추어 욕되게 하는가?”

하고 말했다. 급장은 더욱 황공해서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엎드려 아뢴다.

“황송하오이다. 본 학생이 감히 욕됨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오라, 이미 제 급장을 팔아서 급식비를 갚았읍지요. 학교의 부자 학생이 급장이올습니다. 제가 이제 다시 어떻게 전의 급장을 모칭(冒稱)해서 급장 행세를 하겠습니까?”

담임은 감탄해서 말했다.

“모범생이로구나 학생이여! 급장이로구나 학생이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운 일이요, 남의 어려움을 도와주니 어진 일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사모하니 지혜로운 일이다. 이야말로 진짜 급장이로구나. 그러나 사사로 팔고 사고서 증서를 해 두지 않으면 송사(訟事)의 꼬투리가 될 수 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해서 학생으로 증인을 삼고 임명장을 만들어 미덥게 하되 본 교사가 마땅히 거기에 서명할 것이다.”

그리고 담임은 교무실로 돌아가서 학교 안에 대의원(代議員) 들을 모두 불러 교정(校庭)에 모았다. 학생은 단상의 오른쪽에 서고, 급장은 단상의 아래에 섰다.

그리고 임명장을 만들었다.

위에 명문(明文)은 급장을 팔아서 급식비를 갚은 것으로 그 값은 천 끼분이다.
오직 이 급장은 여러 가지로 일컬어지나니, 글을 읽으면 가리켜 학습도우미라 하고, 학생회에 나아가면 대의원이 되고, 학식이 있으면 모범생이다.

야비한 일을 딱 끊고 담임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다섯시만 되면 일어나 교실에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눈은 가만히 책을 보고 발꿈치를 교실바닥에 모으고 앉아 수학정석(數學定石)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뎌 입으로 답만 부르는 짓을 하지 아니하되, 암산·풀이를 한다. 소매자락으로 책상을 쓸어서 먼지를 털어 물결 무늬가 생겨나게 하고, 발표할 때 허리를 굽히지 말고,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고, 소리를 길게 뽑아서 학생을 부르며, 걸음을 느릿느릿 옮겨 슬리퍼를 땅에 끈다. 그리고 성문영어(成文英語), 이비애수(理非哀愁)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공책 한 페이지에 백 자를 쓰며, 오직 총무회계를 시키며 손에 돈을 만지지 말고, 특기적성비를 묻지 말고, 더워도 양말을 벗지 말고, 밥을 먹을 때 옆으로 급식소에 앉지 말고, 아이스크림을 먼저 훌쩍 훌쩍 먹지 말고, 무엇을 후루루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지 말고, 음주를 하지 말고, 우유를 들이켠 다음 입술을 쭈욱 빨지 말고, 담배를 피울 때 교복에 냄새가 배게 하지 말고, 화난다고 교실벽를 발로 차지 말고, 성내서 펜을 내던지지 말고, 아이들에게 주먹질을 말고, 교실 빗자루를 괜히 뜯어 버리지 말고, 교실 컴퓨터를 욕하되 관리담당을 욕하지 말고, 아파도 보건실에 가지 말고, 조회 할 때 대리을 청해다 앞에 세우지 말고, 추워도 난로에 불을 쬐지 말고, 말할 때 이 사이로 침을 흘리지 말고, 게임을 말고, 돈을 가지고 판치기를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급장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임명장을 가지고 행정실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

담임 2학년 모반 누구. 행정실장 학년부장 증서(證書)


이에 연구부장이 탁탁 학교장 직인을 찍어 그 소리가 엄고(嚴鼓) 소리와 마주치매 학교마크가 종으로, 학교 도장이 횡으로 찍혀졌다. 학생은 교무부장이 임명장을 읽는 것을 쭉 듣고 한참 머엉하니 있다가 말했다.

“급장이라는 게 이것뿐입니까? 나는 급장이 신선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는 걸요. 원하옵건대 무어 이익이 있도록 임명장을 바꾸어 주옵소서.”

그래서 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교장이 학교를 세울 때 학생을 넷으로 구분했다. 학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학생회 임원이니 이것이 곧 급장이다. 급장의 이익은 막대하니 청소도 안 하고 명상의 노트도 작성 않고 약간 공식을 섭렵해 가지고 크게는 수시 합격이요, 작게는 정시 가산점이 되는 것이다. 실장의 임명장은 길이 20센치 남짓한 것이지만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수시자루인 것이다. 리더십특기자가 날 칠월에 처음 수시 1차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 있는 합격자가 되고, 잘 되면 SKY로 일류대를 맡게 되어, 집에 가는 시간이 세시가 되고, 수업시간에 운전면허 준비를 하며, 교실에는 책상이 만화책으로 가득차고, 사물함에 판타지 소설을 기른다. 궁한 실장이 교실에 묻혀 있어도 무단(武斷)을 하여 이웃의 펜을 끌어다 먼저 자기 노트 필기를 하고 교실의 청소당번을 잡아다 자기 책상 밑의 쓰레기를 치우게 한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랴. 너희들 코에 피크닉을 들이붓고 가방 끄덩을 희희 돌리고 필통을 낚아채더라도 누구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학생은 임명장를 중지시키고 혀를 내두르며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나를 장차 정치인으로 만들 작정인가.”

하고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학생은 평생 다시 급장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다.


<천어집天漁集>


▶ 핵심 정리
갈래 : 한글 소설. 단편 소설. 풍자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발단 - 전개 - 결말의 3단 구성
문체 : 번역체. 산문체. 문어체
배경 : 시대적(현대). 공간적(학교). 사상적(천어사상)
주제 : 실장들의 공허한 관념, 비생산적, 특권 의식에 대한 비판

▶ 작품 해설
천어의 소설 중에서 그의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고학년 후기 실장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여기서 풍자의 일차적인 대상은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학생회 임원이다. 그리고 실장의 참된 도리를 생각하지 못한 채, 실장 신분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학생의 망상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은 투철한 천어 정신의 표현일 뿐 아니라, 문학이 경험적 사실성을 넘어서는 허구의 장치를 통해서도 진실을 드러낸다는 좋은 본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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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 원작 : 현진건 )


새침하게 흐린 서버가 다운이 올 듯하더니, 다운은 아니 오고 걸리다가 만 렉이 추적추적 걸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닭홈 안에서 블로그꾼 노릇을 하는 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블로그 안에(거기도 블로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네티즌을 주소 붙여넣기 해 준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대화방에서 어정어정하며 들어오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백수인 듯한 네티즌을 블로그 주소를 불러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킬로바이트, 둘째 번에 오십킬로바이트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방문자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삼십킬로바이트짜리 구글광고 클릭, 또는 오십킬로바이트 구글광고가 찰깍하고 구글 계수기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킬로바이트라는 구글광고 클릭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블로그에 트래픽도 늘릴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안 좋은 서버에 베이직 계정도 한번 질러 줄 수 있음이다.

그의 블로그가 트래픽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포스팅 하기를 밥먹다시피 하는 형편인데도 물론 유료계정 하나 써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계정이란 놈에게 돈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지른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중증은 중증인 듯. 렉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음악 포스팅을 먹고 체한 때문이다. 그때도 김첨지가 오래간만에 MP3파일을 얻어서 포스팅 하나와 십 메가 짜리 파일 한 개를 올려 주었더니 김첨지의 말에 의하면 오라질 네티즌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서버에 대고 주소를 쳤다 마음은 급하고 로딩은 닿지 않아 채 로딩도 안된 것을 그 오라질 네티즌이 기다림은 고만두고 마우스를 움켜서 새로고침이 문드러지도록 클릭질하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렉이 땅긴다, 트래픽이 켕긴다 하고 눈을 홉뜨고 지랄을 하였다. 그때 김첨지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 서버, 무료는 할 수가 없어, 방문자 없어 폐쇄, 방문자 많아 렉, 어쩌란 말이야! 왜 로딩을 바루 하지 못해!"

하고 모니터의 옆을 한 번 후려갈겼다. 김의 눈시울이 뜨끈뜨끈하였다. 블로그가 그러고도 지르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베이직 계정이 지르고 싶다고 김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블로그! 무료도 못 먹는 블로그가 베이직은. 또 지르고 지렉병을 하게."

라고 주소창엣다 쳐보았건만, 못 지르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베이직을 질러 줄 수도 있다. 버벅대는 블로그 곁에서 글 달라고 보채는 방명록에게 방명록을 써 줄수도 있다. ---팔십 킬로바이트을 손에 쥔 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대화방 문을 돌아 나올 때였다. 작은 창에서 "김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학생인 줄 김은 한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다짜고짜로,

"당신 블로 주소가 뭐요?"

하고 물었다. 아마도 기숙사에 있는 이로 심심함을 이용하여 접속하려 함이로다. 오늘 보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주소는 모르고 주인은 있고 해서 어찌 할 줄 모르다가 마침 김을 보고 불렀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블로그에 그를 채 적지 못해서 질질 빼먹고, 비록 '메모 보내기' 팝업일망정 굴림체 10으로 김을 불렀음이랴.

"제 블로그 주소 말씀이십니까아?"

하고, 김은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무료계정에 그 트래픽을 칠벅거리고 늘리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FTP를 나올제 제 블로그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블로그는 그 주소만 남은 계정에 유월의 샘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푹한 tt폴더에다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광고 걸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렉 풀리기나 기다려요. 내가 이렇게 버벅대는데……."

하고 모기 소리같이 소리를 내며 팝업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래도 김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블로그. 빌어먹을 팝업을 다 띄우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블로그는 붙잡을 듯이 팝업을 내저으며,

"광고걸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찍이 걷어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블로그 주소를 달란 말을 들은 순간에 경련적으로 떠는 팝업, 유달리 큼직한 인덱스, 울 듯한 블로그의 배너가 김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블로그 주소가 뭐란 말이요?"

하고 학생은 초조한 듯이 김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

"알비 문게이트가 열한 시에 있고, 그 다음에는 새로 두 시이던가."

라고 중얼거린다.

"http//kim.darkhome.co.kr/index.php?page=6."

이 말이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김첨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페이지에 놀래었다. 한꺼번에 이런 광고 많은 페이지를 불러라도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돈 벌 용기가 블로그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오늘 안으로 어떠랴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일 제이의 행운을 곱친 것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하였다.

"여섯번째 페이지는 너무 이상한데."

이런 말을 하며 학생은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올시다. 시간 많을때는 저 페이지 글로 시간 때우는게 제일입니다. 또 가는김에 광고 클릭해 주셔야지요."

하고 빙글빙글 웃는 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러면 저 페이지로 갑시다."

관대한 어린 손님은 그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대화창도 닫고 블로그도 보러 갈 데로 갔다.

그 학생을 보내고 나선 김의 마우스는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클릭질을 한다느니보다 거의 나는 듯하였다. 마우스 볼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군다느니보다 마치 얼음을 지쳐나가는 스케이트 모양으로 미끄러져가는 듯하였다. 덜마른 마우스 패드가 미끄럽기도 하였다. 이윽고 김의 손은 무거워졌다. 자기 블로그 주소에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광고걸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런 말이 잉잉 그의 귀에 울렸다.

"젠장맞을 것! 이 렉을 맞으며 빈 방명록를 털털거리고 돌아를간담.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렉이 왜 남의 브라우저를 딱딱 때려!"

그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 게 아니라 디씨 근처를 빙빙돌며 사람 오기를 기다리면 또 손님을 태우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기를 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디씨 상주자의 등살이 무서워 게시판 앞에 섰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본 일이라 바로 게시판에서 조금 떨어져서 사람 다니는 대화창과 게시판틈에 링크를 세워 놓고, 자기는 그 근처를 빙빙 돌며 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손님을 물색하던 김의 눈에 주부인 듯한 여편네의 모양이 띄었다. 그는 슬근슬근 그 여자에게 1대 1 대화로 다가들었다.

"아씨, 블로그 아니 타시랍시요?"

그 주부인지 뭔지가 한참은 매우 때깔을 빼며 대화창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김은 구경하는 거지나 무엇같이 연해연방 그의 기색을 살피며,

"아씨 이글루 애들보담 아주 즐겁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왜 이래? 즐."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돌아선다. 김은 어랍시요 하고 물러섰다.

중략

김은 그중에도 베이직을 질러가지고 주소창에 블로그 주소를 쓴다. 주소라 해도 물론 무료로 주는 단축 주소이다. 만일 김이 글 쓸 꺼리를 생각지 않았던들 엔터키를 눌렀을 제 브라우저를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마우스를 잡은 손이 떨렸으리라. “이럇샤이마세뇨” 거리는 입장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드르륵 그윽한 소리, 컴퓨터 하드 돌아가는 소리가 날 뿐이다. 만일 청각이 예민한 이 같으면, 그 드르륵 소리는 돌 따름이요, 윙하고 브라우저 돌아가는 소리가 없으니, 로딩이 안되는 것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혹은 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엔터키를 누르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을 렉, 주인이 들어오는데 로딩도 않아. 이 오라질렉."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첨지는 새로고침을 왈칵 눌렀다. 새로고침을 눌러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김은 랜카드 밑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두꺼비집 같은 랜카드의 전원을 꺼들고 켜며,

"이 브라우저야, 로딩을 해, 로딩을! 렉이 붙었어, 이 오라질 렉!"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으응, 이것 봐, 아무 로딩이 없네."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렉아, 서버가 죽었단 말이냐, 왜 페이지가 없어?"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으응, 또 반응이 없네,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브라우저의 흰 창이 검은 바탕화면을 덮은, 제목 표시줄의 “서버 점검중”을 알아보자마자,

"이 브라우저! 이 브라우저! 왜 블로그를 바루 보지 못하고 점검만 바라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이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죽은 모니터의 뻣뻣한 화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은 미친 듯이 제 얼굴을 모니터의 화면에 한데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베이직을 사다 놓았는데 왜 글을 못쓰니, 왜 글을 못쓰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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