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과 같이 한의과대학에서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학문으로 형성된 것이 1964년이다. 바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자료를 첨가하여 뒤집던 내용을 밑에 술(述)하여 둔다. 혹여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해방(解放) 이후에 의생(醫生)이라고 불리던 한의사들, 즉 왜정(倭政) 때에 한의사 면허를 받았던 사람들이 미군정 시절에 「의생협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언급하는 「조선의사회」가 아닌가 한다. 「조선의생회」라는 명칭도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게 이야기할 대상은 아니니까. 전의(典醫) 출신이던 박호풍(朴鎬豊)·김영훈(金永勳) 양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이 때에 「동양학관」이라는 한의학 강습소를 만든 것이 당시 해방 이후 최초의 한의학 교육기관이 아닌가 한다. 박호풍 선생은 이후 1957년에 동양의약대학 학장 시절에 문교부에서 최초로 한의학 교수증을 받는다.

동양학관말고 1939년에 동양의학협회 창립총회에서 동양의학강습소를 창립했는데, 1946년에 조헌영 선생이 인수하여 동양의학전문학원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동양대학관이 된다는 말인데, 알 수 없다.

이후에 박호풍 선생을 설립대표자로 하여 1947년 12월 31일에 재단법인 행림학원(杏林學院) 설립인가를 받고, 1948년 3월 24일에는 동양대학관을 설립하게 된다. 인문과학 및 동양의학과를 갖춘 4년제 을종대학으로, 관장은 이사자이던 박호풍 선생이었다. 당시 위치가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365번지라고 하는데, 지금은 없는 번지라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딱 마장동 365번지에 지금 강동구에 있는 한영고등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동양대학관 제1회 졸업생 20명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6월 10일에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이 설립되었다고(한의사협회 홈페이지) 하는데, 이 부분이 모호해서 잘 모르겠다. 하여간 동양대학관도 부산으로 쫓겨 내려갔는데, 왜정 때의 『조선의료령』(朝鮮醫療令, 1944·8·21 제령제31호)을 대체할 새로운 의료 관련 법률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제2대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본회의 속기록 등을 살펴보면 확실히 양의(洋醫)를 우위로 두자는 의견과 함께 한의사(韓醫師)가 아니라 한의사(韓醫士)로 하자, 한의원이 아니라 진찰소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양의가 우세했으며, 실제 국민의료법에서는 의료업자로는 의료·치과의사를 제1종으로 하고, 보건원·조산원·간호원을 제3종으로 하면서 그 사이에 제2종으로 한의사를 두게 되었다. 당시 의생을 한의사로 하면서 조선의료령을 폐지하고 문교부장관이 인가한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졸업한자 또는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였는데, 이때 부산으로 피란중이던 동양의학관은 천막 하나를 세워 서울한의과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1951년 12월 15일에 설립인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1953년 3월 5일에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후자가 유력하지 않나 한다. 승격인가를 받아 개교한 것이 1953년 4월 1일이다.

서울 수복 이후에 안암동 산10의15호에 목조건물 단층 3개동으로 서울한의과대학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번지가 물론 지금과 달라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번지수로 따지면 안암동5가 개운사 근처인데, 찾아간 사람 말로는 안암동 2가에 한의대길에 대광빌라 자리(경동교회 옆)가 자리라고 한다. 거기 도로 이름 유래도 그러하니 아마 여기일 것이다.

서울한의과대학이 1955년 3월 10일에 동양의학대학으로 바꾸었다가, 8월 1일에 약학과 병설하면서 다시 명칭을 동양의약대학으로 고치게 된다. 동양의약대학 한의학과는 1959년 3월 27일에 제1기(통산8기)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동양의약대학는 5·16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이른바 개혁조치로 다시 철퇴를 맞게되는데, 교육에관한임시특례법을 만들어 학교의 정비 조치가 가능하게 만든 뒤 학교정비기준령을 통해 특정 종파의 신학교나 기준에 미달하는 학교를 폐지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기준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결국 1962년에는 제1학년생 모집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2년 3월 27일에 각종학교인 동양의약학교 설립인가를 얻어내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의료법 개정을 통해 한의사 면허의 자격을 「국공립대학교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과정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면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조차 폐지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동양의약대학 부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자리마저 전임 회장이 사망하면서 공석이 되었다. 이 때 당시 종로에서 성제원한의원을 하던 김정제 선생이 회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의 학생대표였던 김병운 선생의 회고가 다음과 같다.

"의료법 개정을 요구하러 간 학생들에게 김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문사분과위원장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홍종철이라고 대답하자 '홍 장군은 내가 잘 알지, 내 환자야!' 하면서 얼마 후 돈화문앞 집으로 홍종철 위원장을 초대하였어요.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한의계의 입장을 전달하였으나 홍 위원장이 거절하자 홍 위원장의 부인이 '김 회장이 생명의 은인인데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어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폐기되고 의료법개정안도 14조 2항이 수정되어 최고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동양의약대학이 부활한 것이지요."

1963년 12월 13일에 동양의학대학이 부활되었고, 3일 뒤에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의가대학 인가가 났다. 마침 의료법 개정안에서 면허 자격을 「의과대학 한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는 바람에 1월 21일에 다시 이름을 동양의과대학으로 바꾼다.

행림학원과 동양의과대학은 1965년에 경희대학교에 합병되는데, 당시 경영난에 봉착한 동양의과대학은 우선 동국대와 고려대에 합병을 타진했으나 불발되어서 경희대로 온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로써 3월 27일에 흡수 합병을 결의하고, 한 달 만인 4월 27일에 합병 조인과 함께 대지 6천 평, 건평 1만 592평의 의대부속병원을 착공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희의료원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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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내가 다니는 학교인 경희대학교에서 2008년 연례보고서 목련리포트를 냈다. 부제는 경희의 미래, 대학의 미래. 이 대학교육이란 것, 즉 고등교육이란 것에 대하여 일전에 몇 차례 지적한 바가 있는데,[각주:1] 일단은 경희대학에서 이렇듯 고등교육의 희망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들리는 소문을 규합하면, 이 경희대학의 경희(慶熙)라는 교명은 조영식 학원장과 학교의 초기 구성원들이 서울고등학교(당시에는 경희궁 터에 있었다)와 관련이 깊어서 뒷산인 경희동산을 따 경희대학교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또 다른 들리는 소문을 몇 가지 엮으면 경희궁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궁궐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설은 거의 근거가 없고, 조영식 학원장이 설명한 바를 따른다면 bright and happiness이니 경(慶)과 희(熙)이다. 또한 학원장의 사상이 네오르네상스이니, 대학의 이념자체가 문화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고, 이상적인 인류사회의 재건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 총장도 학원장의 아들인 조인원 박사이니, 이러한 정신이 끊어지지 않을 것은 대충 명확한 사실이다.

목련이라는 것은 이 학교의 교화이니, 가곡 목련화는 학원장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가 가사를 짓고, 음대 학장이던 김동진 교수가 곡을 지은 것으로 음대의 엄정행 교수가 노래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학교는 이 목련에 대하여 '봄의 길잡이이자 새 시대의 선구자'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평화와 공영의 지구공동체를 모색하는 상징이라고 하고 있다.

하여간 동 보고서는 대학의 역할이 시대의 뜨름에 따라 흔들리고 있으며, 학문 외적 논리가 대학의 권위와 위상을 실추시키고 있다고 진단하고 대학은 대학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학문적 권위를 재건하는 데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특히 상업적 생산성은 더 이상 대학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하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자세한 사항은 생략한다).

분명 문제를 파악하고, 진단하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것은 대학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경희대학이 이러한 상황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 약간의 희망을 엿보았지만, 물론 좋은 말로만 씌운 보고서일지도 모르고, 또한 말로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뒤로하고, 대학에서 작으나마 희망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을 하고 싶다. 또한 고등교육이 진정한 고등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을 한 학교가 열어가고자 한다는 것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일지 모른다.
  1. 대표적으로 <A href="http://7t7l.tistory.com/579" target=_blank>한국의 한국어 교육과 교육체계의 상실 : 정신줄 놓은 인수위의 영어교육방안에 비추어</A>를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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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없고, 그냥 기행.

그래도 꽤 많은 뭐였지, 자연물? 아 맞다 표본.
그러니까 표본이 상당히 많이 모여있는 곳이라 볼만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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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합격

2006.08.25 20:21 from 일상茶房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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