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기관설에 관한 미노베 다쓰키치 의원의 이른바 「일신상의 변명」
天皇機関説に関する美濃部達吉議員のいわゆる「一身上の弁明」

1935년(쇼와 10년) 2월 25일 제67회 제국의회 귀족원

[의장] (공작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군) 미노베 다쓰키치 군으로부터, 동군의 언론에 부친 지난날 당 의장에 있어 의원으로부터 발언이 있었던 문제에 부쳐, 일신상의 변명을 올리고자 하는 신청이 있었으므로, 이를 허락함에 이의있으십니까.

〔"이의 없음"이라고 하는 자 있음.〕

[의장] 이의없다고 인정합니다. 미노베 다쓰키치 군.

〔미노베 다쓰키치 군 연단에 오르다.〕

 지난 (1935년) 2월 19일의 본회의에 있었던, 기쿠치 남작 기타 분들께서 제 저서에 해주신 말씀에 일단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이에 일언일신상의 변명을 표하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은 저로서도 깊은 유감을 가지는 바입니다. 기쿠치 남작은 작년(1934년)의 65회 의회에서도 제 저서의 일을 들어 이러한 사상을 따르는 자는 문관고등시험위원에서 쫓아내야만 한다는 등의 심한 말씀과 같은 비난을 하신 바 있습니다. 이번 의회에서도 다시 제 저서를 들어 명백한 반역적 사상이라고 말씀하시고는, 모반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또한 학문을 이용한 도적(学匪)이라고 까지 단언하신 것입니다.

 일본의 신민(臣民)인 자로 반역자이며 모반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심한 모욕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학문을 전공해 연구하는 사람에게 학문을 이용한 도적이라는 이야기만큼 참기 어려운 모욕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귀족원에 있어 공공의 회의장에 공언되고, 의장으로부터의 취소 명령도 없이 용납되는 것이 과연 귀족원의 품위에 비추어 볼 때 가능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어쨌든 귀족원에 있어서, 또한 귀족원의 이 공공의 회의장에서 이와 같은 모욕이 가해진 일에 대하여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러한 일이 묵과하기 어려운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본 회의장에 있어서 이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당한 것임을 알고 있고, 또한 귀중한 시간을 이와 같은 이야기에 써버리는 것에 대하여 매우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일단 승낙을 구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릇 어떠한 학문에서도 그 학문을 전공한 자의 학설을 비판하여 그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비판자가 해당 학문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고, 상당한 비판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법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군학(軍學)에 대한 학자의 전문적인 저술을 비평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웃음거리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만, 기쿠치 남작이 제 책에 대하여 논한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동 남작이 과연 제 저서를 통독하셨는지 의문이며, 만약에 읽으셨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이해가 되신 것인지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궁금증이 듭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편적으로 제 저서의 어떤 문장구만을 떼어내, 그 전후 문맥도 살피지 않고 단지 그 부분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의미로 오해하여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약 정말로 제 저서 전부를 정독하시고, 또한 그것을 정당하게 이해하셨다면 이와 같은 비판을 가할 이유는 없으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기쿠치 남작은 제 저서를 마치 우리 국체(國體)를 부인하고 군주주권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실로 제 저서를 읽지 않았거나 또는 읽어도 그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 헌법(대일본제국헌법)상 국가 통치의 대권이 천황에게 속한다고 적힌 것에 대해서는 천하 만민 중 어느 사람도 이에 의심을 품을 자는 없는 것입니다. 헌법의 상유(上諭)에서는 “국가통치의 대권은 짐이 이를 조종에게서 이어받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바이다.”라고 명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 제1조에서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합니다. 더욱이 제4조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규에 따라 이를 행한다.”고 하니 일월(日月)과 같이 명백한 일입니다. 만약 이를 부정하는 자가 있으면 반역사상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것이나, 제 저서가 어떠한 곳에서도 이를 부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그것이 일본 헌법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인 것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기쿠치 남작이 들었던 『헌법정의』(憲法精義)의 15항에서 16항이 있는 곳을 보시면, 일본의 헌법의 기본주의라는 제목 하에 “가장 중요한 기본주의는 일본의 국체를 기초로 하는 군주주권주의이다. 이는 서양의 문명으로부터 전해진 입헌주의의 요소를 가한 일본의 헌법의 주요한 원칙이다.”, 즉 군주주권주의에 입헌주의의 요소를 가한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만세가 시작된 이래로 전하는 것으로 일본 개벽 이래 일찍이 변한 일이 없는, 또한 장래 영원히 변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저술인 『헌법촬요』(憲法撮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쿠치 남작이 거론한 책 이외에도, 제 헌법에 관한 저술은 메이지 39년에는 이미 『일본국법학』(日本国法学)을 저술한 바 있으며, 다이쇼 10년에는 『일본헌법』 제1권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더욱 최근인 쇼와 9년에는 『일본헌법의 기본주의』(日本憲法の基本主義)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지만, 어떠한 책을 보셔도 군주주권주의가 일본 헌법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대하여 헌법상의 법리론으로서 문제가 되는 점은 대충 두 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인 것인가, 또는 천황이 나라의 원수로 그 지위에서 총람하는 권능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는 권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권능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 문제는 천황의 대권은 절대 제한할 수 없는 만능의 권력인가, 아니면 헌법의 조문에 의하여 행할 수 있는 제한 있는 권능인가의 문제입니다.

 제 저서에서 표명하는 견해는 첫 번째로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서는 권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능이라는 점이며, 또한 두 번째로는 만능 무제한의 권력이 아니라 헌법의 조규에 의하여 행하는 권능이라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가 기쿠치 남작과 다른 분의 의혹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표합니다.

 첫 번째로 천황의 국가 통치의 대권은 법률상의 관념으로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법률학의 첫 발을 내딛은 사람이 숙지하는 점입니다만, 법률학에서 권리라고 하는 것은 이익이라는 것을 요소로 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즉 자신의 이익 때문에 … 자기의 목적 때문에 존재하는 법률상의 힘이기 때문에 권리라는 관념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그 힘을 그 사람 스스로의 이익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정을 받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권리주체라고 하는 것은 이익의 주체, 목적의 주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국가 통치의 대권이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해석하면 통치권이 천황 일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신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힘이라고 하는 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해가 과연 우리 존귀한 국체에 적합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고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어떤 시대에서도 천황이 그 일신이나 그 일가를 위하여, 일가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황은 우리나라 개벽 이래로 하늘 아래 대군(大君)으로 우러러 보는 존재입니다만, 하늘 아래의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 일신 때문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다는 일은 고래로부터 항상 의식하고 있었던 명백한 사실이며, 역대의 천황의 조서에서도 그러한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니혼쇼키』(日本書記)에 등장하는 스이진 천황(崇神天皇)의 조서에서는 “생각건대 우리 황조 천황께서 고교쿠(京極)에 광림(光臨)하신 것은 단지 한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릇 인신을 사목(司牧)하고 천하를 경륜하는 것을 위함이다.”라고 하였고,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의 조서에서는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바로 임금은 백성을 그 근본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서양의 오래된 사상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마치 국왕의 일가의 재산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한 개인이 자신의 권리로 재산을 소유하여 다스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국왕이 자신의 일가의 재산인 국토와 국민을 영유하여 지배하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상을 가산국사상(家産國思想), 가산설(Patrimonial theory)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를 마치 국왕 한 사람, 그 집안에 속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와 같은 서양 중세의 사상은 일본의 고래의 역사에서 일찍이 보이지 않았던 사상으로, 처음부터 우리 국체에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 공(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의미함)의 『헌법의해』(憲法義解)의 제1조의 주석에서는 “통치는 대위(大位:천황의 자리)에서 대권을 총괄하여 국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확실히 조종(祖宗:역대 천황)은 그 천직(天職)을 중요시하고, 군주의 덕은 팔주(八洲:여덟 개의 섬, 일본)의 신민을 통치하는 데에 어울리고,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을 위하는 사사로운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즉 이는 이 헌법이 기반하고, 기초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또한 같은 취지를 말하는 것으로 통치가 결단코 천황의 일신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 아니고, 따라서 법률상의 관념으로 생각하면 천황 일신의 사리(私利)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합니다.

 『고지키』(古事記)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이즈모(出雲)의 오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国主命)에게 물어보신 말이라고 하여 “그대가 사령(私領, 사적인 땅)으로 보유하고 있는 아시하라노나카쓰구니(葦原ノ中ツ国)는, 우리 아들이 통치할 나라” 운운하며 통치하는(シラス:領らす) 것과 사령으로(ウシハク:領く) 가진다는 말을 따로 구분하여 쓰고 있습니다. 어떤 국학자의 학설에 의하면 후자의 것은 개인이 가진다는 의미이고, 전자의 것은 통치한다는 의미로, 즉 천하를 위해 땅과 인민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학설이 옳은지 어떤지는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만약 그것이 옳다면 천황 일신의 권리로서 통치권을 보유하시는 것이라고 이해되며, 이는 곧 천황이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국체에 맞지 않는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치권은 천황 일신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고, 따라서 천황 일신에 있는 사권(私權)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주체는 법률상 무엇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권리의 주체는 또한 목적의 주체이기 때문에, 통치의 권리주체는 곧 통치의 목적주체라는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황이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천하의 국가를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이 귀속하는 것은 영원 항구(恒久)한 국체의 국가라는 관념으로,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 다시 말하면 나라의 최고기관으로서 이 국가의 일체의 권리를 총람하고, 국가의 일체의 활동은 입법도 사법도 전부 천황을 그 최고의 원천으로 삼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기관설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 그 자신이 하나의 생명으로, 그 자신의 목적을 가지는 항구적인 단체, 즉 법률학상의 단어를 빌리면 하나의 법인이라는 관념에서, 천황은 이 법인인 국가의 원수되는 지위에 있어 국가를 대표하고 국가의 일체의 권리를 총람하고, 천황이 헌법에 따라 행하는 행위는 즉 국가의 행위로 효력을 발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국가를 법인이라고 본다는 것은, 물론 헌법이 법률학의 교과서는 아니라는 점 때문에 명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만, 헌법의 조문 내에는 국가를 법인으로 보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규정은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헌법은 그 제목부터 이미 대일본제국헌법이라고 하여 국가의 헌법인 것을 명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55조 및 제56조에서는 ‘국무’(國務)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모든 통치 작용은 국가의 사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62조 제3항에서는 ‘국채’(國債) 및 ‘국고’(國庫)라고 하고 있으며, 제64조 및 제72조에서는 ‘국가의 세출세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66조에서는 국고에서 황실경비를 지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러한 자구(字句)는 국가 자신이 공채를 발행하고, 세출과 세입을 관장하고,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황실경비를 지출하는 주체인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가 그 자신이 법인이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국세(國稅)라고 하는 것이나 국유재산(國有財産)이란 것, 국제조약(國際條約)이라고 하는 말은 법률상 널리 공인된 말입니다만, 그것은 국가 그 자신의 조세를 부과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조약을 맺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국가 그 자신이 하나의 법인이며, 권리주체라고 하는 것이 우리 헌법 및 법률이 공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단체이고 무형인(無形人)이기 때문에,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인을 대표하는 것이 있어, 그 사람의 행위가 법률상 법인의 행위의 효력을 소유하는 행위여야 하므로 이러한 바와 같이 법인을 대표하여 법인의 권리를 행하는 사람을 법률학상의 관념으로 법인의 기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천황이 국가의 기관인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법률학의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는 혹여 불온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 의미하는 바는 천황 일신과 그 일가의 권리로 통치권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국가의 공사(公事)로 천황의 뜻이 국가에 체현(體現)되고, 국가의 모든 활동은 천황을 그 최고 원천으로 하고, 천황의 행위가 그 일신의 사사로운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행위로 효력을 발한다는 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의 헌법은 메이지 천황이 흠정(欽定)한 것입니다만, 메이지 천황 일신의 저작물이 아니라 그 명칭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대일본제국의 헌법이며, 국가의 헌법으로 영구히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약은 헌법 제13조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천황이 체결하는 것이지만, 분명 그것은 국제조약, 즉 국가와 국가 간의 조약으로 효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소위 기관설을 부정해서 통치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권리라고 하면, 그 통치권을 기초로 하여 부과되는 조세는 국세가 아니라 천황 일신에 속하는 수입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황 일신에 속하는 수입이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천황이 체결한 조약은 국제조약이 아니라 천황 일신의 계약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외국채(外國債)라고 하는 것, 국유재산(國有財産)이라고 하는 것, 국가의 세출세입이라고 하는 것 등 만일 통치권이 국가에 속하는 권리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이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통치권이 국가에 속하는 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단코 천황이 통치의 대권을 소유하는 것을 부정하는 취지가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일체의 통치권은 천황이 총람한다는 것은 헌법이 명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바는 천황의 대권은 천황 일신에 속하는 사사로운 권리가 아니라 천황이 국가의 원수로서 행하는 권능이며, 국가의 통치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즉 통치의 모든 권능이 천황에게서 나온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국체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가장 우리 국체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가 우리 헌법상 천황의 통치의 대권은 만능무제한의 권력인가 또한 이 점에 대해서도 우리 국체를 논하자면, 절대무제한이 되는 만능의 권력이 천황에게 속하는 것이 우리 국체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이를 우리 국체의 인식에 대단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군주가 만능의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순수한 서양의 사상입니다. 로마법이나 17~18세기의 프랑스 등의 사상으로, 우리 역사상에 비추어 볼 때에는 어떤 시대에서도 천황이 무제한인 만능의 권력을 이용해 신민(臣民)에게 명령하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살펴보더라도 결코 무한한 권력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헌법의 상유(上諭)에서도 “짐이 친애하는 바의 신민이 곧 짐의 조종께서 혜무자양(惠撫慈養:사랑해 어루만지고, 자애롭게 기르다)하신 바의 신민임을 헤아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역대 천황의 신민에 대한 관계를 혜무자양(恵撫慈養)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은 나라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규에 의하여 이를 행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헌법의 상유에서는 “짐과 짐의 자손은 장래 이 헌법의 조장(條章)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을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어 천황의 통치의 대권이 헌법의 규정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명백하여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천황의 제국의회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헌법의 조규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합니다. 기쿠치 남작은 제 저서에서, 의회가 전혀 천황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만약에 해산의 명이 있어도 그에 구속되지 않고 회의를 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일 뿐더러, 그것도 그 분이 제 저서를 통독하지 않았거나 또는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의회가 천황의 대명(大命)에 의하여 소집되고, 또한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을 명하는 것은 헌법 제7조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또한 제 책에서도 동일하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헌법과 법률에 정해져 있는 사항을 제외하고, 그 이외의 사항에 즉 헌법의 조규를 기초로 하지 않고 천황이 의회에 명령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회가 원칙적으로 천황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로, 원칙적이라는 말은 특정하게 정해진 일을 제외하고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살피자면 의회가 입법이나 예산에 협찬하고, 긴급명령 기타의 승낙을 하고, 또는 상주나 건의를 하고, 질문을 통해 정부의 변명을 구하는 것은 모두 의회 자기의 독립의 의견에 의하여 행하는 것으로, 칙명이 내리고 칙명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례로 입법의 협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법률안은 혹은 정부에서 제출하고 혹은 의회에서 제출하는 것이 있습니다만, 의원(議院)에서 제출하는 안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군명(君命)을 받아 협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정부제출안에 대해서도 의회는 자기의 독립된 의견에 의하여 이를 가결하거나 부결하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의회가 폐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멋대로 가결하지 않는 일이 있다거나 이를 수정하고 또는 부결하는 자유를 가지는 데에 이르게 된다면 이는 협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의회제도를 설치한 목적은 전혀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헌법 제66조에서는 황실경비에 대해 특히 의회의 협찬을 요하지 않는다고 명언(明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기쿠치 남작께서 의회에 대해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부결하고 그 협찬을 막았을 경우에, 의회가 조칙을 어긴 책임을 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상주나 건의, 질문등에 이르러서도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쿠치 남작은 그 연설에서 폐하의 신탁(信託)에 의하여 대정(大政)을 보필하는 중책을 담당하고 있는 국무대신에 대하여 현 내각은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결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폐하의 지고(至高)한 고문(顧問)의 역할을 맡는 추밀원(樞密院) 의장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폭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두렵게도 폐하께서 임명한 그 사람을 임명하지 아니한 것만 못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의회의 독립적인 보필을 부정하고, 의회는 하나의 칙명에 따라 이 권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폐하의 신임을 방기한 중신들에 대하여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을 하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그것은 의회의 독립성을 전제로 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제가 의회는 국민대표의 기관이므로, 천황에게서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심한 비난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회가 천황의 임명에 의한 관부(官府)가 아니라, 국민대표의 기관으로서 설치되어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심이 없는 부분이며, 그것은 의회가 구 제도의 원로원(元老院)이나 지금의 추밀원(樞密院)과 법률상의 지위를 달리하는 이유입니다. 원로원이나 추밀원은 천황의 관리에서 성립하게 된 것으로, 원로원 의관(議官)이나 추밀원 고문관(顧問官)이라고 하는 것은 천황의 관(官)임을 나타냅니다. 천황이 이를 임명하게 되는 것, 즉 그 권한을 수여하는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것은 반대로 의원(議員)이라고 부를 뿐, 의관(議官)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천황의 기관(機關)으로서 설치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다시 『헌법의해』를 인용해 살펴보면, 제33조의 주석에는 “귀족원은 귀신(貴紳)을 모으고, 중의원은 서민이 뽑아 양원합동으로 하나의 제국의회를 성립하고 이에 전국의 공의(公議)를 대표한다.”라고 하고 있는데, 즉 전국의 공의를 대표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헌법의해에서도 명백히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원로원이나 추밀원과 같은 천황의 기관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헌법학에서는 지극히도 평범한 진리로, 보통 학자라면 인정하는 것이고, 또한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30년이상 주장되어 온 내용입니다. 지금에 이르러 이와 같은 비난이 본 의장(議場)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제 생각에도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이 석상에서 이와 같이 헌법의 강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황송한 일입니다만, 이에 대해 고개를 숙이는 바입니다. 제가 간절하게 희망하는 것은 만약에 제 학설에 대하여 비평을 하고자 한다면 여기저기에서 잘라 모은 단편적인 문구만을 긁어모아 헛된 비방과 중상의 말을 하시기보다는, 진실로 제 저서의 전체를 통독하고 전후(前後)의 맥락을 밝혀 참된 의미를 이해하신 연후에 비평해 달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 변명의 말을 마칩니다.(박수)

 귀족원에서는 단상에서 하는 연설에 대해서는 일체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미노베 다쓰키치)의 연설에 소수이기는 해도 박수가 터졌다. 신문도 고금에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이를 보도했다. 박수를 보낸 사람은 9명이었다고도 하고 서너 명이었다고도 한다. 전 도쿄대 총장 오노즈카 기헤이지 선생, 이자와 다키오 씨, 교토대학 법학부 명예교수 오다 요로즈 선생, 물리학자 다나카다테 아이키쓰 박사 등이 박수를 보냈다는 것이다. 오노즈카 선생은 이때 아버지의 연설에 박수를 보냈다고 하여 우익단체의 표적이 되어 한때는 호위까지 붙는 지경에 처했다고 한다.(미노베 료키치, 『고민하는 데모크라시』)[각주:1]
  1. 다치바나 다카시<SPAN style="COLOR: #8e8e8e">(이규원 옮김)</SPAN>, 『천황과 도쿄대 1』, 청어람미디어, 2008년<SPAN style="COLOR: #8e8e8e">(2005년, 분게이슌주)</SPAN>, 433~434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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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헌법사 소고(日本憲法史 小考)



Ⅰ. 메이지(明治) 헌법


1. 총설

 (1) 봉건제도의 해체

  1) 막부정치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모든 정치권력을 쥐고 260년 동안 봉건적·쇄국적 체제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구미(歐美) 자본주의국가의 개국 요구나 강해진 도막운동(倒幕運動), 그리고 경제체제의 모순 등의 격증에 의하여 급속하게 권위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막부는 게이오(慶応) 3년(1867년) 10월 14일을 기하여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즉 정권을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朝廷)에 다시 돌렸고, 이후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왕정복고」(王政復古)의 대호령(大号令)을 발하여 이에 천황 친정(親政)의 체제가 부활하였다.

  2) 번제(藩制)의 폐지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는 우선 번(藩, 당시 263개 이상의 번이 있었다.)을 폐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메이지(明治) 2년(1869년)에는 드디어 「판적봉환」(版籍奉還), 즉 번의 영지와 그 주민을 중앙정부에서 관리하되 그 관리의 담당은 번의 주인이던 다이묘(大名)들이 지번사(知藩事) 혹은 번지사(藩知事)의 형태로 맡게 되었으며, 이어 메이지 4년(1871년)에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단행하게 되었다.

  3) 신분제도의 폐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신분은 공경(公卿)·제후(諸侯)·사(士)·농(農)·공(工)·상(商) 등의 계급이 나누어져, 각각의 신분에 의하여 엄격한 차별을 받는 원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신분제도를 폐지하는데 착수하였으나, 개혁은 불완전한 채로 끝났다.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시대에 역행하는, 이른바 화족(華族, 공경이나 제후가 변한 것)·사족(士族, 신하)·평민(농·공·상·민)의 3종의 신분을 새로이 만들었다. 결국 「사민평등」의 사상은 그림의 떡처럼 변했고, 역으로 인종적인 편견이나 부라쿠(部落) 차별 등의 차별을 오늘날까지 남기는 원인이 되었다.

 (2) 근대 민족국가로의 움직임

  일본이 근대국가로서의 움직임을 내딛은 것은 1860년대에서 1870년대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정치사상이나 헌법제도등의 많은 움직임이 있던 시기이다.

  1) 「공의사상」(公議思想)
  「공의사상」(公議思想)은 막부에서 메이지 유신에 걸쳐 일본의 지식층에서 탄생한 정치사상으로, 그 목적은 도쿠가와 막부의 군사적 독재정치에 저항하여 정치의 무대에 공경이나 제후 및 무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상을 명시하게 된 것이 게이오 4년(1868년)의 「5개조의 어서문(五ヶ条の御誓文)이다.

  2) 민선의회(民選議會)의 설치
  민선의회 설치의 움직임은 문명개화의 소리가 급속하게 높아지던 근대 유럽의 사상과 제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庶民)의 정치적 자각이 높아지면서 나타났다. 정한론(征韓論)에서 진 소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이 사쓰마(薩摩)의 번벌(藩閥)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의 전제에 대항하여 1874년에 「민선의회설립의 건백서」(民選議会成立の建白書)를 정부에 주장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3)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와 흠정헌법(欽定憲法)
  민선의회를 개설하여 헌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정부 내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로 대표되며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급진론」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대표되며 프러시아의 군주주의를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점진론」이 그것이다. 두 주장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어전회의」(御前会議)에서 점진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자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면직되었다(이른바 메이지 14년의 「정변」이다.). 그리고 메이지 14년(1881년) 10월 12일에 칙유(勅諭)가 내려졌고, 정부가 이를 받아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며 천황이 헌법을 제정하는 것 등을 발표하였다.

  4) 메이지 헌법의 제정과 공포
  메이지 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태도를 굳히고, 이토 히로부미를 각국의 헌법조사를 위하여 유렵으로 파견한다. 그는 주로 독일계의 헌법이론을 배우고, 군권(君權) 중심의 입헌제를 지지할 의지를 굳혀 귀국한다. 메이지 헌법 제정을 위한 구체적 작업은 1886년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와 함께 헌법과 관계법령안을 준비하여 1889년에 안이 완성되어 주상(奏上)하였다.
  이 안은 추밀원(枢密院)에서 심의하여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에 천황이 「대일본제국헌법」(이른바 메이지 헌법)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는 일본의 첫 성문헌법이다. 그리고 1890년 7월에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시행되어 제1회 제국의회(帝国議会)가 개설되었고, 메이지 헌법도 그 날부터 시행되었다.


2. 메이지 헌법의 성격

 (1) 개설(槪說)

  메이지 정부는 한편으로는 선진 여러 국가의 입헌주의 제도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적인 권력구조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서로 모순적인 작업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메이지 헌법은 그러한 상황에서 제정된 헌법이므로, 그 성격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원리, 그리고 군주주의의 원리의 타협의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전제적인 성격이 강한 헌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민주적인 원리와 제도

  1) 의회제도
  법률이나 예산의 성립에 대하여 의회의 관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근대의회주의제도의 성격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①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원 행사를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은 점, ② 정당이나 군부, 관료의 힘을 억제할 수 없었던 점, ③ 천황은 많은 명령을 단독으로 발하는 것이 인정된 점 등은 불완전한 의회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대신(大臣)의 조언
  천황의 국무상의 행위에는 모든 대신의 보필(輔弼)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군통수권(軍統帥權)과 황실에 관한 사무 등은 대신의 조언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충분한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3) 신민(臣民)의 권리보장
  메이지 헌법도 근대입헌국가와 같이 「신민권리의무」(臣民權利義務)라는 표제로 일련의 자유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와 자유는 천황이 신민에 대하여 은혜적으로 준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연법사상에서 생긴 인권의 관념은 아니었다. 또한 그 보장에 있어서도 행정권이 아닌 입법에 의한 제약에는 어떠한 보장수단이 없었으므로, 「법률의 범위 내」에서의 보장에 지나지 않았다.

  4) 권력분립
  메이지 헌법도 「권력분립」(權力分立)을 위하여 국가권력을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行政)으로 나누고, 제국의회와 재판소(裁判所)·내각(內閣)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천황이 입법권을 행사하기 위한 「협찬기관」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국무대신은 천황이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보필하는 지위」였으며, 재판소 또한 「천황의 이름으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었던 등 모두 천황대권을 보좌하는 기관으로서의 분립제에 지나지 않았다.

  5) 사법권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사법권 독립의 원칙」을 취하여 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재판관의 신분보장을 두었다. 단 행정사건에 대하여는 별도의 행정재판소의 설치를 인정하고, 군인·화족 등 특별한 신분이나 사건에 대하여는 특별재판소의 설치도 허용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사법권의 독립은 메이지 헌법 하의 민주적 여러 제도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실현을 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3) 반민주적인 원칙과 제도

  1) 천황주권(天皇主權)
  메이지 헌법은 「천황주권」을 근본원칙으로 하여 특이한 천황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즉 일본의 정치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천황이라고 하는 천황주권의 근거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신칙(神勅)」에 바탕한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처럼 무궁함)」에 있다는 설이다. 또한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감히 범하여서는 아니되는 이른바 천황의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2) 대권중심주의(大權中心主義)
  메이지 헌법에 있어서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하는 것에 의하여 최고의 권위자로서 군림하였다. 「천황은 통치권을 총람(總攬)한다」는 것은 입법권과 행정권 및 사법권 등의 권력이 결국에는 천황에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천황대권은 범위가 넓고, 특히 의회가 관여할 수 없는 천황의 권능이 크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은 천황제 관료에 의한 행정권 우위의 제도, 즉 「약한 의회에 대하여, 강한 정부」라고 하는 체제를 명실히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통수권(統帥權)의 독립
  메이지 헌법은 천황이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정하고, 이른바 「통수권의 독립」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용은 참모총장(參謀總長, 육군)과 군령부총장(軍令部總長, 해군) 등의 기관이 조언하여 정부 및 의회에서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별도의 계통의 권한이었다.

  4) 황실자율주의(皇室自律主義)
  천황제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황실에 관한 것은 황실 스스로가 정하도록 하는, 이른바 「황실자율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실시하기 위하여 황실전범(皇室典範)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여 메이지 헌법과 함께 최고의 위치에 두고, 양자의 사이에는 효력상의 우열이 없도록 하였다.


3. 메이지 헌법의 운용(運用)

 (1) 개설(槪說)

  메이지 헌법은 근대입헌주의와 절대주의라는 상반된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실제 정치에서 운용되는 것 또한 여러 가지로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서는 메이지 헌법사를 4가지의 시대로 나누고, 요점만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제1기 : 헌법시행(1890년, 메이지 23년)부터 청일전쟁(1894~189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메이지 헌법을 성립시킨 번벌정부(藩閥政府)와 의회가 헌법상의 권능을 근거로하여 격돌한 때이다. 정부는 「천황의 정부」로 어떠한 정당정치에서도 초연(初演)한, 의회에서 컨트롤 할 수 없는 이른바 「초연주의」(超然主義)의 방침이 취해졌다.

 (3) 제2기 : 청일전쟁 이후부터 1912년(메이지 45년) 무렵까지

  이 시기는 정부가 정당과 제휴하는 방침을 취하여 정당도 또한 관료(官僚)·군벌(軍閥)에 앞서, 의회의 의 권한이 높아진 때이다. 정당의 근대화를 외치는 가운데 민주적인 원칙을 추진하자고 하는 움직임은 정당내각의 발전을 가져온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가 촉진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노동운동도 발전하게 되어 파업 등도 발생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곧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을 제정하여 탄압을 꾀하게 되었다.

 (4) 제3기 : 1912년(다이쇼 원년)부터 쇼와 초기 무렵까지

  이 시기는 자유주의적 세력이 차츰 세력을 넓히고, 정당의 비중이 다소 높아진 이른바 「정당내각」에 의한 정치가 행해진 때였다. 특히 2번에 걸친 「호헌운동」(護憲運動)은 정당내각 확립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성과로서 이른바 「헌정(憲政)의 상도(常道)[각주:1]가 헌법관습으로 인정되고, 정당내각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내각도 재벌(財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군벌관료와 손을 잡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등을 제정하기에 이르러 이 시기의 민주정치의 성격도 그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5) 제4기 : 쇼와 초기부터 1945년(쇼와 20년)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는 입헌주의의 기능이 절반은 정지한 때이다. 정치는 좌익운동을 강압적으로 끊으려는 방침을 취하고, 우익운동에 대하여는 영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로 인하여 우익은 군벌과 결탁하여 힘을 가지고 약한 의회를 더욱 후퇴시켰으며, 결국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5·15 사건」(1932년)[각주:2]이나 「2·26 사건」(1936년)[각주:3]의 발생과 함께 중일전쟁(1937년)의 격발이라는 어두운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군벌 및 관료의 독재는 「국가총동원법」을 낳았고, 이에 의회의 법률의결권은 실질적인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1940년(쇼와 15년)에는 각 정당이 어쩔 수 없이 해산되었고, 새로이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大政翼賛会, 다이세이요쿠산카이)가 결성되는 등 일본의 정당정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부활하지 못했다.



Ⅱ. 일본국헌법의 제정


1. 총설

 (1) 포츠담 선언의 수락과 점령체제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일본정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포츠담 선언의 수락은 메이지 헌법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즉 그때부터 일본의 통치권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권한을 바탕으로 위임된 것이 되는, 「간접통치」의 방식이 되었다.[각주:4] 그리고 이러한 점령체제는 「대일평화조약」(對日平和條約)[각주:5]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포츠담 선언은 13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헌법제정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규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우선 민주주의적 경향의 부활을 강화하는 한편 언론과 종교 및 사상과 같은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확립하는 것(제10항), 즉 신격천황제(神格天皇制)를 부정하고, 봉건적 신분제도를 폐지함과 함께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고, 교육의 민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적·평화적인 정치조직을 확립하는 것(제12항), 즉 의회제도와 선거제도의 개혁, 정당의 편성, 지방제도의 개혁 등을 행하는 것이다.

 (2) 헌법개정의 경과

  1) 마쓰모토(松本) 위원회의 조사
  연합군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시데하라(幣原) 총리가 총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메이지 헌법의 민주화를 포함한 일본의 전통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성을 시사(示唆)하였다. 그에 이어 정부는 마쓰모토 국무대신을 주임으로 하는 「헌법문제조사위원회」(1945년(쇼와 20년) 10월 25일)를 설치하였다. 위원회는 이른바 「마쓰모토 4원칙」을 바탕으로 개정작업을 시작했으며, 다음 해 2월 8일에 총사령부에 제출하였다(이른바 「마쓰모토 안」).

  2) 맥아더 초안의 제시
  그런데 1946년 2월 1일에 마쓰모토 안이 마이니치 신문에 의하여 공개되었고, 총사령부도 이를 알게 되었다. 이를 안 맥아더는 그러한 보수적 감상의 정부에게는 민주적 헌법의 제정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마쓰모토 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방침을 굳혀 총사령부에서 독자적인 헌법초안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맥아더는 총사령부에 대하여 세가지 원칙[각주:6]과 이른바 SWNCC-228[각주:7]을 지침으로 하여 극비리에 작업을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총사령부는 곧 헌법초안을 완성하였고, 2월 13일에 일본정부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헌법초안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작성된 것도 놀랍지만, 당시의 정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혁명적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총사령부의 강한 의향과 국제적·국내적 여러 사정을 고려한 뒤 결국 초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 제국의회의 심의·공포·시행
  정부는 이 초안을 기본으로 작업을 진행하여 3월 6일에 「헌법개정초안요강」으로 대중에 공표하였다. 그리고 그 초안은 중의원 총선거(4월 10일) 뒤에 열린 제90제국의회(6월 20일)에서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상정되었다. 중의원 및 귀족원은 그 초안을 수정가결하였고, 10월 29일에 추밀원에서 가결된 초안은 천황의 재가를 거쳐 1946년(쇼와 21년) 11월 3일 「일본국헌법」으로 공포되어 다음 해 5월 3일[각주:8]에 시행되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法理)

 (1) 개설(槪說)

  일본국헌법은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바탕으로 점령통치하에서 총사령부가 원안을 작성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뒤에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를 따라 시행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의 군주주권원리에서 일본국헌법의 국민주권원리로의 이행은 헌법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그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2) 일본국헌법 제정의 법리

  1) 헌법개정무한계설
  헌법개정에는 내용상의 한계는 없다고 하는 견해에 의하면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따라 천황의 칙명으로 개정안이 발의되어 제국의회의 의결 및 천황의 재가를 거쳐 공포된 형식으로 성립된 것이다. 즉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므로 흠정헌법(欽定憲法)이며, 법적 연통성(連通性)을 가진다."는 것이다.[각주:9]

  2) 헌법개정한계설
  헌법개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견해에서는 미야자와 도시요시(宮沢俊義)의 「8월 혁명설」이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통설). 그 근거로 ①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으며, "일본의 최종(最終)의 정치형태"는 "일본국민의 자유에서 표명된 의사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는 전제에서 일본국헌법은 메이지 헌법 73조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메이지 헌법의 근본 바탕인 신권주권(神權主權, 천황주권)을 변경한 것, ② 더욱이 천황주권을 국민주권으로 전환한 것은 일본 정부도 또한 천황의 의사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합법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등에서 그 변혁은 헌법적으로는 「혁명」이라고 한다.[각주:10]


참고문헌
  • 우에다 마사카즈(上田正一),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 사가노쇼인(嵯峨野書院), 2008년.
  1. 「헌정<FONT color=#8e8e8e>(憲政)</FONT>의 상도<FONT color=#8e8e8e>(常道)</FONT>」란 정부에 대하여 중의원의 다수당이 지배권을 갖는 정당내각제를 말한다. [본문으로]
  2. 「5·15 사건」이란 해군청년장교 일부가 수상관저를 급습하여 당시 호헌운동의 우두머리로 불리던 이누카이<FONT color=#8e8e8e>(犬養, 당시 78세) </FONT>총리를 살해하였다. 전전<FONT color=#8e8e8e>(戰前)</FONT>의 정당내각시대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으로, 국가를 전쟁의 늪에 깊이 빠뜨리는 기로로 몰고간 결정적인 요인이다. [본문으로]
  3. 「2·26 사건」이란 황도파<FONT color=#8e8e8e>(皇道派)</FONT> 청년장교가 1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쇼와 유신<FONT color=#8e8e8e>(昭和維新)</FONT>의 단행·존황토간<FONT color=#8e8e8e>(尊皇討奸 :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FONT> 등의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정부 요인을 살해하고 나가타초<FONT color=#8e8e8e>(永田町)</FONT> 일대를 점거한 사건이다. 이후 천황의 토벌명령과 함께 계엄령이 내려졌고, 진압되었다. [본문으로]
  4. 「간접통치」란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 원칙적으로는 일본정부를 통하여 행사하고, 때로는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5. 「대일평화조약」이란 일본과 49개 연합국이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한 평화조약으로, 소련과 인도는 불참하였다. [본문으로]
  6. ① 천황제를 개혁하는 것, ② 전쟁의 방기<FONT color=#8e8e8e>(放棄)</FONT> 및 군비의 불보지<FONT color=#8e8e8e>(不保持)</FONT>, 교전권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③ 봉건제를 폐지하는 세가지 원칙을 말한다. [본문으로]
  7. SWNCC는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FONT color=#8e8e8e>(국무-육군-해군 삼성 조정위원회)</FONT>의 약칭으로, SWNCC-228은 삼성 조정위원회 문서 228호 「일본 통치제도의 개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FONT color=#8e8e8e>(国民の祝日に関する法律)</FONT> 제2조는 이 날을 「헌법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9. 사사키 소이치<FONT color=#8e8e8e>(佐々木惣一)</FONT>, 『일본국헌법론』<FONT color=#8e8e8e>(日本国憲法論)</FONT>, 유히카쿠, 1952년. [본문으로]
  10. 미야자와 도시요시, 『일본국헌법 <FONT color=#8e8e8e>(코멘타르 별책부록)</FONT>』, 315쪽, 닛폰효론샤, 1955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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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帝國憲法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 공포
메이지 23년(1890년) 11월 29일 시행


고문(告文)

천황 짐(朕)은 삼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신령께 고하노니, 천황 짐은 천양무궁(天壤無窮:하늘과 땅처럼 무궁한)의 광모(宏謨:큰 뜻)에 따라 유신(惟神:신령)의 보조(寶祚:보위)를 승계하고, 구도(舊圖:옛 뜻)를 보지(保持)하여 감히 실추(失墜)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살피건대 세국(世局:시국)의 진운(進運)에 응하고 인문의 발달에 따라, 가로되 황조황종의 유훈(遺訓)을 명징(明徵)하여 전헌(典憲)을 성립하고 조장(條章)을 소시(昭示:선포)하여, 안으로는 자손이 솔유(率由:따름)할 바로 하고 밖으로는 신민익찬(臣民翼贊)의 길을 넓히고, 영원히 준행(遵行:그대로 따름)하게 하여 더욱 국가의 비기(丕基:왕업)을 공고히 하여 팔주(八洲:일본) 민생의 경복(慶福)을 증진해야 할 것이므로 이에 황실전범(皇室典範) 및 헌법을 제정합니다. 살피건대 이는 황조황종께서 후예(後裔)에게 남기신 통치의 홍범(洪範)을 소술(紹述:이음)하는 것에 따라 짐이 몸소 체득하여 거행하는 것은 황조황종 및 우리 황고(皇考:선대 임금)의 위령(威靈)에 의자(倚藉:의지)하는 것에 그 연유를 두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천황 짐은 우러러 황조황종 및 황고의 신우(神祐:도움)를 빌고 함께 짐이 현재와 장래에 신민을 솔선하고 또한 헌장(憲章)을 이행(履行)하여 어그러짐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원컨대 신령은 이를 살피소서.


헌법발포칙어(憲法發布勅語)

짐은 국가의 융창(隆昌)과 신민(臣民)의 경복(慶福)을 중심의 흔영(欣榮)으로 삼으며, 짐이 조종(祖宗)에게 받은 대권(大權)에 의해 현재와 장래의 신민에 대하여 이 불마(不磨)의 대전(大典)을 선포(宣布)한다.

살피건대 우리 조(祖)와 종(宗)께서는 신민(臣民)의 조선(祖先)의 협력(協力)과 보익(輔翼:보좌)에 의해 우리 제국을 조조(肇造:처음 만듦)하여 무궁히 드리웠다. 우리 신성한 조종의 위덕(威德)과 함께 신민이 충실히 용무(勇武)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순공(殉公)하였으므로 광휘(光輝)로운 국사(國史)의 성적(成跡)을 남긴 것이다. 짐은 우리 신민이 곧 조종의 충량(忠良)한 신민의 자손임을 회상(囘想)하고, 그 짐의 뜻을 봉체(奉體)하고, 짐의 일을 장순(奬順:따라 수행함)하고, 더불어 화충협동(和衷協同:마음을 합하여 협력함)하여 더욱 우리 제국의 광영(光榮)을 중외(中外)에 선양(宣揚)하고 조종의 유업을 영구히 공고하게 하려는 희망을 함께 하여 이 부담을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상유(上諭)

짐은 조종(祖宗)의 유열(遺烈)을 이어받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제위(帝位)에 올라, 짐이 친애하는 바의 신민이 곧 짐의 조종께서 혜무자양(惠撫慈養:사랑해 어루만지고, 자애롭게 기름)하신 바의 신민임을 헤아려, 그 강복(康福)을 증진하고 그 의덕(懿德:아름다운 덕)과 양능(良能)을 발달시키도록 하고, 또한 그 익찬(翼贊)에 의하여 함께 더불어 국가의 진운(進運)을 부지(扶持:도와 지탱하다)할 것을 바라며, 메이지(明治) 14년 10월 12일의 조명(詔命)을 이천(履踐:따름)하여 이에 대헌(大憲)을 제정하고 짐이 솔유(率由)하는 바를 밝히고, 짐이 후사(後嗣) 및 신민(臣民)과 신민의 자손되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순행(循行)하는 바를 알게 한다.

국가통치의 대권은 짐이 이를 조종에게서 이어받아 이를 자손에게 전하는 바이다. 짐과 짐의 자손은 장래 이 헌법의 조장에 따라 이를 행하는 것을 그르침이 없을 것이다.

짐은 우리 신민의 권리 및 재산의 안전을 귀중(貴重)하고 또한 이를 보호하며 이 헌법 및 법률의 범위 내에서 그 향유(享有)를 완전하게 할 것을 선언한다.

제국의회는 메이지 23년에 이를 소집하고, 의회 개회의 때를 이에 따라 헌법이 유효하게 하는 때로 한다.

장래 만일 이 헌법의 어떠한 조장(條章)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한 시의(時宜:마땅한 때)가 이르면 짐과 짐의 계통(繼統)의 자손은 발의(發議)의 권(權)을 가지며 이를 의회에 부치며, 의회는 이 헌법에서 정하는 요건에 의하여 의결하는 외에는 짐과 짐의 자손 및 신민이 엄하게 이의 분경(紛更:어지러이 고치다)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짐과 재정(在廷)의 대신은 짐을 위하여 이 헌법을 시행하는 임무를 가지며, 짐의 현재 및 장래의 신민은 이 헌법에 대하여 영원히 순종의 의무를 질 것이다.

어명어새(御名御璽)

메이지(明治) 22년 2월 11일

내 각 총 리 대 신  백작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
추 밀 원   의 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외  무   대  신  백작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해  군   대  신  백작 사이고 주도(西鄉從道)
농 상 무  대  신  백작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  법   대  신  백작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
대장대신 겸 내무대신  백작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육  군   대  신  백작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문  부   대  신  자작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체  신   대  신  자작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대일본제국헌법

제1장 천황(天皇)

제1조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天皇)이 이를 통치한다.

제2조
 황위(皇位)는 황실전범(皇室典範)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남자손(皇男子孫)이 이를 계승한다.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總攬)하고 이 헌법의 조규(條規)에 따라 이를 행한다.

제5조
 천황은 제국의회(帝國議會)의 협찬(協贊)을 거쳐 입법권을 행한다.

제6조
 천황은 법률을 재가(裁可)하며 그 공포 및 집행을 명한다.

제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며 그 개회와 폐회, 정회 및 중의원(衆議院)의 해산을 명한다.

제8조
 천황은 공공의 안전을 보지(保持)하거나 그 재액(災厄)을 피하기 위하여 긴급한 필요에 따라 제국의회의 폐회의 경우에 법률을 대신하는 칙령(勅令)을 발한다.
 이 칙령은 다음 회기에 제국의회에 제출하여야 하며, 만일 의회에서 승락(承諾)하지 않는 때에는 정부는 장래에 향하여 그 효력을 잃음을 공포하여야 한다.

제9조
 천황은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安寧秩序)를 보지(保持)하고 신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명령(命令)을 발하거나 또는 발하도록 한다. 단 명령으로 법률을 변경할 수는 없다.

제10조
 천황은 행정각부의 관제 및 문무관의 봉급을 정하고 또한 문무관을 임면(任免)한다. 단 이 헌법 또는 다른 법률에 특례를 둔 경우에는 각각 그 조항에 따른다.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2조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 및 상비병액(常備兵額)을 정한다.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하며, 제반의 조약을 체결한다.

제14조
 천황은 계엄(戒嚴)을 선포한다.
 계엄의 요건 및 효력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제15조
 천황은 작위(爵位)와 훈장(勳章) 기타의 영전(榮典)을 수여한다.

제16조
 천황은 대사(大赦)와 특사(特赦), 감형(減刑) 및 복권(復權)을 명한다.

제17조
 섭정(攝政)을 두는 것은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대권을 행한다.


제2장 신민권리의무(臣民權利義務)

제18조
 일본신민의 요건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19조
 일본신민은 법률과 명령이 정하는 바의 자격에 따라 균등하게 문무관에 임명되며 또한 기타의 공무(公務)에 취임할 수 있다.

제20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좇아 병역의 의무를 진다.

제21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좇아 납세의 의무를 진다.

제22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제23조
 일본신민은 법률에 따르지 않고서 체포(逮捕)나 감금(監禁), 심문(審問) 및 처벌(處罰)을 받지 아니한다.

제24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재판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25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허락 없이 주소(住所)의 침입을 받거나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한다.

제26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서(信書)의 비밀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제27조
 일본신민은 그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처분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28조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아니하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위배되는 한에서 신교(信教)의 자유를 가진다.

제29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언론과 저작, 인행(印行) 및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제30조
 일본국민은 상당한 경례(敬禮)를 지켜 따로 정하는 바의 규정(規程)에 좇아 청원을 할 수 있다.

제32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전시(戰時) 또는 국가사변(國家事變)의 경우에 따라 천황대권이 시행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제32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육해군의 법령 또는 기율(紀律)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군인에게 준용한다.


제3장 제국의회(帝國議會)

제33조
 제국의회는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의 양원으로 이를 성립시킨다.

제34조
 귀족원은 귀족원령(貴族院令)이 정하는 바에 따라 황족과 화족(華族) 및 칙임(勅任)된 의원으로 이를 조직한다.

제35조
 중의원은 선거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선된 의원으로 이를 조직한다.

제36조
 누구라도 동시에 양 의원(議院)의 의원(議員)이 될 수 없다.

제37조
 무릇 법률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칠 것을 요한다.

제38조
 양 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또한 각각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제39조
 양 의원의 한 쪽에서 부결된 법률안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제출할 수 없다.

제40조
 양 의원은 법률 또는 기타의 사건에 대하여 각각 그 의견을 정부에 건의(建議)할 수 있다. 단 채납(採納)되지 못한 것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건의할 수 없다.

제41조
 제국의회는 매년 그를 소집한다.

제42조
 제국의회는 3개월을 그 회기로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칙령(勅令)으로 이를 연장할 수 있다.

제43조
 임시긴급(臨時緊急)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상회(常會)의 외에 임시회(臨時會)를 소집할 수 있다.
 임시회의 회기를 정하는 것은 칙령에 의한다.

제44조
 제국의회의 개회 및 폐회와 회기의 연장 및 정회(停會)는 양원이 동시에 이를 행하여야 한다.
 중의원의 해산을 명받은 때에는 귀족원은 동시에 정회되어야 한다.

제45조
 중의원의 해산을 명받은 때에는 칙령으로 그 새로운 의원을 선거하게 하여 해산의 날로부터 5개월 이내에 이를 소집하여야 한다.

제46조
 양 의원은 각각 그 총 의원의 삼분의 일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의사(議事)를 열고 의결을 할 수 없다.

제47조
 양 의원의 의사(議事)는 과반수로 의결하며 가부동수인 때에는 의장이 결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48조
 양 의원의 회의는 공개한다. 단 정부의 요구 또는 그 원(院)의 의결에 따라 비밀회로 할 수 있다.

제49조
 양 의원은 각각 천황에게 상주할 수 있다.

제50조
 양 의원은 신민(臣民)이 정출(呈出)한 청원서를 받을 수 있다.

제51조
 양 의원은 이 헌법 및 의원법(議院法)이 정하는 이외에 내부의 정리(整理)에 필요한 제(諸)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제52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의원(議院)에 대하여 발언한 의견 및 표결에 대하여 원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 단 의원(議員) 스스로 그 언론(言論)을 연설이나 간행, 필기(筆記) 또는 기타 방법으로 공포하는 때에는 일반(一般)의 법률에 따라 처분된다.

제53조
 양 의원의 의원(議員)은 현행범죄 또는 내란이나 외환에 관한 죄를 제외하고 회기 중에 그 원(院)의 허락 없이 체포(逮捕)되지 아니한다.

제54조
 국무대신(國務大臣) 및 정부 위원(委員)은 언제라도 각 의원(議院)에 출석하고 또한 발언할 수 있다.


제4장 국무대신 및 추밀고문(樞密顧問)

제55조
 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輔弼)하며 그 책임을 진다.
 무릇 법률이나 칙령(勅令) 기타 국무에 관한 조칙(詔勅)은 국무대신의 부서(副署)를 요한다.

제56조
 추밀고문(樞密顧問)은 추밀원 관제가 정하는 바에 따라 천황의 자순(諮詢)에 응하여 중요한 국무를 심의(審議)한다.


제5장 사법(司法)

제57조
 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법률에 따라 재판소가 이를 행한다.
 재판소의 구성은 법률을 따라 이를 정한다.

제58조
 재판관은 법률이 정하는 자격을 갖춘 자에 따라 이를 임명한다.
 재판관은 형법의 선고(宣告) 또는 징계의 처분에 따르는 외에는 직(職)을 면하지 아니한다.
 징계의 조규(條規)는 법률이 정하는 바를 따른다.

제59조
 재판의 대심(對審)이나 판결은 그를 공개한다. 단 안녕질서(安寧秩序) 또는 풍속(風俗)을 해할 염려 있는 때에는 법률에 따라 또는 재판소의 결의를 따라 대심의 공개를 정지(停止)할 수 있다.

제60조
 특별재판소의 관할에 속하는 경우는 다른 법률이 정하는 바를 따른다.

제61조
 행정관청의 위법처분에 따라 권리를 상해(傷害)한 경우의 소송으로서 다른 법률에 따라 정하는 행정재판소의 재판에 속하는 경우에는 사법재판소가 그를 수리하지 못한다.


제6장 회계(會計)

제62조
 새로운 조세(租稅)를 매기거나 세율(稅率)을 변경하는 것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단 보상(報償)에 속하는 행정상의 수수료(手數料) 및 기타의 수납금(收納金)은 전항에 따르지 아니한다.
 국채(國債)를 기채(起債)하거나 예산(豫算)에 정하는 것을 제외한 국고의 부담이 되는 계약을 하는 것은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한다.

제63조
 현행의 조세는 새로 법률에 따라 이를 고치지 않는 한은 기존에 따라 이를 징수한다.

제64조
 국가의 세출(歲出)과 세입(歲入)은 매년 예산으로 제국의회의 협찬을 거쳐야 한다.
 예산의 관항(款項)을 초과하거나 또는 예산 외에 생긴 지출이 있을 때에는 후일(後日) 제국의회의 승락(承諾)을 구할 것을 요한다.

제65조
 예산은 먼저 중의원에 제출하여야 한다.

제66조
 황실경비(皇室經費)는 현재의 정액(定額)에 따라 매년 국고에서 이를 지출하며, 장래 증액(增額)을 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제국의회의 협찬을 요하지 아니한다.

제67조
 헌법상의 대권에 기한 기정(既定)의 세출 및 법률의 결과에 따르거나 법률상 정부의 의무에 속하는 세출은 정부의 동의 없이는 제국의회가 이를 폐제(廢除)하거나 또는 삭감할 수 없다.

제68조
 특별한 수요(須要)로 인한 때에 정부는 미리 연한(年限)을 정하여 계속비(繼續費)로서 제국의회의 협찬을 구할 수 있다.

제69조
 피할 수 없는 예산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또는 예산 이외에 생긴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예비비를 둘 수 있다.

제70조
 공공의 안전을 보지(保持)하기 위하여 긴급의 수용(需用)이 있는 경우에 이를 내외의 정형(情形)으로 인하여 정부가 제국의회를 소집할 수 없는 때에는 칙령에 따라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전항의 경우에 따름은 다음의 회기에 제국의회에 제출하여 그 승락(承諾)을 구할 것을 요한다.

제71조
 제국의회에서 예산을 의정(議定)하지 않거나 또는 예산 성립에 이르지 못한 때에는 정부는 전년도의 예산을 시행할 수 있다.

제72조
 국가의 세출과 세입의 결산은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이 이를 검사하고 확정하며, 정부는 그의 검사보고와 함께 이를 제국의회에 제출하여야 한다.
 회계검사원의 조직 및 직권(職權)은 법률에 따라 이를 정한다.


제7장 보칙(補則)

제73조
 장래 이 헌법의 조항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칙령(勅令)을 따라 의안(議案)을 제국의회에 부쳐야 한다.
 이 경우에 양 의원은 각각 그 총원(總員) 삼분의 이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의사를 열 수 없으며, 출석의원 삼분의 이 이상의 다수를 얻지 않으면 개정의 의결을 할 수 없다.

제74조
 황실전범(皇室典範)의 개정은 제국의회의 의결을 거침을 요하지 않는다.
 황실전범을 따라 이 헌법의 조규를 변경할 수 없다.

제75조
 헌법 및 황실전범은 섭정(攝政)을 두는 동안에 이를 변경할 수 없다.

제76조
 법률이나 규칙, 명령 또는 하등(何等)의 명칭(名稱)을 쓰는가에 얽매이지 않고 이 헌법의 모순(矛盾)되지 않는 현행의 법령은 모두 준유(遵由)의 효력을 가진다.
 세출상 정부의 의무에 관한 현재의 계약 또는 명령은 모두 제67조의 례(例)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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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은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 확립된 일본의 헌법 학설이다. 통치권(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독일의 공법학자 게오르그 옐리네크(Georg Jellinek)로 대표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국가주권설과 군주주권설·인민주권설

‘주권(이 경우에는 국가의 최고결정권을 지칭)은 누구에게 있는가?’하는 질문에 ‘군주’라고 대답하는 것이 군주주권설이며, ‘국민’ 또는 ‘인민’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국민주권설 또는 인민주권설이지만, ‘국가’라고 대답해 주권의 소재를 애매하게 만든 것이 국가주권설이다. 군주주권설과 국민주권설의 중간적 위치에 서서 양 학설을 절충한 이론이므로, 정치체제의 변화에서 온건하지만 진보적인 사상으로 널리 수용될 수 있다.


천황기관설의 역사

대일본제국헌법의 해석은 당초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호즈미 야쓰카(穂積八束) 등이 주창한 천황주권설이 지배적인 학설의 위치에서, 번벌(藩閥) 관료 세력의 전제지배(초연 내각)를 이론적인 면에서 지탱했다. 천황주권설은 주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학설로, 군주주권설이 일본에 적용된 형태이다. 또한 이러한 천황주권설은 궁극적으로는 천황의 선조(황조황종)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칙주권이라고도 불렸다(왕권신수설이 일본에 적용된 형태).

천황기관설의 시작 이러한 천황주권설에 대해 도쿄제국대학 교수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徳郎)는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귀속된다’고 하는 국가법인설에 근거하여, 천황은 국가의 여러 기관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 천황기관설을 주창해 천황의 신격적 초월성을 부정했다. 이치키 교수가 도입한 국가법인설은 19세기 초기의 독일에서 인민주권설에 대응하여 군주주권설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외견적 입헌군주제). 청일전쟁 이후에는 정당 세력과 타협을 꾀하고 있던 관료세력에게, 최고기관인 천황의 권한을 절대시한다는 이유로 중용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천황기관설은 이치키 교수의 제자이자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에 의해 의회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미노베는 비스마르크 시대 이후의 독일의 군권 확대에 대한 저항 이론으로 국가법인설을 다시 이끌어 낸 옐리네크의 학설을 통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는 내각을 통해 천황의 의사를 구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은 정당정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론적 구성을 갖는다.[각주:1]

  • 국가는 하나의 단체로 법률상의 인격을 갖는다.
  •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속하는 권리다.
  • 국가는 기관에 의해 행동하며, 일본에서 그 최고기관은 천황에 해당한다.
  • 통치권을 행하는 최고권한인 주권은 천황이 갖는다.
  • 최고기관인 조직의 차이에 따라 정체가 구별된다.

다이쇼 시대 초기에는 호즈미 교수의 제자였던 도쿄제국대학 교수 우에스키 신키치(上杉慎吉)와 미노베의 논쟁이 일어난다. 서로 천황의 왕도적 통치를 이야기하지만, 우에스기는 천황과 국가를 동일시해 ‘천황은 자신을 위해 통치한다’거나 ‘국무대신의 도움 없이 통치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미노베는 ‘천황은 국가인민을 위하여 통치하는 것이지, 천황 자신을 위해 통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

이러한 논쟁 이후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사사키 소이치(佐々木惣一)도 거의 같은 학설을 따랐으며, 미노베의 천황기관설은 통설로 자리잡아갔다. 민본주의와 함께 의원내각제의 관행, 정당정치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유지하고, 미노베의 저서가 고등문관시험 준비의 필독서가 되면서 다이쇼 시대 중기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는 천황기관설이 국가가 공인한 헌법학설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같은 시기의 섭정이자 나중에 천황이 되는 쇼와 천황 또한 천황기관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미노베와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던 우익 사상가 기타 잇키도 한때는 천황기관설을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천황기관설 사건

군부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국체명징운동이 일어나고,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사실상 탄압되면서 천황기관설도 국체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배격되기 시작했다.

1935년 2월 19일에는 귀족원 본회의에서 육군 중장 기쿠치 다케오(菊池武夫) 남작이 미노베 다쓰키치(당시 귀족권 칙선의원·도쿄제국대학 명예교수·제국학사원 대표·문관고등시험위원) 의원의 천황기관설을 가리켜, ‘완만한 모반이며, 명백한 반역’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미노베 의원을 가리켜 ‘학문을 이용하는 도둑’(学匪)이라거나 ‘모반인’ 등으로 맹비난했다.

이 연설을 계기로 군부와 우익 세력에서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월 25일에는 미노베가 천황기관설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한 ‘일신상의 변명’이라는 해명 연설을 발표하자, 회의장에서는 박수가 쏟아졌으며, 기쿠치 남작도 ‘이정도면 문제 없’다고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회의장 밖에서는 우익단체나 군인 단체가 소란을 피웠고, 개중에는 기관설을 오해해 ‘외람되게도 천황폐하를 기관총(기관차라는 설도 있음)에 빗대는 것은 무슨 일이냐’하며 격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노베의 해명 연설에도 불구하고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목소리는 줄어들지 않았고, 연설내용이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우익이나 군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야당과 정우회는 기관설론자였던 추밀원 의장 이치키 기토쿠로나 내각법제국 장관 가나모리 도쿠지로 등의 실각,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의 타도 등을 계획했다. 정부는 의회 폐회 후 군부대신의 요구에 따라 미노베를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며, 출판법 위반을 명목으로 하여 《헌법촬요》나 《축조헌법정의》(逐条憲法精義), 《일본국헌법의 기본주의》의 3종의 저서를 발행금지 처분에 처했다. 또한 문교부는 ‘국체명징훈령’을 발표했으며, 곧 8월 3일과 10월 15일의 양회에 걸쳐 국체명징성명을 발표하여 통치권의 주체는 천황에게 있다고 발표했고, 천황기관설의 교수를 금지했다.

미노베는 내무성에 불경죄로 고발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담당한 검사는 물론 미노베의 저서를 통해 천황기관설을 배우고, 미노베가 시험관으로 있던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가 된 사람이었다. 조사가 끝난 뒤, 미노베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9월 18일에 귀족원 의원을 사직했다. 다음해 미노베는 천황기관설에 반대하는 우익에게 폭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1937년, 문부성은 《국체의 본위》라는 책을 발행해 전국의 교육기관에 배포했다. 이 책은 일전의 국체명징성명을 바탕으로, 천황기관설은 서양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기관설 문제는 서양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부 지식인들의 폐풍에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

2006년, 미국의회도서관에서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헌법학자 19명에 대해 일본 문부성 사상국이 보복경고를 통해 전향이나 사상의 수정을 강요한 내용을 담은 기록이 발견되었다. 미국이 종전 이후 일본에서 접수한 〈각 대학에 있어서의 헌법학설 조사에 관한 문서〉로, 약 450쪽 분량이다. 개인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정부에 의한 사상통제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천황기관설의 사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 헌법 개정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하지만 천황기관설의 중추였던 미노베는 헌법 개정에 단호히 반대했지만, 정부나 여러 정당의 헌법 초안은 모두 천황기관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황을 최고기관으로 하지 않고, 국민주권의 원칙에 입각한 일본국 헌법이 성립하면서, 천황기관설은 헌법 해석 학설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1. 중의원헌법조사회 사무국이 작성한 〈메이지헌법과 일본국헌법에 관한 기초적 자료〉에서 인용·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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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