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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1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 이후 정세 (9.1)
  2. 2008.04.28 통합민주당이 사는 길 (2)
  3. 2008.04.07 총선 단상
  4. 2007.11.14 오자와 이치로 (1)

민주, 연립협의를 타진 / 사민당·국민신당도 적극적[각주:1]

 민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 연립정권 수립을 향한 협의를 타진했다. 한편으로 9월 14일 전후로 계획된 수상지명선거를 위한 특별국회 소집시기를 다음 주로 앞당기도록 여당에 요청하는 것도 검토에 들어갔다. 자민당은 임시 임원회를 열어 아소 총리의 후임을 정하는 총재 선거를 특별국회 이후인 9월 18일에 고시하고, 28일에 투표하는 일정을 결정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사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亀井静香) 새 대표와의 전화통화에서 연립 협의를 타진했다. 양당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연립정권 수립이 확실해 보인다.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은 야마오카 겐지(山岡賢次) 국회대책위원장에 대해 특별국회 일정에 대해 여당과 협의를 서두르도록 지시하고, 야마오카 위원장은 9월 1일 자민당의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국회대책위원장과 이후 일정을 협의한다.

 사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에 열린 3임원 회의에서 상임간사회를 9월 1일에, 전국대표자회의를 그 다음날 열어 연립 참가를 논의할 방침을 확인했다. 와타누키 당대표와 가메이 간사장이 모두 낙선한 국민신당은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 대표대행의 승격을 정하고, 연립 협의에 임하는 태세를 정비했다.

 선거에서 대패한 자민당은 아소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책임을 강하게 느낀다. 총재를 사임하고자 한다.”고 정식으로 표명하고, 그 후 열린 임시 임원회에서 총재 선거 일정을 정하고 당 소속 양원(兩院) 의원과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연합 대표(각 3인, 총 141)의 투표로 선출한다는 방식도 정했다. 또한 9월 4일에 전국간사장회의, 8일에는 양원 의원총회를 열어 총선거를 총괄하는 것도 결정했다.

 특별국회에서 열릴 수상지명선거는 아소 총재인 채로 진행될 예정. 당내에서는 총선 참패의 책임이 있는 총리의 이름을 쓰는 데에 반발도 예상되지만, 아소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졸속으로 새 총재를 뽑는 것은 지방 당원·당우(黨友)의 불만의 바탕이 된다.”고 언급.



「오자와 지배」를 경계, 간판인 정치주도는 불분명[각주:2]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함으로써 정권교체가 결정된 8월 30일 밤. 도쿄 롯폰기(六本木)의 한 빌딩에 마련된 민주당의 개표센터의 한편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간 나오토(菅直人), 고시이시 아즈마(輿石東)의 세 대표대행, 그리고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이 머리를 맞댔다.

 오자와 대행과 가까운 고시이시 대행이 입을 열어 불쾌감을 나타냈다.

 “도대체 정권이행팀이란게 무엇인가.”

 관방장관이나 간사장 등의 골격을 먼저 굳히고, 정권이행에 들어간다. 그러한 정권이행팀이 오카다 대표 이후 당의 구상이다. 하토야마 대행이나 오카다 간사장은 이번에도 그러한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당내의 주도권 다툼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오카다 간사장은 오자와 대행과 거리가 있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의 지지가 두텁다. 이날 오카다 간사장의 측근은 그에게 간사장 유지를 청하며 이렇게 못박았다.

 “오자와 이치로씨가 간사장이 되어 민주당이 오자와 지배가 되지 않도록.”

 오자와 대행에게 당 운영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는 당내의 의견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하토야마 대표는 31일 미명의 회견에서 궤도 수정을 꾀했다.

 “(인사를) 일부만 정하는 것은 다른 균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야당으로서의 인사보다 정권의 인사가 훨씬 무겁다. 일부라도 먼저 인선하지 않으면 수습불가능한 사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염려에서 인사는 모두 보류되었다.


■ 이중구조 권력 재현의 위기감

 민주당 내에서 오자와 이치로 대행에게 거리를 두는 의원들이 경계하는 것은, 여당 실력자가 정부를 바깥에서 조종하는 권력의 이중구조의 출현이다.

 1993년, 여야 역전으로 탄생한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붕괴된 “호소카와 트라우마”(細川トラウマ)가 머리를 스친다. 오카다 간사장은 저서 『정권교체』(政権交代)에서 호소카와 정권이 단명(短命)한 이유는 “최대 실력자인 오자와씨가 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7개 정당과 1개 회파(교섭단체)를 합친 연립정권의 중심이 된 오자와 이치로(당시 신생당 대표간사) 대행은 입각하지 않은 이유를 “당의 조정자가 각료가 되면 여당을 모을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신정권 인사의 초점도 분명 그에 있다. 하토야마 대표나 간 나오토 대행이 간사장을 내각 밖에 두어 당 운영을 따로 두는 구상을 그리면서 오자와 씨에게 거리를 두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자와 간사장 기용”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당이 내건 “정치 주도”를 실현하기 위한 기구개혁과 주요 간부 인사는 밀접하게 얽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카다 간사장이 대표를 맡았던 2005년, 정치 주도를 목표로 해 만들어진 민주당의 “오카다 정권 500일 플랜”에는 정권이행위원회가 명기되어 있다. 투개표 다음날에 수상이나 관방장관 예정자와 간사장을 정하고, 정권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토야마 대표는 기자단에게 “연립협의에는 우선 간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집행부 체제 하에서 당분간 움직인다.”고 명언했고, 정권이행팀 설치를 그리던 오카다 대행도 “대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한 방침을 따르는게 당연하다.”고 언급했다.

 “정치 주도”는 이번 총선거에서도 전면으로 내건 간판. 목적은 분명 권력의 이중구조를 없애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여당의 이원체제에서 정책 결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당 간부가 주요 각료를 겸임한다. 족벌 의원과 관료의 유착을 지우고, 정책결정을 신속하게 한다. 정책결정을 국민이 보더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일련의 개혁의 토대라고도 할 수 있고, 정책집에서도 “하토야마 정권 구상”이라며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정책집에서는 예산의 골격 등을 결정하도록 수상 직속의 “국가전략국” 설치도 담고 있다. 담당 대신은 중요 각료의 위치를 가지며, 정조회장이 겸임한다. 행정쇄신회의에서 행정력 낭비나 부정을 배제하는 구상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달 중순으로 보이는 총리 선출이나 조각(組閣)이 가까워지면서 이미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지만, 간부들이 총선 유세에 집중하면서 늦어진 면은 부정할 수 없다. 8월 31일 낮에 간 나오토 대행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이 당본부에서 하토야마 대표와 국가전략국에 대하여 협의했으나, 그 상세한 설계는 당간부 사이에서 충분히 공유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자와 씨의 이중권력 구조라고 계속 불리지는 않을까. 8월 30일 밤의 니혼 테레비(日本テレビ)의 프로그램에서 오카다 간사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사라진다. 오자와 씨도 여러 곳에서 ‘인사는 대표가 정한다. 나는 대표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연립 제2당은 “여당 협의의 장을”

 어느정도 내각과 민주당을 일원화한다고 하더라도 연립정권에 참가하는 다른 당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는다.

 “연립에 대해 간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오전, 사회민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의 통화에서 연립 협의에 대해 언급했다. 오후에는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새대표와의 통화에서도 “연립 협의를 합시다.”라고 언급했다.

 308석이라는 대승을 거둔 민주당이지만,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는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각각 7석과 3석에 불과하지만, 단독 과반수가 아닌 참의원에서는 안정된 국회운영이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당도 지금까지의 방침대로 연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9월 2일로 예정된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지방조직의 의견을 듣고 조금씩 절차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국민신당도 연립참가에는 일관되게 적극적이어서 3당 연립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연립 정권 구성시에 여당간에 어떻게 정책을 조정할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사민당 후쿠시마 당수는 8월 31일, 기자단에게 “(국민신당의) 가메이 대표와도 이야기했지만, 만약 연릭에 참가하는 경우 여당간의 정책협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내각의 기구와는 별도로 여당협의회와 같은 조정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내비친 것이다.

 민주당은 총리 직속의 국가전략국에서 예산의 골격을 정한다고 하지만, 다른 당에서는 예산에 관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국민신당 가메이 대표는 정권 구상에 대해서도 “국민신당이나 사민당과 협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견제. 선거협력을 맡았던 오자와 대행도 국가전략국에는 부정적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이런 연립의 정책조정에서 열쇠를 쥘 것으로 보이는 민주당의 간사장 자리에 사민당과 국민신당에서 이름이 오르는 것은 오자와 대행. 대표 시절에 양당과의 조정을 받아들여 신뢰가 두텁기 때문이다.

 만약 여당협의회가 생기면 내각에 대해 극히 강한 거부권을 가질 수 있다. 양당의 수는 적지만, 참의원에서 반대하는 경우 법안이 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 민주당 간사장이 다른 당과 연계할 경우 내각의 정책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민주당 내의 중견·젊은 인사가 오자와 대행의 간사장 임명을 경계하는 이유는 이 점에도 있다.

 국민신당 가메이 시즈카 대표에게는 호소카와 정권에서 하야한 야당의 자민당 시절, 구 사회당과 연립해 오자와 대행 등에게서 정권을 되찾았다는 인연도 있다. 그런만큼 “시즈카에게는 신경쓰는 편이 좋다.”고 하는 목소리도 민주당 내에 있다.

 정치 주도라는 길로는 쉽게 갈 수는 없다. 8월 31일 저녁, 기자단의 연립 협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토야마 대표는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했다.

 “사민당분들과 국민신당분들에 대해 우선 부탁을 드린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경기대책, 복잡한 방정식 / 신정권은 중대국면[각주:3]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다음 날의 도쿄 금융시장은 닛케이 평균 주가가 잠깐 올해들어 최고치까지 올라갔지만, 급속한 엔고 등으로 하락으로 전환하는 등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시장에서는 연말부터 내년 초에 걸쳐 경기가 감속한다는 견해도 있어 새 정권의 경제운영은 곧 중대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


■ 축하식 최고치도 한순간뿐

 “오전의 주가상승은 민주당을 위한 ‘축하식 시장’. 이후에는 새 정권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정권 운영을 끝까지 보면서 추이를 옮길 것.”(유명 증권사)

 총선 다음날의 도쿄 주식시장에서 나타난 견해다. 닛케이 지수는 오전 중에 전주 대비 323.86포인트 상승한 10,767.00포인트를 찍으며 거래시간 중 연초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민주당의 육아 지원책의 수혜주로 보이는 육아 관련 상품에 매수 주문이 모였다.

 동시에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정국안정을 좋은 재료로 삼아 “일본 매수” 주문이 몰리며 엔 시세가 전주 대비 1엔 38엔 오른 1달러=92엔 54전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이후 엔고와 중국의 주가 하락의 영향을 받아 주식시장에서 매도가 잇따르고, 결국 종가는 41.61포인트 내려간 10,492.53포인트. 엔 시세 또한 단기적 움직임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채권시장의 반응은 비교적 차가웠다. 장기금리가 대표적 지표인 신발행 10년물 국채의 유통이율은 한때 1.3%대를 맴돌다 1.295%로 하락(채권가격은 상승). 이후 경기의 불투명으로 주식보다 안정적인 채권에 인기가 모이는 상황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더라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정권교체를 우선 반기지만 경기회복의 특효약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신정권의 정책에 따라 올해 예산의 조정이나 내년 예산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주식시장이나 엔 시세는 그 동향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 공공사업 카드, 양날의 칼

 민주당 중심의 정권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이이치(第一) 생명 경제연구소의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민주당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당은 공공사업비나 공무원 인건비를 깎아 유아 수당이나 고속도로 무료화라는 간판을 내세웠지만 공공사업비 삭감 등은 단기적으로 경기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낭비를 깎아 무엇이 바뀌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올해 2분기의 GDP가 전기 대비 3.7%/년 늘어나 1년 3개월만에 성장으로 돌아섰다. 정부의 경기대책에서 에코 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 공공사업비 증액에 따른 효과가 크고, 민간 분석가 대부분도 3분기에 더욱 그 폭이 늘어난다고 예측한다.

 그러나 정액급부금[각주:4]의 효과도 사라져가고 있고, 연말에는 에코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의 효과도 희미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분기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7월 실업률이 과거 최악인 5.7%까지 올라가는 등 회복을 실감하기에는 아직 멀어 추가 경기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연말 이후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지고, 여론 지지마저 낮아지면 “공공사업비 삭감과 같은 정책 기조를 바꾸어야 할 가능성도 있다.”(노무라 증권 금융경제연구소 기우치 다케히데(木内登英) 경제조사부장)



어제의 적은 오늘의... 자민당 응원하던 지자체장, 우왕좌왕[각주:5]

 민주당이 압승한 총선거가 끝나고 여명이 밝은 8월 31일, 이때까지 자민당을 응원하고 있었던 지자체장들이 민주당에 접근하거나 선거때 있었던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 정권을 장악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고, 민주당이 여당이 된 첫 사태인 만큼 지자체장들도 당분관은 우왕좌왕할 것 같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

 “당선 축하합니다. 선거 중에는 실례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정신으로 부탁드립니다.”

 후쿠오카현(福岡県) 오무타시(大牟田市)의 고가 미치오(古賀道雄) 시장은 31일 아침,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지만 비례대표로는 규슈 블록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노다 구니요시(野田国義) 씨를 단신으로 방문했다. 노다씨는 “알겠습니다.”라고 응했다.

 노다씨와 지역구에서 맞붙었던 상대는 후쿠오카 7구에서 당선된 자민당의 고가 마코토(古賀誠). 운수대신이나 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한 실력자다. 고가 시장은 총선에서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하면서, 야메(八女) 시장이었던 노다 후보를 지칭해 “시장 시절에 실적도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화해에는 노다씨의 선대본부장인 민주당의 오쿠보 쓰토무(大久保勉) 참의원 의원이 동석했다. 오쿠보씨는 총선때 민주당 우세가 전해지자 고가 마코토 후보를 지원하던 후쿠오카 7구의 4개 시장과 면담하면서 “지자체의 장은 중립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고가 시장만은 “한창 싸우는 중에 만나면 어쩌나.”며 면회를 거부했다. 당시 고가 시장은 시 사업에 국가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여당 실력자였던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한 것.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 고가 마코토 의원이 야당 의원으로 전락하는 것이 확실해였다. 고가 시장은 마코토 의원의 실력에 계속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당에 줄대기에도 쫓겼다. 노다 씨를 방문한 것은 그 첫 걸음.

 나가사키현(長崎県) 가네코 겐지로(金子原二郎) 지사는 총선 다음날인 31일, 현청에서 기자단에게 “총선거에서 자민당을 특별히 응원한 것은 아니다.”라며 해명했다. 가네코 지사는 종종 자민당 후보의 집회에 참석하며, “민주당의 공약에는 재원의 뒷받침이 없다.”며 발언해왔다. 그러나 현내 4개 소선거구 모두 자민당 후보가 패배하자 “신세를 진 분으로부터 안내가 있어서 모임에 나갔다.”며 설명.

 가네코 지사는 나가사키 2구에서 낙선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의원의 유세에서 “규마 선생님이 그만두는 결과가 된다면 좋은가? 냉정히 생각하길 바란다.”는 발언을 한 일도 있지만, 31일에는 규마 전 의원을 꺾고 당선된 후쿠다 에리코(福田衣里子) 씨에 대한 질문에서 “굉장히 착실한 분. 금후에 현의 사업에 대해 설명드리고 싶다.”고.



비례대표 「횡재」로 당선 / 한 표의 의사가 왜곡될 우려도[각주:6]

 정상적이라면 비례대표로 의석을 얻어야 할 정당이, 후보자 부족 등을 원인으로 다른 당에 의석을 내준다? 각 당의 득표를 동트 식으로 계산해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방식에 따라, 이번 총선거에서 이러한 의석 양도가 긴키(近畿) 블록(의원 정수 29석)에서 3석, 도카이(東海) 블록(정수 21석)에서 1석 나타났다.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모두 입후보할 수 있는 선거제도 하에서, 민주당은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사람이 많아 13석이 배분되어도 최후에는 비례명부에 11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편 모두의 당(みんなの党)은 비례대표 1석을 당선시킬 수 있었으나,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 출마자가 비례대표에서 당선되고자 할 때에는 소선거구 득표가 유효투표총수의 10%를 넘어야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유일한 비례후보가 낙선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2석과 모두의 당 1석이 자민당과 공명당에 각각 2석과 1석씩 돌아갔다. 모두의 당은 또 도카이 블록에서도 유일한 비례후보가 같은 이유로 낙선하면서 민주당으로 1석이 돌아갔다.

 이와이 도모아키(岩井奉信) 니혼대학 교수(정치학)는 “있는 정당에 투표했음에도, 그 몫의 의석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정당에 돌아간다면 유권자의 의사가 존중받지 못한다. 후바자가 모자란 경우 정수를 깎는다는 발상도 괜찮다.”며 “소선거구에서 낙선했는데 (비례대표에서) 부활 당선하는 중복 입후보 구조 자체에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제도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한다.

 모리 히로키(森裕城) 도시샤대학 교수(정치학)는 “(의석 양도는) 이전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어, 민의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를 느낀다. 국회의원이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괜찮으니까 명부에 올린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편 총무성의 스즈키 야스오(鈴木康雄) 사무차관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러한 사태가 있었으나, 현행 방식이 좋다고 하는 국회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선거제도는 각 당과 각 회파(한국의 교섭단체격)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에 그쳤다.

  1.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39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8월 31일자</A>. [본문으로]
  2.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3.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4.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9월 1일자</A>. [본문으로]
  4. 올해 4월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18세~65세에게 2만 엔, 이외에는 1만 2천엔씩 지급. [본문으로]
  5.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901/SEB20090831004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8월 31일자</A>. [본문으로]
  6.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831/TKY200908310394_0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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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0
할 일이 없을 때에는 이것 저것 생각을 하는데, 개중에 하나 생각한 것이 선거제도를 광역선거구제+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광역선거구제라고 이름하였으나, 결국에는 중선거구제인데....... 도별로 인구 비례하여 몇 자리씩 쑤셔넣고, 정당은 도별 의원 머릿수만큼 후보를 내고 하는 식이다. 후자는 정당생략대표제이긴 한데, 의원 정수를 이것도 인구 비례로 하여 20만인당 의원 1인정도로 하는 식이다. 이리하면 전자와 후자의 숫자가 거의 일치할 것이다. 물론 숫자는 반올림으로 하여야지, 그리하면 최고 차이가 20만까지 날 수 있으나 이것은 특단의 대책으로 다른 방안을 고려하여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위에 적은 것은 쓸데없는 떡밥이고, 내가 사모하는 추미애 선생이 속한 통합민주당이 사는 길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이 정동영이 패당이라는 것을이 꼴보기는 싫지만, 결국에 통합민주당이 살아야 이 나라가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는 한 길이 될 것이기에(물론 나는 지난 선거에서 통합민주패당에는 한 표도 주지 아니하였다), 이놈들이 어찌하면 살 수 있을까 고민을 잠깐씩 하였지.

결국에 지난 선거에서도 망한 것은(일각에서는 망할줄 알았는데 안망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덜 망한 것이지 아니 망한 것이 아니다. 쪽같은 선거결과를 놓고 전치 20주일줄 알았더니 15주라고 안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랑하는 것은 웃긴 일이다) 결국 통합민주당이 제대로 된 플랜도 없고, 국민들이 통합민주당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거기다가 이걸 두고 백성탓을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정치인의 꼴이 아니다. 백성을 우습게 보는 놈들 가운데 성공한 놈은 이인제밖에 없다.

하여간 통합민주패당이 살고자 하는 길은 결국 한나라당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인데, 차별화를 못하였으니 백성들이 통합민주패당을 보고 국정견제세력이 되리라 믿지 못한 것이다. 근래에는 듣자하니 한나라패당 일부 세력이 오히려 야당짓을 한다던데, 이대로 갔다가는 통합민주패당이 홀라당 망하는 길이 올 것이다. 확실한 야당[각주:1], 정정당당 저항세력[각주:2]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그러한 길로 나아가야 결국 다음 선거에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전의 한나라패당이 하던 물고늘어지기 시간끌기 꼬리잡기가 되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통합민주당의 확실한 얼굴마담이 될 수 있는 것은 추미애 선생밖에 없다. 노가리 색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선생의 계열이라는 이야기는 그만한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증할 것이다(물론 DJ선생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추미애 선생이 지금은 대통령감이 아닐지라도, 야당을 이끄는 견제세력으로서는 충분한 사람이다(차후에라도 어찌될 지는 두고볼 것이다). 지금 통합민주당에게 필요한 것은 이도저도 아니었던 노가리색채를 배제하고, 진정한 국가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는 길밖에 없다. 특히 정치적으로 국민이 심판할 때에 이를 제대로 심판할 수 있도록 검증은 하지도 못하다가, 선거가 끝나고는 검증 운운하면서 법적인 심판을 그제서야 들고나오는 작자들은 자기도 심판받아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각주:3].
  1. 일본공산당의 표어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2. 일본의 국민신당의 표어였다. [본문으로]
  3. 이와 관련하여서는 대의제에서의 자유위임과 대의제와 관련된 자료를 알아서 참조하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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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적 사고의 선상에서 생각할 때, 한나라당이 이명박 정부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표를 좀 몰아주시오 하는 것은, 박그네 선생은 박각하의 딸이니 그네선생을 뽑으면 각하를 뽑는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웃긴 일이다. 어디 국회를 정부가 일 잘하라고 만들어 놓았나, 사실 국회는 정부를 견제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위적인 여대야소는 정상적인 구조가 아니다. 국회는 그저 머리에 똥만 가득찬 거수기가 되는 것이지.

5권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3권을 분배한 권력분립의 견지에서, 권력을 갈라놓은 것은 민주적이고도 공화적인 제도의 표상이다. 갈라놓은 것을 지네들끼리 갈라 먹으려고 하는 짓거리를 보면, 물론 아직도 노가리 정부에 한이 덜 풀려서 나는 한나라패당을 찍어서 국정파탄세력 통합민주패당을 몰아내 보겠다고 하는 여론이야 어쩔 수 없지만, 대통령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거대 야당을 만들어달라? 그럼 제일 잘사는 나라는 왕정국가지, 무슨 영길리나 미리견같은 야만국가가 잘 살 것인가.

저 멀리 부탄에는 임금님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선거를 치르겠다 했는데, 그 아들 되는 임금님이 서양에서 공부하여 사고가 양식이라 선거를 금년에 했다던가 하더라. 근데 투표율이 80%를 기록했는데 이 사람들이 임금님들이 하라고 하시니 어찌 지엄한 왕명을 거스르겠소 하고 질서정연하게 와서 투표를 했다더라. 그래서 결과는 왕당파의 압승 수준이니 멋진 지경이다. 물론 부탄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소문나있고, 서양과 같은 제도에 익숙치 않은 것도 소문이 나 있지만. 일찌기 서양문물을 받아들여(늦긴 했지만), 민주주의가 최고여 하는 이런 나라에서 어찌 독재패당에 앞장서겠는가. 백성이 행복하다면 왕정도 좋고 그러하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일단 민주공화정을 가치로 삼았으면 독재로 다시 회귀하는 것은 막아야 않겠는가. 민주주의 정당이라는 당이 이런 소리나 하고 앉았고, 국민은 또 표를 주니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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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1942년 5월 24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3선 중의원 의원이다.

제34대 자치대신,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민주당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성장기


도쿄 시(현 도쿄 도 다이토 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서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정치 입문 이후

아버지가 급서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입학한 니혼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1969년, 중의원 선거에 당시 이와테 2구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를 지휘하던 사람이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후 오자와는 다나카의 파벌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는다.

총무국장과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으로 당적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의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과 함께 연구회 ‘소세이카이’(創政会)를 결성하고 이후 다케시타의 파벌로 독립한다. 다케시타 내각 발족 이후 오자와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지내 다케시타 파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경제단체연합회 산하의 기업에서 선거자금으로 3백억 엔을 모으고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걸프 전쟁 당시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위해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신인을 공천했지만, 낙선하여 그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파벌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가네마루(金丸)와 다케시타(竹下)와 함께 ‘곤치쿠쇼’(金竹小)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파벌의 흐름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다케시타와의 마찰이 깊어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했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고 파벌회장을 사임하고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 쓰토무를 옹립해,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면서,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 파로 독립하게 된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네다 파는 경제기획청 장관과 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 파는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하고, 16명이 결성하는 이른바 반역으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면서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고, 내각관방장관으로 관저 주도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당시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해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이후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호소카와 총리는 사의를 표명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와의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고 연립여당은 하다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것에 합이한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제외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일본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 하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 간에 미묘한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하다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함으로써 하다 내각은 총 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신진당 시대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 의석 19석을 크게 넘는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 격돌하게 된다. 오자와는 하다를 꺾고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지만,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 내에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을 잃은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다. 하다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고,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당 시대

1998년 1월 6일에는 자유당이 결성되고, 오자와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당초에는 1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일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막상 결성이 되자 중의원 의원 42명과 참의원 의원 12명의 총 54명이 참가하는 것에 머무르면서 제1야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게 되었다.

7월 12일의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전할 것이라고 전망되었지만, 오자와의 인기를 몰아 비례대표로 514만 표를 얻어 총 6석을 획득해 선전했다. 참의원 선거 이후의 임시국회에서는 민주당의 대표 간 나오토를 야당 통일 후보로 정하고,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를 꺾고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다만 중의원 우월의 원칙에 따라 간 나오토 대신 오부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오자와는 참의원에서 야당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98년 10월에는 내각관방장관이던 노나카 히로무와 회담을 가지고 연립 교섭을 시작했다. 11월 19일에는 오부치 수상과 양 당간의 연립 정권에 합의하고, 199년 1월 14일 정식으로 연립 정권이 성립하면서 오자와는 5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공명당이 연립 정권에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 참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자유당의 존재감은 저하되었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선거 협력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오자와는 자민당의 오부치 총리에게 양 당의 해산과 새로운 보수 정당의 결성을 요구했다. 2000년 4월 1일에는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연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직후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게 된다.

자유당은 오자와를 지지하는 연립 이탈파와, 연립 잔류파로 분열되고 잔류파 국회의원 26명은 보수당을 결성하게 된다. 분리된 보수당은 자유당측에 정당보조금의 분할을 위해 분당 처리를 요구했지만, 자유당이 거부하면서 탈당한 것이 된 보수당은 보조금 없이 총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비례대표에서 약 660만 표를 얻으면서 총 22석을 획득하게 되었다. 보수당은 7석으로 대패했다.

같은 해 7월 29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높은 인기로 자민당에는 순풍이 불고, 오자와 왕국으로 불리던 참의원 이와테 선거구에서도 근소한 차로 이기는 고전을 겪게 된다. 의석수는 전과 같은 6석이었지만, 비례대표는 420만 표로 감소했다.


민주당 시대

2002년,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당내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당의 결집을 필요로 했고 오자와에게 접근했다. 당시 오자와 또한 자유당의 지지층 약화 등으로 독자 선거에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토야마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발표했지만, 당 내에서 조정이 불충분했고 오자와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어 협의는 좌절되고 하토야마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임으로 선출된 간 나오토 또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이어 양 당의 합병을 추진했고, 당명과 강령·임원을 민주당의 체제 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합당이 결정되었다.

2003년 9월 26일, 자유당이 민주당과 정식으로 합치고 오자와는 당대표 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안고 40석이 증거한 177석을 획득했다.

합병 이후 오자와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구 일본사회당 계열의 요코미치 다카히로였다. 두 사람은 안전보장 정책에서 일치하면서 두 세력의 행동은 가까워졌다. 또한 오자와는 야당 결집을 위해 사민당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04년 5월, 연금미납 문제로 인한 혼란의 책임을 지고 간 나오토가 사임하면서 후임 대표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직후에 오자와 또한 국민연금이 강제 가입 제도가 된 1986년 이전에 미가입이었다는 이유로 취임을 사퇴하면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1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연금 법안이 쟁점이 되고,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 순풍이 불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50석을 획득해 자민당의 획득 의석보다 1석 많은 승리를 얻었다. 오자와는 선거 이후 오카다의 요청에 따라 당 부대표에 취임한다.

2005년 9월 11일, 우정민영화를 쟁점으로 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오카다 대표 또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출되었고, 오자와는 대표 대행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오카다 집행부의 부대표이자 총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이를 고사했다.


민주당 대표

2006년 3월 31일에 마에하라 대표가 호리에 메일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오자와는 기자회견에서 “앞장서서 당을 재생해 정권 교체의 횃불를 밝히는 결의”라며 후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오자와의 선출을 예상한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와 마찬가지고, 4월 7일의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는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로 당선되었다. 오자와는 당 안팎에 당의 결집을 어필하기 위해 선거의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대표 대행으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간사장으로 선임하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오자와가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 치뤄진 4월 24일의 중의원 지바 7구 보궐선거에서는 메일 문제의 역풍으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힘들다는 예상이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5월 9일에 회견을 가지고 중의원 본회의를 자주 결석하는 것에 대해 ‘(의사의 충고를 지켜) 식후에 바로 일을 하는 등의 일은 삼가고 있다’며 자신의 몸 관리를 이유로 든 것에 대해 ‘의회 경시’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건강 상태를 이야기한 것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9월 25일에는 임시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대표로 재선된 후 협심증 발작 징후를 느끼고 입원해 검사하기도 했다. 10월 5일에 퇴원한 오자와는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핵실험 직후 동북아 정세를 두고 일본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이른바 〈주변사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마에하라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각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고, 또한 민주당의 외교·방위 부문은 ‘오자와 대표의 트로이카 체제의 견해는 민주당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오자와는 “핵무장 논의를 용인하면 ‘(핵무기의 보유, 제조, 수입을 하지 않기로 한) 비핵3원칙을 지킨다’는 말도 국민이나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층은 2002년 당시 자유당 당수로 있던 오자와가 일본의 핵보유능력을 두고 “일본은 하루아침에 몇천 발의 핵탄두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하여 비판했다.

오자와는 자유당 시대부터 방위청이 ‘성’(省)으로 승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승격시에도 “국방의 소임을 맡은 기관이 내각부의 한 외국(外局)으로만 있는 상태는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므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할 때는 결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자와 대표의 최종 결단에 따라 법안에 찬성으로 선회했다.

11월의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사민당,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공산당 및 사민당과 공동으로 투쟁했다.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여당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패배하면서 민주당과 다른 정책과 지지층을 가진 정당과 연합했음에도 진 것을 두고 야당 공동 투쟁의 목적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불린 2007년 2월 4일의 아이치 현지사 선거와 기타큐슈 시장 선거가 시행되었다. 아이치 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기타큐슈 시장 선거에서는 야당의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이 “여성은 애낳는 기계”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오자와 대표가 야나기사와 후생노동상이 사임하기 전에는 법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전술을 주도하고, 사임을 유도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쟁점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이와테 현지사 선거에서 ‘오자와 칠드런’의 대표로 불리는 닷소 타쿠야가 출마해 2위 후보와 3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압승하여 오자와 왕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한 오자와는 7월 8일,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때에는 “야당의 대표를 언제까지 맡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며 대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사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향을 비친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비판과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승리가 강고해졌다.

7월 29일에 시행된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을 획득하면서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하고, 야당 전체는 과반수를 획득했다. 이 선거에서 오자와의 비서 30명 이상이 1인구를 중심으로 격전지에서 선거의 전술을 지도하였고, 오자와의 탁월한 선거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거가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자민당은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선출했다. 9월 25일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선거에서 중의원은 후쿠다를, 참의원은 오자와를 지명하면서 양 원의 지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타협점을 찾지 못해 중의원의 의결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헌법에 따라 후쿠다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양원의 지명이 다른 것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민주당의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된 이래 9년만이며, 역대 4번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계열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의 대결은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오자와 대신 후쿠다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다나카 마키코 쪽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2007년 11월 2일, 오자와 민주당 대표는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재와 회담하였고, 이 때 연립정권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므로 당으로 돌아와 임시임원회에 상의했다. 그러나 임원회에서 대연립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에 부딫히면서 2시간 후에 연립을 거절하였다. 이때 아사히 신문과 닛케이를 제외한 여러 언론에서 오자와가 후쿠다 총리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오자와는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 의한 민주당에 대한 이유없는 중상모략 보도로, 여론 조작”이라고 비판하며, “나는 대연립 제안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이 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각주:1]

오자와 대표는 2007년 11월 4일에 이 대연립 구상을 둘러싼 당내의 반발의 목소리를 수렴해,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의사를 표명했다.[각주:2] 그러나 정계에서 대표직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오자와는 11월 6일에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부디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며 대표직 속투를 표명하였다.


평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남 - 1942년에 태어난 오자와가 5세로 죽은 다나카의 장남과 동갑이었으므로, 다나카는 오자와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가네마루 신은 오자와와 하다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세 사람을 두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나는 그(오자와)를 평가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주위에서는 오자와가 도호쿠 지방 출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문에 설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측근이 떨어져나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자와는 이를 두고 “떠나는 이 잡지 않고, 오는 이 막지 않고”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내외의 오자와 알레르기는 오래된 의원에게서 강하다. ‘독단적이고, 측근정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자민당의 분열과 이후의 분열 공작, 신진당의 분열과 해산 등이 주 비판 대상이 된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숙취로 전국간사장회의에 불참하거나,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 지휘를 포기하고 외유에 나가기도 했으므로 ‘워스트1간사장’이라는 평가도 있다.
  1. <A href="http://www.dpj.or.jp/news/files/19.11.4kougi.pdf" target=_blank>오자와 이치로 중상보도에 엄중히 항의하다</A>,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1104/TKY200711040096.html" target=_blank>오자와씨 ‘혼란에 매듭’ ‘보도에 분노’라고도 회견 전문</A>,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본문으로]
  2. <A href="http://www.dpj.or.jp/news/dpjnews.cgi?indication=dp&amp;num=12145" target=_blank>오자와 대표가 사직서를 제출, 집행부에 진퇴를 일임</A>,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1104/TKY200711040051.html" target=_blank>오자와씨가 대표사임의 의향표명 “정치적 혼란의 매듭”</A>,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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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