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1.08 미노베 다쓰키치
  2. 2007.11.14 이항녕
  3. 2007.11.14 마르틴 크릴레
  4. 2007.11.14 프란츠 폰 리스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 1873년 5월 7일 ~ 1948년 5월 23일)는 일본의 헌법학자이다. 천황기관설로 잘 알려져 있다. 부인은 수학자인 기쿠치 다이로쿠의 장녀인 미노베 다미코이며, 장남 미노베 료키치는 도쿄 도지사를 지냈다.

효고 현에서 한방의사였던 미노베 슈호(美濃部秀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천황기관설을 주창했던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徳郎)의 제자로 지내다가 졸업했다. 내무성에서 근무하다가 1899년에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1900년에 도쿄제국대학의 동교수가 되었다. 1902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이때의 제자로 공법학자 다가미 조지가 있다.

1912년에 발표한 《헌법강화》(憲法講話)에서는,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있다고 하는 독일의 게오르그 옐리네크의 국가법인설에 근거한 천황기관설을 발표했다. 이후 호즈미 야쓰카의 후계자로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천황주권설을 주장한 우에스기 신키치와 논쟁을 전개했다. 이즈음 천황기관설은 학계와 정계 등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국가공인의 학설처럼 되어갔다.

1932년에는 학사원 대표의 칙선의원으로,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34년에 국체명징운동이 일어나면서, 천황기관설이 배격되기 시작하였다. 1935년의 귀족원 본회의에서 기쿠치 다케오 의원이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는 내용의 연설을 하자, 군부나 우익 등에서 천황기관설과 미노베 다쓰키치에 대한 배격이 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미노베는 ‘일신상의 변명’ 이라 불리는 해명을 했지만, 저서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했고, 불경죄 의혹으로 조사를 받아, 귀족원 의원을 사퇴하게 되었다(천황기관설 사건). 천황주권을 외친 우에스기 신기치는 1929년에 사망했지만, 국체명징성명등을 통해 천황기관설 대신 천황주권설이 공인되었다. 미노베는 1936년, 천황기관설 사건에 분개한 우익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헌법 개정에 대한 움직임이 높아지면서, 내각의 헌법문제조사회 고문이나 추밀고문관 등으로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국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한 헌법개정은 국체의 변경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구 자유주의자의 한계’라고 불렸다. 국민주권의 원리에 근거한 일본국 헌법이 성립하면서, 천황기관설은 학설로서의 운명을 마쳤다.

미노베는 헌법 개정 권력은 헌법의 근본규범에 대한 개정권은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일본제국 헌법과 일본국 헌법의 연속성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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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이항녕

소고 이항녕

이항녕
(李恒寧, 1915년 7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법철학자로, 호는 소고(小皐)이다.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934년에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에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경상남도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 청룡초등학교와 양산중학교의 교장을 맡았다가, 1949년에 동아대학 교수로 대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성균관대학을 거쳐 1954년부터 1971년까지 고려대학교에서 민법과 법철학을 강의하였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홍익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1955년에 《법철학개론》을 출간하였다. 《법철학개론》은 동아시아를 동방, 서유럽을 서방, 서아시아와 동유럽을 중동 또는 중방이라고 지칭하고, 풍토지대를 구분의 기준으로 삼아 법문화를 기초로 하여 법철학과 법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 서양 위주의 법철학에서 탈피하여 동양의 새로운 입장에서 다시 고찰한 그의 관점은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저서는 스즈키 게이후가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되기도 했다.

적극적인 친일행위는 하지 않았으나, 일제 말에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고등관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력에 대해 반성하거나 글을 여러 차례 남겼다.

반일사상을 가지고 일본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또 일부는 일본이 저렇게 강국이 되었는데 어지간해서는 망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저 거기 붙어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안일한 생각을 가진 학생도 있었어요. 저는 후자 쪽이었죠.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장래다, 이런 것보다는 개인의 신상이 편한 쪽을 택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끄럽죠.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요.

— <40명의 민초들이 써내려간 해방 전후 역사>, 2005년 8월 10일, 연합뉴스.

또한 “고등관, 즉 군수급 이상은 모두 친일파”로, “일제말기 군수는 공출, 정신대 차출 등을 맡은 일선 행정의 최고책임자였는데, 군수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군수가 되기를 희망해 군수가 됐다면 이는 친일파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바 있다[각주:1]“일제 때 산 사람은 모두 친일파”‘척결’ 주장은 정치적 고려 있다? , 정운현, 2002년 5월 30일,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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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크릴레 교수

마르틴 크릴레 교수

마르틴 크릴레(Martin Kriele, 1931년 1월 19일 ~ )는 독일의 법학자이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뮌스터 대학, 본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행정법학자이자 법철학자인 한스 율리우스 볼프(Hans Julius Wolff)와 헤겔 연구의 거장 요아힘 리터(Joachim Ritter)의 영향을 크게 받은 크릴레는, 뮌스터 대학에서 볼프의 조교로 있으면서 박사학위 논문 「정의의 기준」Kriterien der Gerechtigkeit 을 통해 법철학의 지배적 조류가 된 상대주의를 다루었다. 그는 구체적인 판결과 결정이 그때 그때마다 ‘더욱 기본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일반적인 원리와 그 결과의 형량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 법관의 판결과 입법자의 결정은 어느정도까지 정의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가를 논하였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독일학술재단의 지원을 통해 미국 예일 대학 로스쿨에서 연구하고, 귀국해 1966년에 뮌스터 대학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1967년에 에른스트 폰 히펠(Ernst von Hippel) 교수의 후임으로 쾰른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8년부터 루돌프 게르하르트(Rudolf Gerhardt)와 함께 독일의 유일한 법정책학 전문지 『법정책학지』Zeitschrift für Rechtspolitik 를 간행하고 있다. 1977년부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헌법재판소 재판관직을 맡고 있다.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Einführung in die Staatslehre (한국어판은 국순옥 역)는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는 책이다. 민주적 헌정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국가(평화), 권력분립적 헌법 국가(자유), 민주주의(정의)의 세 단계로 나누어 그 법철학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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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폰 리스트

프란츠 폰 리스트

프란츠 폰 리스트
(Franz von Liszt, 1851년 3월 2일 ~ 1919년 6월 21일)은 독일의 형법학자이다.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종형이다.

빈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빈 대학 시절에는 루돌프 폰 예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1875년에 그라츠 대학에서 「위증죄론」Meineid und falsches Zeugnis 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한 뒤 예링의 추천으로 1879년에 기센 대학 교수가 되었다.

1882년에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긴 리스트는 그의 형법사상의 근간을 이룬 「형법에 있어서 목적사상」Der Zweckgedanken im Strafrecht 을 발표한다. 그는 형벌의 목적은 법익의 보호이며, 법익의 ‘보호는 법익의 침해를 수단으로 하는 것에 의해 정당화되며 이러한 형벌은 목적의 달성을 위해 가장 적으면서도 유효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당한, 즉 올바른 형벌은 필요한 형벌”이고, “필요한 형벌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설파했다.

1889년에는 벨기에 브뤼셀 대학의 교수 아돌프 프린스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교수 반 하멜과 협력하여 국제형사학협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국제형사학협회는 여러 나라에 지부를 설치하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회원이 1,500여 명을 헤아렸지만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규모가 축소되어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부회(部會)가 설치되었다가 나중에 독일형법협회가 설립되면서 해소되었다.

1889년에는 할레 대학으로 옮겼는데, 형법 이외에 국제법 강의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적 연구를 가장 활발하게 펼친 리스트는, 1898년에 펼친 강연에서 발표한 「사회병리적 현상으로서의 범죄」Das Verbrechen als Sozialpathologische Erscheinung 를 통해 ‘범죄는 사회의 필연적인 현상이지만, 범죄가 급격하게 증가한다면 이는 하나의 병리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범죄의 원인으로는 경제적 상황, 노동자의 처지의 악화 등으로 ‘범죄의 사회적 원인이 개인적 원인보다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에 급격하게 확산되던 사회주의와 관련해서는, “현존 사회생활을 변혁하는 것에 의하여 범죄를 완전하게 세상에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의 세계에 속한다”고 지적하고, “노동계급의 모든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냉정한, 그러나 목적의식적인 사회정책”이 “최선과 함께 가장 유효한 형사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비교적 급진적이었던 이러한 생각은 당시 구파의 강한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1899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리스트는 취임 강연 「형법학의 임무와 방법」Die Aufgaben und Methode der Strafrechtswissenschaft 에서 신파 형법학의 의미와 근거를 분명하게 하고, 형법학이 인과과학적 연구로서의 범죄학가 형벌학 및 형사정책학 연구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논증하였다. 이후 리스트는 형법과 국제법, 법철학 등을 강의하였다.

1917년에 66세가 된 리스트는 교수직을 떠나 형사학 연구소의 유지에 힘을 쏟고, 장서를 기증한 뒤 제하임에 은거했다. 이후 1919년에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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