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당'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9.01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 이후 정세 (9.1)
  2. 2008.01.07 일본사회당 및 사회민주당 약사

민주, 연립협의를 타진 / 사민당·국민신당도 적극적[각주:1]

 민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 연립정권 수립을 향한 협의를 타진했다. 한편으로 9월 14일 전후로 계획된 수상지명선거를 위한 특별국회 소집시기를 다음 주로 앞당기도록 여당에 요청하는 것도 검토에 들어갔다. 자민당은 임시 임원회를 열어 아소 총리의 후임을 정하는 총재 선거를 특별국회 이후인 9월 18일에 고시하고, 28일에 투표하는 일정을 결정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사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亀井静香) 새 대표와의 전화통화에서 연립 협의를 타진했다. 양당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연립정권 수립이 확실해 보인다.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은 야마오카 겐지(山岡賢次) 국회대책위원장에 대해 특별국회 일정에 대해 여당과 협의를 서두르도록 지시하고, 야마오카 위원장은 9월 1일 자민당의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국회대책위원장과 이후 일정을 협의한다.

 사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에 열린 3임원 회의에서 상임간사회를 9월 1일에, 전국대표자회의를 그 다음날 열어 연립 참가를 논의할 방침을 확인했다. 와타누키 당대표와 가메이 간사장이 모두 낙선한 국민신당은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 대표대행의 승격을 정하고, 연립 협의에 임하는 태세를 정비했다.

 선거에서 대패한 자민당은 아소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책임을 강하게 느낀다. 총재를 사임하고자 한다.”고 정식으로 표명하고, 그 후 열린 임시 임원회에서 총재 선거 일정을 정하고 당 소속 양원(兩院) 의원과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연합 대표(각 3인, 총 141)의 투표로 선출한다는 방식도 정했다. 또한 9월 4일에 전국간사장회의, 8일에는 양원 의원총회를 열어 총선거를 총괄하는 것도 결정했다.

 특별국회에서 열릴 수상지명선거는 아소 총재인 채로 진행될 예정. 당내에서는 총선 참패의 책임이 있는 총리의 이름을 쓰는 데에 반발도 예상되지만, 아소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졸속으로 새 총재를 뽑는 것은 지방 당원·당우(黨友)의 불만의 바탕이 된다.”고 언급.



「오자와 지배」를 경계, 간판인 정치주도는 불분명[각주:2]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함으로써 정권교체가 결정된 8월 30일 밤. 도쿄 롯폰기(六本木)의 한 빌딩에 마련된 민주당의 개표센터의 한편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간 나오토(菅直人), 고시이시 아즈마(輿石東)의 세 대표대행, 그리고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이 머리를 맞댔다.

 오자와 대행과 가까운 고시이시 대행이 입을 열어 불쾌감을 나타냈다.

 “도대체 정권이행팀이란게 무엇인가.”

 관방장관이나 간사장 등의 골격을 먼저 굳히고, 정권이행에 들어간다. 그러한 정권이행팀이 오카다 대표 이후 당의 구상이다. 하토야마 대행이나 오카다 간사장은 이번에도 그러한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당내의 주도권 다툼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오카다 간사장은 오자와 대행과 거리가 있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의 지지가 두텁다. 이날 오카다 간사장의 측근은 그에게 간사장 유지를 청하며 이렇게 못박았다.

 “오자와 이치로씨가 간사장이 되어 민주당이 오자와 지배가 되지 않도록.”

 오자와 대행에게 당 운영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는 당내의 의견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하토야마 대표는 31일 미명의 회견에서 궤도 수정을 꾀했다.

 “(인사를) 일부만 정하는 것은 다른 균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야당으로서의 인사보다 정권의 인사가 훨씬 무겁다. 일부라도 먼저 인선하지 않으면 수습불가능한 사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염려에서 인사는 모두 보류되었다.


■ 이중구조 권력 재현의 위기감

 민주당 내에서 오자와 이치로 대행에게 거리를 두는 의원들이 경계하는 것은, 여당 실력자가 정부를 바깥에서 조종하는 권력의 이중구조의 출현이다.

 1993년, 여야 역전으로 탄생한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붕괴된 “호소카와 트라우마”(細川トラウマ)가 머리를 스친다. 오카다 간사장은 저서 『정권교체』(政権交代)에서 호소카와 정권이 단명(短命)한 이유는 “최대 실력자인 오자와씨가 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7개 정당과 1개 회파(교섭단체)를 합친 연립정권의 중심이 된 오자와 이치로(당시 신생당 대표간사) 대행은 입각하지 않은 이유를 “당의 조정자가 각료가 되면 여당을 모을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신정권 인사의 초점도 분명 그에 있다. 하토야마 대표나 간 나오토 대행이 간사장을 내각 밖에 두어 당 운영을 따로 두는 구상을 그리면서 오자와 씨에게 거리를 두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자와 간사장 기용”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당이 내건 “정치 주도”를 실현하기 위한 기구개혁과 주요 간부 인사는 밀접하게 얽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카다 간사장이 대표를 맡았던 2005년, 정치 주도를 목표로 해 만들어진 민주당의 “오카다 정권 500일 플랜”에는 정권이행위원회가 명기되어 있다. 투개표 다음날에 수상이나 관방장관 예정자와 간사장을 정하고, 정권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토야마 대표는 기자단에게 “연립협의에는 우선 간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집행부 체제 하에서 당분간 움직인다.”고 명언했고, 정권이행팀 설치를 그리던 오카다 대행도 “대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한 방침을 따르는게 당연하다.”고 언급했다.

 “정치 주도”는 이번 총선거에서도 전면으로 내건 간판. 목적은 분명 권력의 이중구조를 없애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여당의 이원체제에서 정책 결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당 간부가 주요 각료를 겸임한다. 족벌 의원과 관료의 유착을 지우고, 정책결정을 신속하게 한다. 정책결정을 국민이 보더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일련의 개혁의 토대라고도 할 수 있고, 정책집에서도 “하토야마 정권 구상”이라며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정책집에서는 예산의 골격 등을 결정하도록 수상 직속의 “국가전략국” 설치도 담고 있다. 담당 대신은 중요 각료의 위치를 가지며, 정조회장이 겸임한다. 행정쇄신회의에서 행정력 낭비나 부정을 배제하는 구상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달 중순으로 보이는 총리 선출이나 조각(組閣)이 가까워지면서 이미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지만, 간부들이 총선 유세에 집중하면서 늦어진 면은 부정할 수 없다. 8월 31일 낮에 간 나오토 대행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이 당본부에서 하토야마 대표와 국가전략국에 대하여 협의했으나, 그 상세한 설계는 당간부 사이에서 충분히 공유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자와 씨의 이중권력 구조라고 계속 불리지는 않을까. 8월 30일 밤의 니혼 테레비(日本テレビ)의 프로그램에서 오카다 간사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사라진다. 오자와 씨도 여러 곳에서 ‘인사는 대표가 정한다. 나는 대표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연립 제2당은 “여당 협의의 장을”

 어느정도 내각과 민주당을 일원화한다고 하더라도 연립정권에 참가하는 다른 당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는다.

 “연립에 대해 간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오전, 사회민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의 통화에서 연립 협의에 대해 언급했다. 오후에는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새대표와의 통화에서도 “연립 협의를 합시다.”라고 언급했다.

 308석이라는 대승을 거둔 민주당이지만,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는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각각 7석과 3석에 불과하지만, 단독 과반수가 아닌 참의원에서는 안정된 국회운영이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당도 지금까지의 방침대로 연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9월 2일로 예정된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지방조직의 의견을 듣고 조금씩 절차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국민신당도 연립참가에는 일관되게 적극적이어서 3당 연립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연립 정권 구성시에 여당간에 어떻게 정책을 조정할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사민당 후쿠시마 당수는 8월 31일, 기자단에게 “(국민신당의) 가메이 대표와도 이야기했지만, 만약 연릭에 참가하는 경우 여당간의 정책협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내각의 기구와는 별도로 여당협의회와 같은 조정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내비친 것이다.

 민주당은 총리 직속의 국가전략국에서 예산의 골격을 정한다고 하지만, 다른 당에서는 예산에 관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국민신당 가메이 대표는 정권 구상에 대해서도 “국민신당이나 사민당과 협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견제. 선거협력을 맡았던 오자와 대행도 국가전략국에는 부정적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이런 연립의 정책조정에서 열쇠를 쥘 것으로 보이는 민주당의 간사장 자리에 사민당과 국민신당에서 이름이 오르는 것은 오자와 대행. 대표 시절에 양당과의 조정을 받아들여 신뢰가 두텁기 때문이다.

 만약 여당협의회가 생기면 내각에 대해 극히 강한 거부권을 가질 수 있다. 양당의 수는 적지만, 참의원에서 반대하는 경우 법안이 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 민주당 간사장이 다른 당과 연계할 경우 내각의 정책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민주당 내의 중견·젊은 인사가 오자와 대행의 간사장 임명을 경계하는 이유는 이 점에도 있다.

 국민신당 가메이 시즈카 대표에게는 호소카와 정권에서 하야한 야당의 자민당 시절, 구 사회당과 연립해 오자와 대행 등에게서 정권을 되찾았다는 인연도 있다. 그런만큼 “시즈카에게는 신경쓰는 편이 좋다.”고 하는 목소리도 민주당 내에 있다.

 정치 주도라는 길로는 쉽게 갈 수는 없다. 8월 31일 저녁, 기자단의 연립 협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토야마 대표는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했다.

 “사민당분들과 국민신당분들에 대해 우선 부탁을 드린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경기대책, 복잡한 방정식 / 신정권은 중대국면[각주:3]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다음 날의 도쿄 금융시장은 닛케이 평균 주가가 잠깐 올해들어 최고치까지 올라갔지만, 급속한 엔고 등으로 하락으로 전환하는 등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시장에서는 연말부터 내년 초에 걸쳐 경기가 감속한다는 견해도 있어 새 정권의 경제운영은 곧 중대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


■ 축하식 최고치도 한순간뿐

 “오전의 주가상승은 민주당을 위한 ‘축하식 시장’. 이후에는 새 정권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정권 운영을 끝까지 보면서 추이를 옮길 것.”(유명 증권사)

 총선 다음날의 도쿄 주식시장에서 나타난 견해다. 닛케이 지수는 오전 중에 전주 대비 323.86포인트 상승한 10,767.00포인트를 찍으며 거래시간 중 연초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민주당의 육아 지원책의 수혜주로 보이는 육아 관련 상품에 매수 주문이 모였다.

 동시에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정국안정을 좋은 재료로 삼아 “일본 매수” 주문이 몰리며 엔 시세가 전주 대비 1엔 38엔 오른 1달러=92엔 54전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이후 엔고와 중국의 주가 하락의 영향을 받아 주식시장에서 매도가 잇따르고, 결국 종가는 41.61포인트 내려간 10,492.53포인트. 엔 시세 또한 단기적 움직임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채권시장의 반응은 비교적 차가웠다. 장기금리가 대표적 지표인 신발행 10년물 국채의 유통이율은 한때 1.3%대를 맴돌다 1.295%로 하락(채권가격은 상승). 이후 경기의 불투명으로 주식보다 안정적인 채권에 인기가 모이는 상황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더라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정권교체를 우선 반기지만 경기회복의 특효약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신정권의 정책에 따라 올해 예산의 조정이나 내년 예산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주식시장이나 엔 시세는 그 동향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 공공사업 카드, 양날의 칼

 민주당 중심의 정권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이이치(第一) 생명 경제연구소의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민주당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당은 공공사업비나 공무원 인건비를 깎아 유아 수당이나 고속도로 무료화라는 간판을 내세웠지만 공공사업비 삭감 등은 단기적으로 경기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낭비를 깎아 무엇이 바뀌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올해 2분기의 GDP가 전기 대비 3.7%/년 늘어나 1년 3개월만에 성장으로 돌아섰다. 정부의 경기대책에서 에코 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 공공사업비 증액에 따른 효과가 크고, 민간 분석가 대부분도 3분기에 더욱 그 폭이 늘어난다고 예측한다.

 그러나 정액급부금[각주:4]의 효과도 사라져가고 있고, 연말에는 에코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의 효과도 희미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분기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7월 실업률이 과거 최악인 5.7%까지 올라가는 등 회복을 실감하기에는 아직 멀어 추가 경기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연말 이후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지고, 여론 지지마저 낮아지면 “공공사업비 삭감과 같은 정책 기조를 바꾸어야 할 가능성도 있다.”(노무라 증권 금융경제연구소 기우치 다케히데(木内登英) 경제조사부장)



어제의 적은 오늘의... 자민당 응원하던 지자체장, 우왕좌왕[각주:5]

 민주당이 압승한 총선거가 끝나고 여명이 밝은 8월 31일, 이때까지 자민당을 응원하고 있었던 지자체장들이 민주당에 접근하거나 선거때 있었던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 정권을 장악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고, 민주당이 여당이 된 첫 사태인 만큼 지자체장들도 당분관은 우왕좌왕할 것 같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

 “당선 축하합니다. 선거 중에는 실례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정신으로 부탁드립니다.”

 후쿠오카현(福岡県) 오무타시(大牟田市)의 고가 미치오(古賀道雄) 시장은 31일 아침,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지만 비례대표로는 규슈 블록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노다 구니요시(野田国義) 씨를 단신으로 방문했다. 노다씨는 “알겠습니다.”라고 응했다.

 노다씨와 지역구에서 맞붙었던 상대는 후쿠오카 7구에서 당선된 자민당의 고가 마코토(古賀誠). 운수대신이나 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한 실력자다. 고가 시장은 총선에서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하면서, 야메(八女) 시장이었던 노다 후보를 지칭해 “시장 시절에 실적도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화해에는 노다씨의 선대본부장인 민주당의 오쿠보 쓰토무(大久保勉) 참의원 의원이 동석했다. 오쿠보씨는 총선때 민주당 우세가 전해지자 고가 마코토 후보를 지원하던 후쿠오카 7구의 4개 시장과 면담하면서 “지자체의 장은 중립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고가 시장만은 “한창 싸우는 중에 만나면 어쩌나.”며 면회를 거부했다. 당시 고가 시장은 시 사업에 국가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여당 실력자였던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한 것.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 고가 마코토 의원이 야당 의원으로 전락하는 것이 확실해였다. 고가 시장은 마코토 의원의 실력에 계속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당에 줄대기에도 쫓겼다. 노다 씨를 방문한 것은 그 첫 걸음.

 나가사키현(長崎県) 가네코 겐지로(金子原二郎) 지사는 총선 다음날인 31일, 현청에서 기자단에게 “총선거에서 자민당을 특별히 응원한 것은 아니다.”라며 해명했다. 가네코 지사는 종종 자민당 후보의 집회에 참석하며, “민주당의 공약에는 재원의 뒷받침이 없다.”며 발언해왔다. 그러나 현내 4개 소선거구 모두 자민당 후보가 패배하자 “신세를 진 분으로부터 안내가 있어서 모임에 나갔다.”며 설명.

 가네코 지사는 나가사키 2구에서 낙선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의원의 유세에서 “규마 선생님이 그만두는 결과가 된다면 좋은가? 냉정히 생각하길 바란다.”는 발언을 한 일도 있지만, 31일에는 규마 전 의원을 꺾고 당선된 후쿠다 에리코(福田衣里子) 씨에 대한 질문에서 “굉장히 착실한 분. 금후에 현의 사업에 대해 설명드리고 싶다.”고.



비례대표 「횡재」로 당선 / 한 표의 의사가 왜곡될 우려도[각주:6]

 정상적이라면 비례대표로 의석을 얻어야 할 정당이, 후보자 부족 등을 원인으로 다른 당에 의석을 내준다? 각 당의 득표를 동트 식으로 계산해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방식에 따라, 이번 총선거에서 이러한 의석 양도가 긴키(近畿) 블록(의원 정수 29석)에서 3석, 도카이(東海) 블록(정수 21석)에서 1석 나타났다.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모두 입후보할 수 있는 선거제도 하에서, 민주당은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사람이 많아 13석이 배분되어도 최후에는 비례명부에 11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편 모두의 당(みんなの党)은 비례대표 1석을 당선시킬 수 있었으나,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 출마자가 비례대표에서 당선되고자 할 때에는 소선거구 득표가 유효투표총수의 10%를 넘어야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유일한 비례후보가 낙선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2석과 모두의 당 1석이 자민당과 공명당에 각각 2석과 1석씩 돌아갔다. 모두의 당은 또 도카이 블록에서도 유일한 비례후보가 같은 이유로 낙선하면서 민주당으로 1석이 돌아갔다.

 이와이 도모아키(岩井奉信) 니혼대학 교수(정치학)는 “있는 정당에 투표했음에도, 그 몫의 의석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정당에 돌아간다면 유권자의 의사가 존중받지 못한다. 후바자가 모자란 경우 정수를 깎는다는 발상도 괜찮다.”며 “소선거구에서 낙선했는데 (비례대표에서) 부활 당선하는 중복 입후보 구조 자체에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제도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한다.

 모리 히로키(森裕城) 도시샤대학 교수(정치학)는 “(의석 양도는) 이전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어, 민의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를 느낀다. 국회의원이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괜찮으니까 명부에 올린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편 총무성의 스즈키 야스오(鈴木康雄) 사무차관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러한 사태가 있었으나, 현행 방식이 좋다고 하는 국회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선거제도는 각 당과 각 회파(한국의 교섭단체격)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에 그쳤다.

  1.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39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8월 31일자</A>. [본문으로]
  2.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3.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4.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9월 1일자</A>. [본문으로]
  4. 올해 4월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18세~65세에게 2만 엔, 이외에는 1만 2천엔씩 지급. [본문으로]
  5.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901/SEB20090831004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8월 31일자</A>. [본문으로]
  6.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831/TKY200908310394_0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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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제2회 전국대회
일본사회당의 출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비공산당계열이던 합법 사회주의 세력이 단결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좌파의 노동농민당(労働農民党), 중간파인 일본노농당(日本労農党), 우파인 사회대중당(社会大衆党) 등이 결집하였으며, 우파와 중간파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는 수정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일부였던 사회대중당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부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일본사회당 제3회 전국대회
전쟁 이전에도 창당 당시에 당명을 ‘일본사회당’으로 할지 ‘사회민주당’으로 할지 논의하다가 일본어 명칭은 일본사회당으로, 영문 명칭은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 (SDPJ)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Japan Socialist Party (JSP)라는 영문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져 사회민주주의가 당의 노선이 되면서 SDPJ의 영문 명칭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시치카(徳川義親) 후작 등의 명망가를 추대하려는 의도로 당초의 위원장은 공석으로 되어, 초대 서기장으로는 가타야마 데쓰(片山哲)가 취임했지만, 곧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원내 제1당으로 부상

가타야마 데쓰

가타야마 데쓰

일본국 헌법에 의해 치뤄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히라노 리키조(平野力三) 농림상이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고, 당내의 좌파는 공공연하게 내각을 비판하는 등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48년에 가타야마 내각이 당내의 파벌 대립의 선동으로 와해되었다.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내각관방장관은 좌파의 입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좌파는 사실상 당내의 야당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이어 수립된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내각에서 사회당은 여당의 자리를 지키며, 일부 좌파의 입각을 인정했지만, 극좌파의 구로다 히사오(黒田寿男) 등 6명이 예산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명되는 등, 극좌파와 극우파를 몰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쇼와전공 사건이 발생해 뇌물 수수로 아시다 총리와 니시오 스에히로 부총리가 체포되면서, 결국 내각이 하야하게 되었다.

제명된 구로다 히사오 등은 12월 3일, 노동자농민당을 결성했다. 1949년 1월 23일의 제2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이 48석으로 격감해 여당에서 제2야당으로 추락했으며, 위원장이던 가타야마 데쓰까지 낙선하게 되었다.


좌우파의 분열과 총평·사회주의협회의 결성

총선거에서 패배한 후에 열린 제4회 당대회에서 모리토 다쓰오(森戸辰男)가 당의 성격을 ‘국민정당’으로 규정하고, 의회주의에 근거한 반공을 주창했다. 그러자 이나무라 준조(稲村順三)가 혁명에 의해 사회제도를 변혁하며, 때에 따라서는 공산당과의 연합도 불사하는 ‘계급정당’적 성격의 일본사회당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결국 일본에서의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 방향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으며, 가쓰마타 세이이치(勝間田清一)가 제기한 ‘계급적 대중정당’이라는 정의로 결착이 지어지는듯 했다.

1951년 사회민주당
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좌우 양파의 대립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1950년 1월 16일에는 좌·우파가 분열하게 된다. 이때는 75일 후인 4월 3일의 당대회에서 다시 통일할 수 있어 대립이 종료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대일강화조약의 찬반을 둘러싸고 좌우 양파가 대립하기 시작해, 1951년 10월 24일에 다시 분열된다.

1950년 7월에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결성된다. 총평은 노동조합에서 일본공산당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주선으로 결성되었기에 초기에는 온건한 색채를 띄고있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재군비 논쟁이 과열되면서, 총평 내에는 재군비반대파가 대두해 반미·반정부의 자세를 강화해갔다. 1951년에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 전쟁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사회주의협회가 결성되는 등, 이후의 일본사회당을 지탱하는 조직적·이론적 배경의 기반을 형성해갔다.

스즈키 모사부로의 취임사 장면

스즈키 모사부로

분열 직전인 1951년에 위원장으로 취임한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는 위원장 취임사에서 “청년이여, 총을 들지 말게”라고 호소하며 비무장 중립론을 주창했다. 이는 전쟁을 싫어하는 감정이 강했던 당시의 젊은 층에서 부각되며, 분열 이후에도 비무장 중립론을 주창하던 사회당 좌파의 세력을 늘리게 했다. 또한 총평도 사회당 좌파의 약진을 지원했다. 한편 사회당 우파는 재군비에 적극적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와 소극적이었던 가와카미 조타로(河上丈太郎)의 대립 등으로 재군비에 대해 명확한 자세를 취하지 못했고, 노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세력이 후퇴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좌파가 당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좌우 통일과 1960년의 안보투쟁

1955년
사회당 좌우 양파는 1955년 10월 13일에 열린 당대회에서 오랜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의석의 확대는 계속되었고, 통일 당시에는 중의원 의석이 156석에 달하고 있었다. 이즈음 보수에서는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1956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새로 선출한 127석 중 자민당이 61석을, 사회당이 49석을 얻어 양당 체제가 견고해졌다. 당시에는 영국과 같은 양당제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고, 사회당 또한 정권 획득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1957년에는 당의 분열이 완전히 해소되기도 했다.

1959년
그러나 1958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후보자의 난립을 억제한 자민당이 287석을, 사회당이 166석을 획득해 주춤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는 사회당의 최고 의석으로, 유일하게 3분의 1을 넘는 의석을 획득한 선거였다. 1959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도쿄 선거구에 공천한 후보가 전멸하는 등, 당의 세력이 후퇴했다.

극우파였던 니시오 스에히로는 ‘패한 원인은 계급정당론, 용공, 친중·소 노선’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폐지를 주장하던 사회당에, 조약 개정에 반대한다면 그를 대신하는 안전보장체제를 명확히 할 것이나 안보개정저지국민회의의 주도권을 총평에서 사회당으로 옮긴 뒤 일본공산당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니시오 스에히로 및 가와카미 조타로 등의 파벌 일부는 1959년에 연달아 탈당한 뒤, 다음 해에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후일에 이런 배후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음이 밝혀졌다.[각주:1]

1961년
결국 사회당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앞두고, 조약 폐기를 쟁점으로 정권 획득을 노리게 되었다(안보 투쟁). 또한 거의 동시에 전후 최대의 노동쟁의로 불리는 미쓰이 미이케 쟁의가 일어났다. 이 쟁의와 안보 투쟁에 사회당은 전력을 쏟으며 싸우기 시작한다. 이때 사회당의 청년부를 기초로 한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결국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미이케 광산 노동자 측에 현저하게 불리한 조정안을 제시하면서부터 패배가 결정되었고, 새 안전보장조약도 자연스럽게 성립하게 되었다.


구조개혁 논쟁과 ‘길’의 채택

민사당이 떨어져 나갔지만, 제1야당의 자리는 여전히 일본사회당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보수세력에 대비되는 혁신세력의 중심으로 건재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살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살

1960년의 10월 12일에는 NHK가 기획한 도쿄 히비야공회당 3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중이던 대표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17세의 우익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좌측 흉부를 찔려 사망했다. 11월 20일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일어났지만, 선거에서 사회당은 145석을 획득했다. 민사당은 17석을 획득했지만, 자민당은 296석으로 의석을 늘렸다.

1958년의 총선거 직후부터 당 내에는 개혁운동이 시작되어, 에다 사부로(江田三郎)는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아 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곧 안보 투쟁과 미쓰이 미이케 쟁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시킨 뒤 그 축적된 것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구조개혁론’을 제창했다. 에다 사부로는 1962년의 강연에서, 장래의 일본의 목표로 해야하는 미래상으로 이른바 ‘에다 비전’을 제시했다. 이 미래상에는 ‘미국의 평균적인 생활수준과 소련의 철저한 생활보장,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 일본국 헌법의 평화주의를 종합적으로 조정할 때 대중과 맺어진 사회주의가 태어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것으로 에다는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사사키 고조(佐々木更三) 등은 에다의 대두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사사키와 손잡은 사회주의협회의 영향력도 커졌다. 당의 ‘대중화’ 구호와는 반대로, 지도자들은 파벌 싸움에 날이 지고, 사회당은 오로지 사회주의협회와 총평의 조직력에만 의존하는 체질이 되어갔다. 1964년에는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사실상의 강령 ‘일본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에의 길’(통칭 )이 채택되었다. ‘길’은 1966년에 보정되어,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표현을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하고 이었지만, 사민주의는 좌파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한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매우 적대시 되었다. 좌파는 체제의 개혁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타도하려는 혁명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사민주의로의 전환은 자본주의에의 패배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민사당으로 떠나 좌파의 힘이 강해진 때문이기도 하고, 당내의 우파가 적극적으로 사민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사회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한 정당이면서, 소련이나 중국 등의 제2세계 국가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특이한 강령을 가진 정당이 되었다. 사회당 간부는 소련이나 중국에는 우호 방문을 반복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서는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거나 사죄하라고 대사관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등의 편향적인 대외 교류정책을 취해 사실상 중립정책을 폐기하고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기 때문에, 사회당은 어느 기간은 회비를 납부하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탈퇴는 하지 않았다.


정체에서 낮은 하락세로

고도 경제 성장과 함께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되었으므로,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사회당의 의석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되었으며, 사회당 또한 선거마다 후보자를 늘리고 있었다. 하지만 1963년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1석이 감소한 144석, 196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4석이 감소한 140석으로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세력이 정체했다거나, 미묘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당은 정체의 원인을 찾기보다 내부의 파벌싸움에 에너지를 소비할 뿐, 이 정체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시카와 마스미(石川真澄)는 이러한 정체의 원인을, 새로 도시에 유입된 사람은 상당부분이 상시 기권층으로 전락하며, 일부는 공명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지역을 보살피는데 열중하는 정당에 흡수되어 간 것으로 지적했다. 도시에서는 점차 다당화 현상이 현저해진 것도 한 원인이다. 이를 두고 다나카 젠이치로(田中善一郎) 등은 이시기의 자민당이 후보를 줄였으며, 야당은 후보를 늘려 결과적으로는 야당의 표가 증가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결국 도시지역에서 사회당 지지자가 감소했다는 것은 공통된 지적이다.

196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후보자를 26명이나 줄였지만, 의석은 전의 선거에 비해 50석이나 줄어든 90석으로 급감했다. 이시카와 마스미는 또한 이러한 현상을, 사회주의에 불리한 사건들이 일어난 것 때문에 사회당에 진저리가 난 지지층이 대부분 기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1970년대 전반에는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巳)와 서기장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嗣)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의석을 어느정도 회복하기도 했다.

55년 체제가 성립한 당시는 사회당도 정권 획득을 목표로 했으며, 지지자의 상당수도 사회당 정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일당 우위체제가 지속되면서, 사회당의 정권 획득에 대한 열망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사회당이지만,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사회당 또한 현상 유지에 급급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낮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만년 야당’으로 불리며, 지지자들 또한 자민당 정권이 지속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지역에서 사회당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상당해, 도쿄 도 의회에서는 자민당 뿐만 아니라 공명당과 일본공산당에도 의석이 미치지 못해 제4당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지방에서는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당은 도시형 정당에서 농촌형 정당으로 전락해 갔다.


혁신 지자체와 사회주의협회 세력의 대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당은 일본공산당까지 포함한 모든 야당의 공동투쟁 노선을 취해, 지자체에서 공산당과 함께 선거를 진행시켰다. 그 결과 도쿄 도, 오사카 부 등 각지에서 혁신 지자체의 수장이 탄생했다. 이런 혁신 지자체들은 사회 복지의 강화 등 일정한 결과를 남겼지만, 재정의 악화를 불렀다는 비판도 받고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극좌파를 배제하면서 사회주의협회의 영향력이 조직에서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사키사카 이쓰로(向坂逸郎)를 지도자로 한 당시의 사회주의협회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의 저작을 절대시하면서, 소련을 ‘사회주의의 조국’으로 생각하며 체코 침공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등, 사회당이 제시한 당시의 중립정책이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친소 경향의 사회주의협회 세력이 확대되면서, 사사키 고조 등은 예전에 적대시하던 에다 사부로와 연합하면서, 이후 사회주의협회 세력과 반협회 세력의 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협회 규제와 ‘신선언’

도쿄시민사회연합준비회의 에다 사부로

에다 사부로

1976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무소속 보수계 의원들의 공인으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당 자체의 의석 확보는 처음으로 과반수를 넘지 못해, 정권 교체가 도마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당 내의 분란은 계속되어, 에다 사부로는 ‘1977년의 당대회에서 사회주의협회 세력이 대의원 다수를 억제해, 부위원장을 해임시킨 것 때문에 사회당에 절망했다’며 탈당해, 사회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이와 함께 1977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 등이 사퇴했다. 결국 협회 규제가 행해져, 철저하게 이론집단으로만 머물 것을 맹세하게 해 사회주의협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이후 총평도 변화하기 시작해, 1980년대 이후의 사회당은 일본공산당은 제외하고, 민사당과 공명당 등의 중도 세력과 함께 연립정권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지자들마저 자민당 정권이 자명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공명당과 민사당은 공식적으로는 사회당과의 사-공-민 노선을 취하면서도,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을 노리게 되었다. 의석수는 여당과 야당이 비슷해졌지만, 유권자들의 의식에서는 자민당 정권의 안정성이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의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는 자민당이 크게 승리했지만, 1983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다시 여당과 야당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사회당의 의석은 소폭 증가한 것에 머물렀다.

1986년에는 격렬한 논쟁 끝에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이 ‘길’을 ‘역사적 문서’로 보류함으로써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강령인 일본사회당의 신선언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폭력혁명을 원천적으로 막아, 의회 정당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표결을 통한 것이 아닌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것에 집행부가 얽매여, 구노선을 계승한다고도 해석되는 추가 결의를 타협의 산물로 덧붙였기 때문에, 노선 전환이라는 의식이 당 전체에 명확하게 공유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명확한 의미로의 노선 전환은 무라야마 내각 성립에 이르러서야 이루어 졌다.


마돈나 붐의 고조와 쇠퇴

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

‘신선언’이 채택된 이후에도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고, 1986년의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는 중의원의 의석이 85석으로, 이전의 선거보다 27석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986년 9월 8일,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본의 의회 정당으로는 최초로 여성 당수가 탄생했다.

도이 다카코의 인기와 함께, 소비세 도입으로 늘어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끌어안은 사회당은 1989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46석을 획득해, 36석을 획득한 자민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사상 최초이자 최후가 된 사회당의 참의원 제1당으로의 등극에는, 여성후보를 적극적으로 공천했기 때문에 붙여진 마돈나 선풍의 영향도 컸다. 도이 다카코는 자민당의 의석이 무너진 것을 두고, “산이 움직였다”고 표현했다.

1990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1960년대 후반 수준인 136석을 획득해 다시 약진했지만, 자민당도 추가 공인을 포함해 안정적인 286석을 획득했다. 사회당은 선거에서 표면상으로는 정권 교체의 실현을 내걸었지만, 결국 사회당의 증가한 의석은 자민당이 아닌 다른 야당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격렬한 파벌 싸움과는 달리, 선거에서의 긴 시간동안 보여준 소극적인 모습이 사회당의 체력을 빼앗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당 내에서는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의석수를 회복했다는 안도감이 크게 작용해, ‘사회당은 정권 획득의 의지가 없는 만년 야당으로 만족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사회당의 단독 승리는 이에 불만을 가진 민사당과 공명당의 이탈을 불렀다.

걸프 전쟁을 둘러싸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어떠한 공헌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인 문제로 부상했지만, 사회당은 정부안에 대한 반대만을 강조했으며, 상당수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안을 보여주지 못해 실망을 불렀다. 이와 함께 민사당과 공명당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등의 노조 간부와의 마찰도 강해져 도이 집행부의 구심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결과적으로 1991년의 지방선거에서 공전의 패배를 기록해, 도이 다카코는 그 책임을 지고 위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위원장 선거에는 다나베 마코토(田邊誠)와 우에다 데쓰(上田哲)가 입후보했다. 노동조합을 뒤에 업고, 유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은 다나베가 유리하다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호헌·평화노선의 유지를 주장하는 우에다가 일반 당원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다나베는 노조로부터의 집단 입당자의 표로 간신히 승리하게 되었지만, 이 결과는 이후의 당 집행부에 큰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다나베 집행부와 PKO법안

새로 취임한 다나베 마코토 위원장은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金丸信)과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1992년, ‘국련(UN)평화협력법안’, 일명 PKO법안에는 표결시에 의도적으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등 강경한 반대를 취했다. 자민당과 공명당, 민사당의 3당은 문민에 의한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것에 합의했으므로, PKO법안이 순조롭게 성립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민당의 본심은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목적으로 한 법안이었다. 그때문에 민사당과 공명당이 동의하자 곧 별도 조직안을 폐기했다. 이때문에 사회당은 PKO법안 자체에 반대했던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민사당과 공명당은 자민당과 함께 내각신임안을 가결시키는 등 실질적으로는 여당이 되어있었다. 사회당은 모든 중의원 의원의 사직까지 고려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저항을 단념했으므로 PKO법안 반대파와 찬성파 쌍방에 나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7월 26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승리해, 사회당은 대패했다. 집행부는 의석을 확보한 것에만 주목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다나베 집행부는 퇴진하고, 야마하나 사다오(山花貞夫)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호소카와 연립내각의 출범과 무라야마 내각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3년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70석을 확보해 대패했고, 도쿄 도에서는 11석에서 1석으로 격감하는 등,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일으킨 열풍으로 얻은 의석을 완전히 잃었을 뿐만 아니라, 55년 체제 이후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총선거 후에는 야마하나 사다오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어 자민당이 분열하면서 탄생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내각에 연립 여당으로 참여했다. 호소카와 총리가 퇴진한 후에는 신생당·공명당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하다 쓰토무(羽田孜) 내각 참여에 합의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 이에 크게 반발한 무라야마 위원장이 하다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다 정권은 2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 임명의 사령

무라야마 총리 임명의 사령

1994년 6월, 연립여당은 자민당의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를 수반으로 옹립해 자민당의 분열을 노렸다. 하지만 자민당은 이에 대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사회당 또한 당수가 수반이 되는 것에는 저항하지 않았고, 가이후를 지지한 의원도 극히 드물었다. 정권 탈환에 적극적이던 자민당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결선투표를 통해 무라야마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당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사회당이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사회민주당 로고

사회민주당 로고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안보조약을 긍정하고, 비무장 중립정책의 폐기 등을 표명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지속된 당노선에서 180도 변화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의 구심력이 떨어져,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1995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었다. 이어 1월 19일에 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고, 3월에는 제1회 당대회를 개최해 일본사회당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군소정당으로 전락

중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함께 이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안팎의 사정도 달라져 1996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사민당 단독으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힘들다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신당 사키가케와의 합병이나 신당을 창당해 합류하는 것 등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간 나오토(菅直人) 등이 중심이 되어, 새 선거구에 의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실시된 중의원 해산 직전에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사민당은 민주당으로 참가하기로 했지만 곧 참가 의견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간사장이었던 사토 간쥬(佐藤観樹) 등을 포함하여 반 이상의 국회의원이 사민당을 떠나 민주당 결성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결국 남아있던 당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선거를 앞두고 1996년 9월, 도이 다카코를 당수로 추대하고 10월 20일의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사민당을 지지하던 노동조합의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지만, 아직 지방조직의 상당수는 사민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55년 체제 이후 제1야당의 자리를 고수하였던 사회민주당은 선거전의 70석에서 15석으로 의석이 급감하게 되었다. 이는 민주당의 52석보다 적은 숫자이며, 일본 공산당의 26석보다도 적은 숫자라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전개

2000년 총선거 당시 도이 다카코 선거 포스터

도이 다카코 포스터

일본사회당의 기반이었던 노동조합의 대부분이 민주당으로 옮겨간 후,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는 자신의 생각에 공감하는 여성 시민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선거 입후보자로 기용했다. 그녀들은 ‘도이 칠드런’으로 불리며 활약해, 2000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4석이 증가한 19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2001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득표율이나 의석수 모두 큰 폭으로 감소해, 결과적으로 같은 해 열린 제7회 당대회에서 간사장으로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정책심의회장으로 쓰지모토 기요미(辻元清美) 등 시민운동 출신이 당의 주요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에 대한 저항성이 더욱 강해졌다.

2000년 총선거 당시 쓰지모토 기요미 선거 포스터

쓰지모토 기요미 포스터

2002년 3월에 시민파의 대명사라고 불리던 쓰지모토 기요미가 비서관 급여 착복 의혹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나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강해져, 다지마 요코(田嶋陽子) 참의원 의원 등의 탈당까지 부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2003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이 6석으로 감소하게 되었으며,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는 소선거구에서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겨우 당선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시민운동 출신의 의원들까지 이 여파를 받아 대부분이 낙선하게 되었다. 결국 도이 다카코 당수가 패배의 책임을 안고 사퇴하게 되었으며, 11월 15일에는 간사장으로 있던 후쿠시마 미즈호가 새 당수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간사장에는 노조 출신의 마타이치 세이지가 취임함으로써, 시민파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2004년 6월 30일에 후쿠시마 당수는 ‘자위대는 위헌’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 해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당수인 후쿠시마 미즈호를 비롯해 단 2석을 획득해, 개선하지 않은 3석과 합쳐 총 5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5년 2월 17일에는 재정난을 이유로 당직자들을 정리 해고할 방침을 직원단체에 통고했다. 직원단체는 정리 해고에 반대했지만, 당은 직무 태만 등을 이유로 들어 결국 3명을 해고하게 되었다. 해고된 3명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하였으나, 2007년의 1심과 2심 모두 당이 승소하였다. 이 사건은 노동자의 대표를 칭하는 정당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2005년 8월 8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가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된 것을 계기로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러자 다음날인 8월 9일, 부당수로 있던 요코미쓰 가쓰히코가 탈당했고, 8월 17일에는 정책심의회장을 역임한 하마다 겐이치가 탈당을 표명하고 모두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두 사람은 8월 1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모두 지역구에서는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요코미쓰가 당선되었다. 사민당은 탈당하고 있던 쓰지모토 기요미를 공천하여 오사카에서 출마하도록 했지만, 지역구에서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던 쓰지모토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강하다. 당의 얼굴이던 도이 다카코는 긴키 비례대표 5번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선거 결과 5석에서 7석으로, 2석이 늘었지만 여전히 법안 제출권은 없는 군소정당이다.

후쿠시마 미즈호 사회민주당 당수

후쿠시마 미즈호 현 사민당수

2006년 2월 2일에 당본부에서 열린 상임간사회에서 자위대가 ‘현상 분명한 위헌상태’이며, ‘축소를 도모하여’, ‘비무장의 일본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선언’이 제안되어, 2월 11일~2월 12일에 걸쳐 열린 당대회에서 이 방침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선언’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1994년 일본사회당 시절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밝힌 자위대의 합헌·용인 노선을 수정한 것으로, 지방에서의 토론을 거듭해 많은 당관계자로부터 제출된 의견을 채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93년에 정치개혁관련 4법안에 반대해 징계를 받은 17명 중 탈당한 사람을 제외한 9명의 처분을 취소해 명예를 회복한 것과 당수를 역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도이 다카코가 명예 당수에 취임하는 일도 결정되었다.

200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헌법 9조와 연금이 위험하다! 이번에는 사회민주당에”를 캐치카피로 하고, 헌법과 연금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펼쳤지만 결과는 간사장 마타이치 세이지(又市征治)를 포함하여 2석을 확보하는데에 그쳤다. 그해 12월 22일의 제11회 당대회에서는 무투표로 후쿠시마의 세 번째 당수 선거 당선을 결정했으며,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10석 이상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침을 밝혔다.


일본사회당의 역사적 역할

일본사회당이 분열되었다 다시 합친 1955년 이래 자유민주당과 함께 55년 체제의 한쪽 날개를 담당했지만, 결국 독자적으로는 정권을 취하지 못하고 쇠퇴했으며, 마지막에는 분열되어 상당수가 민주당으로 갈라졌다. ‘신선언’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시도는 했지만, 결국 그에 기초한 정책과 운동방침은 ‘신선언’을 추진한 사람조차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독일 사회민주당처럼 노선전환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해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구축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해 당의 조직 개혁에도 힘을 쏟았지만, 일본사회당은 지도부가 형성한 사회주의협회등 사실상의 공산주의를 내건 좌파와, 그에 실망해 당을 떠난 에다 사부로 등 반공적이고 현실적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우파의 충돌이나 친소련파와 친중국파의 대립등으로 이념의 구축이나 당조직 개혁등에는 거의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절감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는 중도좌파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붕괴해,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처럼 중도우파·보수주의 정당과 정권을 교대하는 세력으로는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도 경제 성장으로 풍족해진 국민들에게 사회당이 내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또한 매력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으며, 소련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는 이미지 상으로도 그 매력을 완전히 잃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사회당은 본래 교조적인 사회주의를 대신해 일본에 맞는 사회주의를 구성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실행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생명의 끝을 앞당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이었던 자민당의 분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비자민 세력에서는 제1당인 사회당의 야마하나 사다오가 비자민 세력을 결집해 내각을 조직하는 책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어떤 정책 구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야마하나나, 마찬가지로 어떠한 구상도 없이 절호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나 하다 쓰토무를 총리로 옹립한 사회당 또한 정권을 담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외에 알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민당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던 사람들의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어 사회당의 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 자민당과의 연립을 통해 무라야마 내각을 수립한 것은 오랜 지지자들마저 사회당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도이 다카코마저 이에 반대하지 않고, 중의원 의장으로 자-사-사 연립내각에 협력해버렸으므로, 이후에 연립을 해소하고 자민당을 비판해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일본사회당의 존재는 전쟁 이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사회복지를 진전시키는 등의 역할을 완수해 일본이 안정적인 사회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비무장 중립론을 내건 사회당의 존재 덕분에 자민당이 미국에 대해 과도한 군사력 증강을 요구할 수 없었으며, 경무장 노선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55년 체제는 결국 자민당과 사회당이 지지단체의 권익 배분에 노력하게 만든 공생 시스템이었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55년체제 말기에는 일본사회당이 안이하게 노조에 의존해, 독자적인 지지세력의 확립을 더욱 등한시하는 바람에 단순히 노조의 이익 대변자로 전락한 것은 유권자가 일본사회당에서 멀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월간 사회당 편집부, 『일본사회당의 30년』,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기관지국, 1975년 11월.
  • 일본사회당 결당 40주년 기념 출판, 『자료 일본사회당 40년사』,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1986년 7월.
  • 일본사회당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일본사회당사』, 사회민주당 전국연합, 1996년 9월.
  • 우에즈미 미쓰히로(上住充弘), 『일본사회당흥망사』, 지유샤(自由社), 1992년 9월.
  • 나고시 다케오(名越健郎), 『크레믈린 비밀문서는 말한다 - 감춰진 일소 관계사 - 』, 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1994년 10월.
  • 하라 요시히사(原彬久), 『전후사의 중심의 일본사회당 - 그 이상주의는 어떠한 것인가』, 주오코론신샤, 2000년 3월.
  •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郎)·이시카와 마스미(石川真澄) 편, 『일본사회당 - 전후 혁명의 사상과 행동』, 니혼케이자이효론샤(日本経済評論社), 2003년 10월.
  1. <A h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42604.html" target=_blank>CIA, 일 야당분열 ‘비밀공작’ 폈다</A>, 한겨레신문 2006년 7월 19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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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