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2.13 거칠어지는 블로거의 손 (5)
  2. 2008.02.12 남대문 멸실 관련하여
  3. 2008.02.11 숭례문편액고(崇禮門扁額考) (2)
일전부터 내가 조선 블로거들이 말을 험하게 한다, 버릇이 없다는 식으로 거론한 적이 있는데, 근자에 도성 남대문(南大門:숭례문)이 전소되기를 전후하여서는 더욱 손(입이라고 해야겠지만 마땅히 블로그에 싸질러 놓는 것은 손이니 손)이 거칠어지는 듯 하다. 물론 남문이 전소된 만큼 사람들의 상심이 큰 것을 알고, 나 또한 밤새 현장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근데 이를 전후하여 블로거들이 싸질러 놓은 현장을 보면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움 보다는, 일단 소방관을 까고, 유홍준을 까고, 문화재청을 까고, 이명박을 까고, 노무현을 까고, 이어 대변을 한 나경원을 까고, 해명을 한 이경숙을 까고, 만평을 한 조선일보를 까고, 그리고 YTN에서 중계를 했던 기자를 까고, 이게 무슨 품위없는 세상인가(내가 품위 운운한다고 고상한 것을 원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도의 노인들이 하는 욕은 품위가 넘친다).

이 행태를 보면 일단 남대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불문하고, 국보1호는 일단 비싼 것인데 태워먹었으니 지키지 못한 죄인들 다 죽어라!하는 식으로, 이건 비판도 아니고 일단 까고보자는 식이다. 물론 나도 까는 글이 대성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까는 글로 블로그에 사람이 좀 더 찾아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정신을 차린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살펴보지도 않고 일단 까는 식으로 나아가면 되는 일이 없다. 블로그에 쓴 글 제목에는 공업용 미싱으로 꿰멘다느니, 아니면 죽이고 싶다느니 엽기적이고 괴이하다느니 하는 제목이 걸리는데, 댓글에다가 공업용 미싱으로 꿰멘다느니, 엽기적이고 괴이하다느니 하는 댓글을 쓰면 그것은 왜 악플이 될까. 그것이 악플이라면 제목 또한 악제이고, 글 또한 악글이다.

블로그에 쓰는 글은 결국 그 블로거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그래서 나 또한 아무튼지간에(누지름)를 보고 느낀바가 많아 내 이름을 걸었고, 내 메일 주소를 걸었다. 좀 더 품위있는 글을 쓸 수는 없을까.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은 품위있는 글이 된다, 그리고 논리가 정연한 글 또한 품위있는 글이지만 논리를 생략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여도 품위있는 글이 된다. 품위없는 글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일단 까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몰아 자신의 생각과 똑같다는 반응을 얻고자 한다면 자연히 품위없는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까고자 하는 글은 일단 낚는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 낚는 수단으로 가장 좋은 것이 거친 글이기 때문이다.

올블로그가 대안언론이라는 이야기의 글(누지름)을 읽은 례가 있는데, 이 또한 상기한 바와 같은 부분이 문제가 되느냐가 생각이 되는데. 금일에 남유진 시장이 참석한 행사에서 들은 이야기가 깨진 유리창 효과라는 것과 마이크로트렌드의 이야기이다. 저런 악글이 성공한 사례가 자꾸 늘어난다면 어찌 나라에 큰 문제가 되지 않으랴.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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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는 십일홍이나, 지지 않을 꽃이 그만 꺾이고 말았구나.
외모는 우뚝하고, 중심은 웅심하여 양 처마 끝으로 도성을 감아내었으니 어찌 누가 중도에 명을 달리할 줄을 알았겠느냐. 아직 그 운이 한창인데 어느 뉘가 알았으랴, 하늘에게도 묻지 못하고 신에게도 묻지 못하겠다. 남은 바 없으니 장사는 어찌하랴, 지지당은 공허한데 시냇물은 흐르고, 차는 가고 사람은 걷는데 너는 남은 바가 없으니 절후는 어제와 같고 삼원도 그와 같은데 대문은 어디갔는지 아 그만이로다. 마음만 애닲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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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이 이 밤에 전소되어 버렸는데, 그 중에 편액만은 우선 건져내었으므로 이 편액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한다.

대중에 알려지기를 이 편액이 조선조 태종대왕의 장자이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쓰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설한 것을 받은 것인데, 이후에 이리저리 전해지면서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일설은 조선의 명필가이자 신숙주의 부친이던 신장(申檣)의 글씨라고 하는데, 이것은 김추사(金秋史:추사 김정희)의 완당집에서 이른 것을 받은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오주(李五州:오주 이규경)는 그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각주:1]에서 이 유래를 상세히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이처럼 이규경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숭례문의 편액을 정난종의 편액이라고 하고 있다. 그 또한 명필이니 일리는 있는 듯하다. 또한 이귤산(李橘山: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각주:2]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숭례문은 공조 판서 유진동(柳辰仝)이 쓴 것이다. (중략)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 대서(後板大書)는 공조 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글을 더 할수록 여러가지 이야기만 늘어난다. 1935년에 문호암(文湖岩:문일평)은 그의 글에서 이 글씨가 서체연구로 유명한 추사의 견해를 따라 신장의 글씨라고 판정하였는데, 그러면서 유진동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니 양녕대군의 필(筆)을 내렸다가 다시 유진동의 필을 걸었다는 것을 해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이귤산이 화재론을 내었으니 이 사항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겠다.

이렇듯이 주로 네 견해가 주창되고 있는데, 아직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다. 고령 신씨 문중에서는 신장의 글씨라 하고, 중앙일보는 무턱대고 양녕의 글씨라 하는 바이니 이에 대하여 서체를 더욱 명확히 검증하여 누구의 글씨인지 감만 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너무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연구에도 좋지 아니할 뿐더러, 상상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1.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쓴 책으로, 조선과 중국 등의 여러 나라의 고금사물<FONT color=#8e8e8e>(古今事物)</FONT>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한말의 문신 귤산 이유원이 묶은 책으로, 조선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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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1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