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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사건

2008.01.08 03:24 from 신사어람단
야스다 사건(安田事件), 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은 1969년에 일본의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가 도쿄 대학의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이를 경시청이 봉쇄해제 한 사건이다.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 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이라고도 한다.

1960년대 후반에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격화의 길을 걷고 있던 제2차 반안보투쟁, 그리고 전국의 국공립·사립대학의 수업료 인상 반대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 대학의 전공투나 (신좌파성격의) 학생들이 무력투쟁을 전개한 학원분쟁이 일어났다. 전공투의 학생들은 대학 당국과의 단체 교섭에서 강경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했으며, 수락되지 못한 경우에는 대학 내에서 바리케이드 봉쇄 등의 강경 수단을 동원했다. 학원분쟁은 전국으로 파급되었고, 도쿄 도 내에서만 55개 대학이 바리케이드 봉쇄에 들어가는 등 절정에 이르러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그 중, 도쿄 대학에서는 의학부 학생이 등록의 제도 반대 등을 외치며 일명 인턴 투쟁을 시작한 도쿄대 투쟁(도쿄대 분쟁)을 전개한다. 이 후 투쟁은 격화되어, 1968년 3월 12일에는 의학부 총합중앙관을, 3월 27일에는 야스다 강당을 일시 점거하면서 다음날로 예정된 졸업식이 중지되었다. 6월 15일에는 의학부 학생이 야스다 강당을 다시 점거하면서, 대학 당국의 오코치 가즈오 총장은 경찰력을 동원해 이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이로 인하여 학생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7월 2일에 야스다 강당은 바리케이드 봉쇄되었다. 대학 당국은 사건의 해결을 도모했지만, 이는 학생들의 반발만 불러와 도쿄대학 전학부의 학생 스트라이크가 일어나고, 주요 건물 중 다수가 봉쇄되었다. 11월에는 오코치 총장 이하 전 학부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11월 22일에는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두고 전공투 계열의 7천여명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공산당(민청) 계열의 7천여명이 서로 대립하였다. 전공투 내부에서는 후지와라를 중심으로,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 반대를 각파에 호소했다. 결국 전학 바리케이트 봉쇄는 중지되었고, 이를 두고 사정을 모르는 일부 학생들은 ‘구리타 함대 수수께끼의 반전’이라고 불렀다. 민청 계열에 패배했다기 보다는, 민청 계열과 충돌하더라도 강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내부에서 붕괴된 것이다.

오코치 총장의 후임으로 가토 이치로 교수가 총장대행으로 취임하고, 1969년 1월 10일 국립 지치부미야 럭비장에서 ‘도쿄대학 7학부 학생집회’를 열어 민청계와 학원 정상화를 추구하는 논포리 학생과 교섭을 통해 스트라이크 수습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점거를 지속하는 전공투 학생과는 의견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경찰력 도입을 결심, 1월 16일에 정식으로 경시청에 기동대에 의한 대학 구내의 바리케이드 철거를 요청했다.

경시청 경비부는 8개 기동대를 동원해 1월 18일 오전 7시경 의학부 총합중앙관과 의학부 도서관에서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했고, 투석·화염병 등의 학생들의 저항을 막으면서 의학부·공학부·법학부·경제학부 등의 각 학부의 시설 봉쇄를 해제하고, 야스다 강당을 포위했다. 오후 1시경에는 야스다 강당의 본격적인 봉쇄 해제가 시작되었지만, 강고한 바리케이드와 학생들의 강한 저항으로 기동대가 고전하면서, 오후 5시 40분경 경비본부는 작업 중지를 명령했다.

다음날인 1월 19일 오전 6시 30분, 기동대의 봉쇄 해제가 재개되었다. 학생들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 50분, 돌입한 기동대원이 3층 대강당을 제압했고, 오후 5시 46분에는 옥상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학생 90명을 검거함으로써,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봉쇄 해제는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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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