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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1 숭례문편액고(崇禮門扁額考) (2)

숭례문(崇禮門)이 이 밤에 전소되어 버렸는데, 그 중에 편액만은 우선 건져내었으므로 이 편액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한다.

대중에 알려지기를 이 편액이 조선조 태종대왕의 장자이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쓰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설한 것을 받은 것인데, 이후에 이리저리 전해지면서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일설은 조선의 명필가이자 신숙주의 부친이던 신장(申檣)의 글씨라고 하는데, 이것은 김추사(金秋史:추사 김정희)의 완당집에서 이른 것을 받은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오주(李五州:오주 이규경)는 그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각주:1]에서 이 유래를 상세히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이처럼 이규경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숭례문의 편액을 정난종의 편액이라고 하고 있다. 그 또한 명필이니 일리는 있는 듯하다. 또한 이귤산(李橘山: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각주:2]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숭례문은 공조 판서 유진동(柳辰仝)이 쓴 것이다. (중략)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 대서(後板大書)는 공조 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글을 더 할수록 여러가지 이야기만 늘어난다. 1935년에 문호암(文湖岩:문일평)은 그의 글에서 이 글씨가 서체연구로 유명한 추사의 견해를 따라 신장의 글씨라고 판정하였는데, 그러면서 유진동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니 양녕대군의 필(筆)을 내렸다가 다시 유진동의 필을 걸었다는 것을 해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이귤산이 화재론을 내었으니 이 사항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겠다.

이렇듯이 주로 네 견해가 주창되고 있는데, 아직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다. 고령 신씨 문중에서는 신장의 글씨라 하고, 중앙일보는 무턱대고 양녕의 글씨라 하는 바이니 이에 대하여 서체를 더욱 명확히 검증하여 누구의 글씨인지 감만 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너무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연구에도 좋지 아니할 뿐더러, 상상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1.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쓴 책으로, 조선과 중국 등의 여러 나라의 고금사물<FONT color=#8e8e8e>(古今事物)</FONT>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한말의 문신 귤산 이유원이 묶은 책으로, 조선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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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1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