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


 실증의 주구로서 자료를 찾느라 한달이 걸리었다. 내가 장황하게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으니 결국에 글이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내용을 결국 대폭 생략하고 중심적인 내용만 훑어보기로 하겠다.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주장하는 내용 일곱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군의 부정이 사실인가. 입수한 1974년도 『인문계 고등 학교 국사』(문교부 지음, 펴냄 / 한국교과서주식회사 되박아펴냄)와 1979년에 발행된 『고등 학교 국사』(국편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편찬)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는 누가 지었는지 잘 안나오지만, 후자의 경우는 연구진에 최영희 위원장을 위시하여 고병익, 김원룡, 백낙준, 신석호, 이광린, 이기백, 이병도, 전해종, 최완기, 한우근 교수를 비롯하여 그 외에도 수십인이 있고, 집필진에는 고대 및 고려편을 김철준 교수가 담당하였다고 나온다. 물론 김철준 교수에 대하여는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두 책 모두 내용이 대동소이하니 같은 사람이지 싶다. 여하간 그 10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의 변신인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단군 신화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단군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이므로, 단군 왕검은 곧 제정 일치 시대의 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 나타난 토테미즘이라든지, 바람신이니, 구름신이니, 비신이니 하는 것은 이미 신석기 시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는 이러한 여러 신들을 통솔하는 하느님(천신) 사상이 성립된 것이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로서, 당시 고조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하였으며, 뒤에 민족 문화 전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고조선은 주(周)와도 교섭을 가지면서 점차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1974년판: 우리 나라에서 ~ 고조선은 주나라와도 교섭을 가졌으며, 중국 춘추 시대에는 남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영역을 차지하여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을 부정한 바는 없었다. 영토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나 중심지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지도 또한 없어서 딱히 한반도 내에 한정하고 있지는 않으며 분명 만주를 차지하였다고 언급(1974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뒤에 [고조선의 변천] 파트에서는 "처음에 산뚱 반도와 북중국 방면에 있던 동이족들은, 전국시대에 중국에서 각 지방의 소국가들을 통합하는 파동이 일어나자,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하여 분명 위치까지 소개하고 있다.

 백제의 요서경락, 즉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반영해달라고 주장하던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이라는 주장이나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이라는 주장은 정말로 당시의 교과서에는 없었는가.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랴오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식민지 세력을 세워 놓은 일본 지역, 그리고 랴오시 지방, 산뚱 반도 등지를 본국과 연결할 수 있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4년판 교과서 19쪽)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각 지방에 식민지 국가를 세워 놓았던 일본 지역, 그리고 요서 지방, 산뚱 반도 등지와 본국과를 연결하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판 교과서 22쪽)


 분명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교과서에 보충설명을 붙인 방통고등학교 교재에서는 "근거는 중국측 문헌인 송서, 양서 등의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 지점에 있었는데,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였다." 라고 기록한 데 있다."고 근거까지 달아주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식민지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는데,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4년판 교과서 36쪽)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그들을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다.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9년판 교과서 44쪽)


 여기서 언급하는 교과서 인용에는 띄어쓰기 한 획 일 점도 고친 바 없는 원문 그대로이다. 서울대학 사범대를 뒤져보면 다 튀어나오는 교재이니 찾아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외의 주장인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라느니 하는 부분은 언급치 아니하겠다.

 여하간 잡론을 한참 하다가 드디어 안 박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략)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현재 우리의 역사가들은 대개 일본의 식민사관 이러한 허위의 식민사관을 배웠던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국정국사교과서를 완전히 일제 식민사관의 복사판을 만들어 두었읍니다. /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찾기 위하여선 우리는 우리의 옛이제(古今)의 책들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옛이제의 책들을 널리 또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이러면서 동이(東夷) 글자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너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위원장이 한 말씀을 올렸다.


 안호상박사님! 이 국사청원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청회 기회가 있고 또 그때 진술할 기회가 또 있읍니다. 오늫 안박사님이 제일 먼저 나오신 것은 청원을 신청하신 분이기 때문에 국사교과서 내용의 시정될 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그 점만 오늘은 중점적으로 해주시고 그 뒤에 더 넓고 깊은 문제는 또 기회에 공술할 기회가 있을 것같습니다. 시간 제한도 있고 다음 공술할 분도 있고 해서 그 전문적인 분야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교과서 중심으로 또 청원낸 중심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그리하자 안 박사가 다시 공술을 시작한다.


 그러면 교과서중심으로 말씀드리겠읍니다. 1974년에 국정국사교과서를 낼 적에 단군의 역사와 연대표를 빼어 버렸읍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이 국사교과서가 망국적이요 민족반역적이라고 떠들었더니 작년판과 금년판에는 서기 앞 2333년전에 단군 한배검이 고조선 임금이 되었다 해 놓고 교과서 글에는 오로지 단군신화만 기록했지 단군역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읍니다. (중략)

 일제교육의 중독자와 공산주의의 광신자와 외래종교의 맹신자와 또 단군역사의 문외한을 빼고는 국 한문으로 단군역사를 쓴 큰 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이름을 대강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교헌 어윤적 장도무 박은식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정렬모 안재홍 문일평 권덕규 박형표 최동 문정창 정명악 등입니다. (중략)

 1974년과 1977년의 국사교과서에선 고조선이 평양 대동강가에서 일어났으며 또 고조선의 문화중심지가 대동강가라 하였읍니다. (중. 국사 2, 9면:고. 국사 9면) (후략)


 여하간 이런 발언이 죽 이어지고 다시 한배검 단군 운운하다가 다음으로 당시 국편 최영희 위원장이 진술한다.


 지금 바로 전에 말씀해 주신 안박사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또 가까운 사이고 어떤 회에 예컨대 무궁화회같은 데에서 제가 강연을 할 때에는 같이 들어 주시고 하는 분이었읍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제가 이렇게 서게 된 것은 저 개인으로는 몹시 서글프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또 이 공청회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와 또 교과서가 올바르게 발전해 나가는 한 계기가 된다면 민족과 우리의 역사학을 위하여 참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중략)

 돌이켜 우리나라에 있어서 해방이후에 우리나라 국사학계를 간단히 저 나름대로 정리해 봤읍니다. 해방후 우리 국사학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새로운 발견이 많이 됐읍니다. 여기에는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사에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료가 발견됐읍니다. 여기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감춰졌고 발표못한 것도 많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아냈읍니다. (중략)

 이제까지 우리 국사학자들은 솔직이 말씀드려서 가난속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연구를 계속해 왔읍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러한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앞잡이 내지 주류라고 규탄될 때는 저 스스로 부덕한 것을 느끼고 몹시 서글프기 한이 없읍니다. 지금 청원내용안에 “조선사”라는 것이 지금 나와 있읍니다. 그런게 이것이 그 “조선사”가 일제들에 의해서 식민사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적인 조선사 같기도 하나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조선사”로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조선사” 특히 고대사 부분을 이 책을 인용해서 연구하는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 원전 즉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원전을 자꾸 끄집어내고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읍니다. (중략) 이미 중국의 원전에서 잘못된 것 예컨대 일본서기나 일본의 고사기에서 잘못된 것을 우리는 시정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승의 학설을 뒤집고 또 시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르친 이세의 역사학도들은 또 그렇게 저희들의 학설을 시정해 나가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만 새로운 학문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여기에 청원서에 제3에 구체적인 지금 안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국사상의 사실과 현행 국사교과서에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한데 여기에 페이지수가 잘못되어 있읍니다. 이 교과서에 페이지수가 왜 잘못되어 있느냐하면 이것은 현행 교과서가 아닙니다. (후략)



 여하간 이런 후에 드디어 이른바 민족사학계에서 서울대 박시인 교수가 나온다.


 (전략) 일제치하에 저들이 조작한 조선사라는 것을 전공한 분들이 국사학교수가 그 조선사를 편찬할 때에 가담했던 분들이 국사편찬위원장도 되고 그 분들이 쓴 국사교과서를 검인정교과서로서 문교부가 인정해서 사용해 왔읍니다. 그러한 결과 국민들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숭상하고 미국사람을 좋아하고 북한에서는 소련을 좋아하는 경향이 나타났읍니다.

 그러므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작고하신 박대통령께서는 여러번 교육대회에 나가셔서 국적있는 교육을 해달라고 역설하였읍니다.

 그러나 국사교과서가 일제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으므로 효과가 없기 때문에 드디어 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읍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상부상조 협동해서 새 역사를 이룩하자고 하지만 협동하지 않는 기풍과 반정부적인 언동이 계속돼 왔읍니다.(중략)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왜 교과서에다가 싣습니까? 우리 조상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했다고 하였으니 국민학교 교실이 얼마나 떠들겠읍니까? 웃음판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실어서는 아니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의 아들 천자라는 뜻입니다.(중략)

 태조성은 이씨요 휘는 旦이고 자는 尹晉, 즉 임금이 앞으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이성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한 말을 지금도 그대로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조대왕은 旦, 지평선 혹은 동해 지평선에 아침해가 떠올라 오는 때이고 나라이름은 조선국호와 태조의 이름이 딱 맞습니다. sunrise, morning bright에는 사대주의가 없읍니다. 대주의라는 국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문제가 있으면 씨족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한 것은 인민대회나 인민재판을 한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야기나 쓰려니 잼이 없어서 못쓰겠다. 궁금하면 그냥 공청회 회의록을 보아라 다음이다.

1차 회의록 / 2차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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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6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에 이은 제2부입니다.


 국편에서 한 방 드시고, 재판에서도 한 방 드셔 총 두방을 드신 안호상 박사는 다시 재야(?)에서의 활동을 강화해 갔고, 특히 교육현장과 군대를 중심으로 강연도 하고 책도 주고 하면서 다시 전력(?)을 보충한다. 마침 문교부가 1970년~1981년에 걸쳐 초·중·고의 단계적 교육과정 개편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피격 이후 등장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갑자기 「교육의 정상화 및 가열 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해 버렸다. 그 내용의 큰 골자로는 과외금지와 함께 교육량의 축소와 수준의 하향이라는 것인데, 그 덕에 문교부는 단계적 개편 대신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다시 안 박사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은 이번에는 국회에「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관한청원」을 제출한다. 당시 청원을 소개한 사람은 총 19명인데, 대충 소개를 하자면 5공의 실세라는 권정달 의원, 한국일보 정치부장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5공 시절(후일이다)에 KBS 사장과 문화공보부 차장을 지낸 박현태 의원[각주:1], 민정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지내는 조종호 의원, 중정 기조실장과 민정당 사무총장 및 원내총무를 지낸 이종찬 의원,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치다가 나중에는 대표적인 보수우익으로 불리던 오제도 의원,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을 지내고 요새는 소망교회 계열로 알려진 이진우 의원, 민정당평화통일위원장을 지낸 이상선 의원, 5·16 당시에는 진보언론계를 대표하다가 5공때 언론 통제에 가담하였다고 비판을 받는 송지영 의원[각주:2], 대통령 특사와 체신부 장관을 지낸 김기철 의원, 관제야당으로 유명한 민한당의 전국구 1번 유옥우 의원, 그다음 민한당 전국구 2번 이태구 의원, 민한당 전국구 4번 손태곤 의원, 민한당 전국구 6번 정규헌 의원[각주:3], 민주한국당 문교공보위원장을 지낸 임재정 의원, 민주공화당중앙위원을 거쳐 나중에는 신민주공화당에서 대표를 맡는 국민당 신철균 의원, 요새는 월간 디플로머시(DIPLOMACY) 회장으로 더 유명한 임덕규 의원, 나중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내는 김종하 의원, 국회 내무위 간사를 지낸 조덕현 위원, 주일공사로 있으면서 총련 성묘단 운동을 지휘해 유명해 진 조일제 의원까지. 실세부터 실세가 아닌 사람까지 19명이 소개하여 1981년 8월 31일에 드디어 문공위에 제출된 청원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사용하는 교과서에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내용이 많아 올바른 국사교육을 해치고 있으므로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이 시정되어야 한다.

 · 단군과 기자는 실존 인물임.
 · 단군과 기자의 영토는 중국 북경까지였음.
 · 왕검성은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었음.
 · 락랑군(樂浪郡)은 중국 북경지방에 있었음.
 ·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
 ·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이고,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북경이었음.
 ·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


 이러한 내용은 7번 외에는 과거에 국편에 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에 무슨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회의록 같은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국사교과서 청원은 특히 1981년 11월 24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7차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에서 협의를 거듭했고, 공청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일시, 장소, 진술인 선정 등에 위원장과 간사에게 일임하여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아, 드디어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주구청산의 역사적인 날이 밝은 모양이다. 1981년 11월 26일 목요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9차 문교공보위원회는 위원 21명(전원이 몇 명인가는 알 수 없더라..)에 그냥 의원도 7명이나 참석하고, 문교부 장관(당시 이규호씨)에 차관(당시 정태수씨)[각주:4]에 황철수 장학편수실장[각주:5]에 정태범 문교부 편수총괄관까지. 이 사람들은 차치하고, 이 날 참석한 사람은 한국교육개발원 홍웅선 원장을 비롯하여 이른바 재야사학 측의 안 박사(국사찾기협의회 회장이란 직함이었다.)와 박시인 교수[각주:6]였고, 이른바 식민주구측은 국사편찬위원회 최영희 위원장[각주:7]과 서울대 김철준 교수, 그리고 동국대 이용범 교수이다. 깊이 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이들에 대해서 좀 설명하는 것이 식민사학주구론과 얼마나 다른지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좀 부연을 하여도 괜찮다 싶어 적는다.

 김철준 교수는 서울대 인문대 교수로 1948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후 국립박물관 학예관을 거쳐 단국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김철준 교수를 이기백 교수와 함께 이병도의 수제자라고 언급하면서 이 세 명 밑에서 우리 나라 식민사학계의 주류가 다 나왔다는 주장이 많다. 경북대학교 이영호 교수의 논문 「일계 김철준 :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의 개척자」(한국고대사연구 53, 2009.3.)의 내용 일부를 길지만 인용해본다.


 일계 김철준은 이기백과 함께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계를 이끌어 온 쌍벽이라 할 만하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시기에 서울대 사학과를 선후하여 졸업한 이들은, 인생의 동반자인 동시에 학문적 경쟁자로서 한국 고대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략) 그는 문화전통에 관심을 경주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본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문헌고증학은 민족의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식민지체질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단편적인 자료의 고증을 일삼는 문헌고증학으로는 문화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위논문이며 주저서인 『한국고대사회연구』에는 그의 대표작인 첫 논문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이 제외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학에 바탕을 둔 그의 연구는 이미 신라사의 실제와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는 신라말 고려초를 한국사의 전환기로 파악하였다. 나아가 고대사회와 중세사회의 차이점을 친족집단의 변화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론으로 발표된 그의 견해는 무리한 점이 많아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학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제자들은 그를 떠나거나 경원시하였다. 처음 그의 영향을 받아 사회인류학의 지견을 원용하여 신라 골품제사회의 혈족집단의 의의를 추구했던 이기동이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두면서 고대사상사, 특히 불교사상사를 연구하고자 했던 김두진은, 이후 인류학적 이론에 바탕을 둔 고대사연구를 접었다. 종전 자신들의 연구방법론을 일대 전환한 것이다. (중략)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실증적 연구, 직관적 연구와 분석적 연구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하겠다. 실증에 바탕을 둔 이기백의 사학이 돋보였던 것은 이 때(1980년 즈음)였다.

 동료, 제자들이 『김철준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지식산업사)을 간행한 것이다. 이는 4ㆍ6배판 97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모두 34편의 논문이 실렸다. 그러나 한국고대사 논문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있던 노태돈이 쓴 글 등 모두 4편에 불과하였다. 학계에서의 그의 위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주요 고대사학자들을 망라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작 자신이 지도했던 학계의 핵심적인 여러 제자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재혼을 하고, 인문대 학장과 한국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정년 때에도 고대사를 전공한 제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정년기념호인 서울대 국사학과의 기관지 『한국사론』제19집에 실린 고대사 논문은 전체 16편 중 3편이었다. (후략)



 이른바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중시조의 위치가 어떤지는 가늠할 수 있겠다...

 이용범 교수는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만몽사(滿蒙史)를 연구하다가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로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첨성대를 천문대가 아닌 제단(祭壇)이라고 본 견해와 신라 고가(古歌)인 처용가의 처용이 나당항로(羅唐航路)에서의 고대(古代) 대식상인(大食商人:아라비아 상인)들의 행적으로 볼 때 대식상인이 틀림없다는 견해로 유명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임상선 연구위원의 「취아 이용범의 만몽사 연구와 동북공정」(『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취아 이용범 선생이 본격적으로 만주, 몽고사 연구에 나선 것은 대학 3학년 초, 동국대학교 사학과 유급조수로 학교에 돌아오면서부터이며, 한국전쟁 때 개명사판 요금사 3사의 역사책 2권을 손에 쥔 것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필자는 학부 4학년 때 발해사 연구성과를 정리한 선생의 글을 읽고,(이용범, 발해사연구의 회고와 국사, 한국사상, 1964.) 졸업논문으로 발해사 인식의 시대별 추이 : 당시의 인물과 사서를 중심으로(1986)를 작성한 후, 대학원에서의 학위논문 주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선생을 뵈온 적이 있다. 당시 선생은 "할 것이 없어!"라고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발해사 중에서 중요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며 주신 주제가 바로 '발해의 천도'였다. (중간 생략)

 고조선의 서쪽 경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점인 위략(魏略) 만반한(滿潘汗)을 종래 패수, 즉 금일의 청천강이라 하여 연이 이곳까지 영토를 개척한 것이라는 학설은 일본의 현대 동양사학을 개척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몽고학 대가 야나이 와타리(箭内亘) 두 사람의 공동 주장이나, 그 권위에 눌려 추단 과정에서 범한 허다한 독단과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계에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이 영향 밑에서 성장한 몇몇 우리 학계의 선배들도 또 그대로 승복함으로써 이 설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국사의 한 구석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진(秦)의 장성의 요동의 지점에 대해서도, 현재 중국학계의 통설인 황해도 수안까지 장성이 연장되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하였다. 즉 진서(秦書)의 주장은 사료적 가치가 앞서는 위략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설이며 이 기사만을 근거삼아 진 장성의 종점을 한반도 내까지, 즉 황해도 수안까지 연장된 것으로 추측하여 단정하는 것은 아무런 방증이 될 문헌도 없으며, 진의 장성은 결코 현재의 요양(遙陽)을 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이용범, 고대의 만주관계, 한국일보사, 1976년.)



 또한 이용범 교수의 저서인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아세아문화사, 1976년.)의 일부와 그 서평을 살펴보면,


 발해왕국자체의 구성이 고구려유민을 주체세력으로 이루어졌으나 문화와 혈연을 달리하는 이부족과의 복합국가로서의 취강성(脆强性)은 숨길 수 없는 사회였던 것이며, 이 왕국의 지배층인 고구려유민이 지연 혈연 또는 문화면에서 우리 국사와 밀접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한 민족 또는 국가로서의 의식에 강력한 작용을 하는 요소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발해사가 한 민족사형성에 있어서 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공동추억체의식이 우리 국사에서 그 자취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연구, 27쪽)

 발해사연구는 우리 학계에서 열의를 가질만한 연구대상인 것은 틀림없으나 문제는 우리가 시도하는 바를 뒷받침할 뚜렷한 이론적 근거가 없는 한, 이와 같은 시도는 오히려 우리 국사에 공허한 내용을 첨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일 것이다. 발해사를 국사체계에 넣는데 먼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우리와의 추억공동체로서의 발해사연구가 더 진실하게 개척되어야 하겠다. (연구, 29쪽)


 여기에서 이박사는 발해사를 동북아시아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종래의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에서, 또는 신라를 유일한 왕통왕조(王統王朝)[각주:8]로 보았던 지난 날의 한국사체계를 탈피하는 새 민족사체계의 입장에서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자하는 욕심은 이교수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박사는 한국에서 발해왕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민족의 주체의식의 고조기에 있었던, 한국의 지난날의 발해관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와 같은 시도가 오늘날에도 이론상으로 많은 문제로 남아 있어서,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여 냉철한 학자적인 자세를 재확립시키고 있다.[각주:9]


 그리고 그냥 재밌는 부분이 있어서, 임영정 교수의 「동국사학 60년의 성과」(『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옮기면,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급한 성격이었는데, 그것이 원고 집필과 식사시에 유감없이 드러났다. 원고 집필 자세를 보면, 양반다리로 앉은 채 방바닥에 엎드려 200자 원고자 한 권만 달랑 앞에 놓고 만년필로 세로 글을  쓰신다. 그 옆에는 담배갑·껌 종이·신문지조각 등이 널브러져 있는데, 이는 관계문헌과 사료를 밖에서 메모하여 온 것이었다. 또 집필된 원고를 보면, 어떤 문장은 한 단락이 200자 원고지 4~5매에 달하는데 도저히 간편하게 줄여볼 수 없으면서도 명문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식사하실 때에도 미처 수저가 갖춰지지 않으면 손으로 집어 드시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주변 이야기가 길었다. 드디어 오후 2시 11분에 공청회가 개최되었는데, 우선 한병채 위원장이 인사말을 올리는데.


 우리 한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내외에 표방하면서도 아직까지 일본역사보다 길어서는 안되는 부분인 한사군이전의 2천년이 넘는 고조선의 민족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오늘에까지 이르렀읍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 조차에 대한 국사학의 논의가 분분한 상태에서 국민교육용 국사교과서에까지 그 실체가 정리되지 못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조상의 뿌리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조 단군의 개국정신인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능력과 공민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는 교육의 기본목표에 어긋나는 결과를 자초하였읍니다. 따라서 조상의 얼과 민족정기를 이어받아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이바지하여야 할 교육문화는 그 파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후략)



 여하간에 위원장은 광복 후에 식민사관 대토론을 가져야되는데 그런 과정없이 오늘에 이르렀고, 학계가 국사학 연구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사실이나 업적을 지금까지 민족정사로서 론란이 되는 까닭이 그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엄정한 중립적 입장에서 파헤치고 새 역사창조의 기본이 되는 사관 및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검토하여야 할 시점이라면서, 자주적 철학과 민족정통을 계승해 나갈 사관의 정립 위에 새로운 민족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새 문화 창달을 위한 국민의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한다.

 한위원장의 말에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5공 색깔이 묻어나온다. 당연하다. 1958년에 사법과에 합격한 뒤로 판사, 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뒤 81년부터는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나중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을 거쳐 88년에는 새 6공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 올라갈 정도로 5공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노무현 탄핵심판 당시 국회 소추위측 변호인을 맡기도 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또 애매하게 끊기로 한다. 사실 나도 실증사학의 뒤를 쫓는 사람이라 자료 수집에 무수한 시간이 걸리고, 또한 아직 수집하지 못한 자료가 허다하여 지금 모두 썼다간 나중에 보충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자료를 좀 더 보강하여 나머지를 쓰기로 약정하자니 여러 날이 걸리겠음이다. 하여간 다음 下편은 마지막 편이므로 공청회 내용을 모두 훑을 것이다. 아마도 下편 이후에 한 편을 더 써야하겠으니, 그 편은 보(補)로 하기로 하고 그에서 정말 "청문회 결과"가 나타났는지 살필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교과서뿐만 아니라 그 해에는 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전해지고 파동이 일어난 일이다. 국회 문공위는 그 때에 결의문도 채택하기도 했고,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회와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모습이 하나 나타난 것이 있다. 사실 회의록만으로는 결과가 어떤지 알기 어렵고, 또한 지금 파악하고 있는 회의록이 전산화 이후의 것이라 코옴퓨타로 내용을 보니 찾기가 힘이 든다. 그리하여 겨우겨우 하나하나 찾아가며 제11대 국회 문공위 회의록을 거반 훑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다. 글 쓰는데 실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데, 하물며 국사 교과서나 역사 서술에 있어서랴.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1. 윤종영씨는 박현열이라고 썼지만, 태(兌) 자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은 박현태 의원이다. [본문으로]
  2. 후일 KBS 이사장을 지냈는데, 이병도를 회개(?) 시킬 사람은 최태영 박사밖에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종종 등장한다. [본문으로]
  3. 윤종영씨는 정구헌이라고 썼으나, 박현태 의원과 마찬가지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여담이나 정태수 차관이 진주 출신에 이규호 장관이 진양 출신이라 당시 진주 마피아의 진주시 문교부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그냥 웃겨서 첨언한다. [본문으로]
  5. 나중에 국회의원도 지냈다. 13대. [본문으로]
  6. 서울대 인문대 교수였으나, 국사학자는 아니다. 영문 전공하시다 나중에 「한국 상고설화의 연구 : 태양신화의 이동을 중심으로」로 국문과에서 박사를 받았다. [본문으로]
  7. 1950년에 고려대 사학과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와 숭실대를 거쳐 1972년부터 10년간 국편 위원장으로 활동. 1975년에 단국대 사학과에서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에 관한 연구 : 의병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석호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과자신보:쿠키뉴스 부고). [본문으로]
  8. 정통왕조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9. 황원구, 「서평 : 이용범 저 , 한만교류사연구」, 『역사학보』 123호, 역사학회, 1989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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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