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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9 자유민주당의 파벌 (선거 이전 자료)
Ⅰ. 파벌의 개념


 정당의 파벌이란 그 정당에서 통일된 것 이외의 정책이나 주장에 공통점이 있는 사람이 모여 의견을 집약하고 통일된 정책의 형성을 도모하며, 정책의 실현을 향한 활동으로 그 정당의 집행부를 담당하거나 목표로 삼는 정당 운영의 기본단위가 되는 조직 또는 단체이다. 자유민주당 내에서는 정책집단(政策集団)이라고도 한다.

 현재 일본공산당 내에서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파벌(분파)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공산당에서도 구 쇼칸파(所感派:일본공산당의 과거 파벌의 하나로 친중파였다.) 관계자는 모두 탈당하여 「일본공산당 (행동파)」이라는 별도의 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자유민주당의 경우 자유당과 민주당이 결성하여 자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을 당시(이른바 보수합동)에도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정책노선 등이 합쳐지면서 그 특색을 유지하는 파벌이란 조직이 당 내에 존재하게 되었고, 이러한 측면은 자민당의 장기 존속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자민당을 일부 연구자들은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파벌이라는 각기 다른 정당들의 장기정당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위와같은 연유에서 기인한다.



Ⅱ. 자유민주당 파벌의 역사


1. 보수합동과 파벌의 연원

 자민당의 역사는 파벌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1955년 초,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사회당이 단결하면서 제1당으로 부상하자 당시 보수정당은 매우 큰 위협을 받게 되었고, 결국 보수합동을 통하여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어 유일 보수 정당의 단독정권을 기반으로 하는 55년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민당 내에서도 대표가 확정되지는 않았고,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오가타 다케토라(緒方竹虎), 미키 부키치(三木武吉),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의 4인이 총재대행위원으로 출범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원의 경력, 신조, 정책 등이 가까운 사람끼리 당내의 유력자 하에 뭉치면서 이른바 파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5달 뒤인 1956년 4월에 하토야마가 총재로 취임하고 난 뒤 반년 뒤인 11월에 은퇴를 발표하면서 12월에 총재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이상 3인이 출마하면서 이를 계기로 합당 전부터 내재하고 있던 계파가 공작을 둘러싸고 갖가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8개의 파벌, 이른바 「8개 사단」(8個師団, 이시바시파는 규모가 작아 「7개 사단 1개 여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이 형성되었다.

 이후 총리를 둘러싼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반복되면서 일부 작은 파벌이 도태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중선거구제에 대응한 5대 파벌, 즉 다무라파(田村派), 후쿠다파(福田派), 오히라파(大平派), 미키파(三木派), 나카소네파(中曾根派)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5대 파벌 시대에는 당요직이나 관료를 경험한 당내 실력자가 파벌의 영수(領袖)에 취임하고, 그 영수들이 총재직을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었다.


2. 1980년 선거와 파벌의 약화

 1979년에 당시 총재이자 총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정권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몇 대 전의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영향이 강해 정권이 「가쿠(角) 그림자 내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게다가 오히라를 지탱하던 다나카파 등의 자민당 주류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지지하던 미키파 등의 반주류와의 알력은 총리 취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9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겨우 과반수를 차지한 자민당 내에서는 결과에 책임을 묻는 반주류파가 오히라 퇴진을 요구하면서 이른바 「40일 항쟁」이 시작되었고, 선거 이후 총리지명선거에서도 반주류파가 후쿠다에게 투표하면서 결선투표까지 가면서 오히라가 138표를, 후쿠다가 121표를 얻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민당 내에서도 사실상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1980년에는 사회당이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하였고, 반주류파가 결석하면서 상징적 의미가 강했던 결의안이 오히려 가결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오히라는 불신임결의안의 가결에 따라 중의원을 해산(이른바 해프닝 해산)했고, 중의원 총선거를 참의원 선거와 같은 날에 해 정국을 극복하고자 했다.

 해산 당시 지지율 21%(지지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41%)로 자민당의 내분에 염증을 느낀 여론은 야당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게다가 경단련(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약칭, 이른바 게이단렌)의 도코 도시오(土光敏夫) 회장도 기자회견에서 “가장 나쁜 케이스가 되었다. … 불만을 금할 수 없다. 이 때 자민당이 더욱 결속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자민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를 두고 재계에 50억 엔의 정치자금을 요청했고, 재계는 자민당의 분열 회피를 조건으로 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반주류파의 신당론이 소멸하고, 동시에 주류파도 불신임안 가결시 결석자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총선거가 공시된 5월 30일, 오히라는 신주쿠에서의 첫 가두연설 직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다음날 과로와 부정맥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70세로 고령이었던 오히라는 격무와 심장 증세 등으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이를 두고 반주류파였던 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郎)는 이후의 베네치아 정상회담 출석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진퇴를 결정하라고 압박하는 등 반주류파 일각에서 오히라 퇴진의 목소리를 다시 올렸다. 뿐만 아니라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등 오히라파 내에서도 오히라 퇴진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서 6월 12일 오전 5시 54분에 오히라가 급서(急逝)하고 만다.

 오히라의 급서로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관방장관이 내각법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임시대리를,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 부총재가 총재임시대행을 맡았지만, 선거는 주류파를 대표하는 형태로 총무회장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맡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48년만의 현직 총리의 급서라는 예상 외의 사태는 상황을 급변시키기 시작했다. 자민당은 총리의 분사(憤死)를 두고 동정표를 구했고, 결과는 중의원 및 참의원에서 안정 다수로 나타났다.

 불신임의 가결로 시작된 소동이니만큼 반주류파를 총리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한때 이토나 니시무라를 총리로 하는 구상도 있었지만, 재계 교섭을 담당하였고 또한 오히라파였던 스즈키가 오히라 정권을 계승하는 형태로 총재 및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주가 상승이 확실했던 당시 리쿠르트코스모스사의 미공개주식을 정치인 및 관료 등이 수뢰(受賂)한 리쿠르트 사건(リクルート事件)이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에서 발각되었고, 총재를 시작으로 각 파벌의 영수를 포함한 당내 유력자들이 일제히 사건에 연루된 사실로 인해 1989년에 다시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 총재로 취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총재의 자리는 파벌 영수의 대결에서 선거의 얼굴로 그 가치가 옮겨가기 시작했다.

 중의원 선거가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후보자 선정에서 당본부가 갖는 힘이 커진 것도 파벌의 영향력을 격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총재를 다투는 집단에서 내각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조직으로 존재 목적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중의원 선거로 고이즈미가 발탁한 신진의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고이즈미는 신진의원들이 파벌에 속하는 것을 막고자 신인의원연수회를 설치하고 당이 신진의원을 교육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진의원으로 구성된 83인회가 결성되었지만, 1년 후에 83인회의 반수 이상이 파벌에 입회하는 결과가 나타날 정도로 파벌 해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문제이다.



Ⅲ. 자유민주당 파벌의 조직


 자민당 각 파벌의 조직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명예회장(名誉会長)
 : 파벌의 회장을 지냈던 인물 등으로, 말 그대로 명예직이다. 단 베테랑 정치가 또는 회장의 상담역으로 파벌 내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2. 회장(会長)
 : 파벌의 우두머리로, 영수(領袖)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파벌의 창설자인 회장은 상당한 지배권을 갖지만, 전 회장으로부터 지위를 이어받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경우도 있다. 구성원들은 회장에게 선거자금이나 포스트의 알선 등을 기대하지만, 회장이 구성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지위를 위협받기도 한다.

3. 대표(代表)
 : 회장과 마찬가지로 파벌의 우두머리이다. 다만 회장 인사에 대한 이견을 무시할 수 없는 경우에 잠정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회장 대신에 두는 지위이다.

4. 회장대행(会長代行)
 : 파벌의 차석으로, 운영의 중핵을 맡는 자리이다. 상설직인 회장대행을 차기회장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5. 부회장(副会長)
 : 명예직의 의미가 강하지만, 파벌 내의 베테랑 정치가를 위한 자리이다.

6. 좌장(座長)
 : 회합을 관리하는 지위로, 평소에는 명예직의 지위지만 파벌의 우두머리가 빠진 경우에 파벌 전체를 모으는 역할로 부상하기도 한다.

7. 사무총장(事務総長)
 : 파벌의 자금 관리나 섭외(涉外)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로, 유력한 중견의원이 맡아 차기회장 또는 회장대행의 자리로 나아가는 코스가 되기도 한다.

8. 부간사장(副幹事長)
 : 당의 임원이지만, 통례적으로 각 파벌의 추천에 의해 임명되는 자리로, 파벌과 당 집행부의 연결을 담당한다.



Ⅳ. 파벌의 통칭


 방송이나 신문 등의 매스컴에서 자민당의 각 파벌은 대개 해당 파벌의 회장인 이름의 성에서 딴 「아무개파」 또는 「아무개그룹」이라고 불린다. 정식 명칭이 아니므로 언론사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질 때도 있다.

 파벌회장이 은퇴 또는 작고하면서 차기 회장직이 부재한 경우에는 전 회장의 이름을 따서 「구 아무개파」라고 한다.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사후의 「구 와타나베 파」나 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 은퇴 후의 「구 고모토파」,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가 파벌에서 이탈한 뒤의 「구 하시모토파」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야마사키 타쿠(山崎拓)는 2003년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의원직이 없음에도 「야마사키파」의 회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체로 「야마사키파」로 불렸다.

 또한 회장을 맡은 사람이 내각총리대신 등에 취임하면서 다망(多忙)한 직무때문에 회장직을 퇴임하고 파벌의 최고간부에게 맡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각주:1]. 이 경우에 파벌의 명칭은 바뀌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의 총리 취임 당시 사쿠라우치 요시오(櫻内義雄)가 「정책과학연구소」(政策科学研究所: 나카소네파) 회장을 맡은 경우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의 총리 취임에 따른 가네마루 신(金丸信)의 「게이세이카이」(経世会, 경세회: 다케시타 파) 회장 취임,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의 총리 취임에 따른 와타누키 다미스케(綿貫民輔)의 「헤이세이정치연구회」(平成政治研究会: 오부치파) 회장 취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취임에 따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의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모리파) 회장 취임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일시적인 파벌이탈로 간주되어 그러한 직위에서 물러나면 다시 파벌의 회장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것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예외적으로 다나카 가쿠에이는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자민당을 탈당했으며 또한 「다나카파」로 불리던 「목요클럽」(木曜クラブ)에서도 탈퇴했다. 다나카 자신은 「다나카파」의 회장에 있었던 적도 없고, 체포 이후에도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나 니카이도 스스무(二階堂進)가 회장을 맡았지만, 언론에서는 모두 「다나카파」로 불렀다. 이는 실제로 파벌의원에 대한 정치자금과 파벌 운영의 전권을 다나카가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속이 아니지만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것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Ⅴ. 파벌의 변천


×표는 단절을 표시, ※는 이탈 또는 분파를 표시.


1. 구 자유당계(自由党系, 이른바 보수본류)

 (1) 요시다 자유당(吉田自由党, 이른바 「요시다 학교」[각주:2])

  1) 『고치카이』(宏池会, 굉지회)
   가) 이케다 하야토의 「이케다파」
   나) 마에오 시게사부로(前尾繁三郎)의 「마에오파」
   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의 「오히라파」
   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의 「스즈키파」
   마)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의 「마야자와파」
    ※ 『오유카이』(大勇会, 대용회)·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계열 → 『이코카이』(為公会, 위공회: 아소파)
   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의 「가토파」
    ※ 『고치카이』·호리우치 미쓰오(堀内光雄)의 「호리우치파」 → 니와 유야(丹羽雄哉)·고가 마코토(古賀誠)의 「고가파」 → 「고가파」
   사) 오자토 사다토시(小里貞利)의 「오자토파」
   아)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의 「다니가키파」
   자) 「고가파」

  2) 『목요연구회』(木曜研究会) ― 『슈잔카이』(周山会, 주산회)
   가) 사토 에이사쿠의 「사토파」
   나) 『나노카카이』(七日会, 칠일회) : 『슈잔클럽』(周山クラブ)·호리 시게루(保利茂) 계열 → 「후쿠다파」에 합류 / 『목요클럽』(木曜クラブ)·「다나카파」
   다) 『게이세이카이』(経世会, 경세회)·「다케시타파」
    목요클럽 니카이도 계열 → ×
   라)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오부치파」
    『개혁포럼21』(改革フォーラム21)·하다 쓰토무(羽田孜)의 「하다파」 → 『신생당』(新生党) → ×

  3) 『수요회』(水曜会)
   가) 오가타 다케토라(緒方竹虎)의 「오가타파」
   나)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의 「이시이파」, 이후 소멸.

 (2)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945~1946)
   『하쿠세이카이』(白政会) :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의 「오노파」 → 「무라카미파」와 「후나다파」로 분열
   가) 무라카미 이사무(村上勇)의 「무라카미파」 → 미즈타 미키오(水田三喜男)의 「미즈타파」, 이후 소멸
   나) 후나다 나카(船田中)의 「후나다파」, 이후 소멸


2. 구 민주당계(民主党系, 이른바 보수방류)

 (1)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954년 ~ (1955년) ~ 1959년

  1) 『주니치카이』(十日会)
   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기시파」
   나-1) 『당풍쇄신연맹』(党風刷新連盟)
    ※ 『아이죠카이』(愛正会)·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郎)의 「후지야마파」, 이후 소멸
    ※ 난조 도쿠오(南条徳男) 및 히라이 다로(平井太郎) 계열, 이후 「후쿠다파」에 합류하여 소멸
   나-2) 『교우 클럽』(交友クラブ)·가와시마 조지로(川島正次郎)의 「가와시마파」 →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의 「시나파」, 이후 소멸
   다) 『하치니치카이』(八日会)
   라) 『세이와카이』(清和会)·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의 「후쿠다파」
   마)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의 「아베파」
   바)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의 「미쓰즈카파」
    ※ 『세이신카이』(政眞会)·가토 무쓰키(加藤六月) 계열, 이후 신생당에 합류 후 소멸
   사)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모리 요시로의 「모리파」
    ※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의 「가메이파」 → 「구 와타나베파」에 합병 후 소멸
   아)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의 「마치무라파」

  2) 『슌주카이』(春秋会)
   가) 고노 이치로(河野一郎)의 「고노파」
   나) 『신정동지회』(新政同志会)
   나-1) 『슌주카이』·모리 기요시(森清)의 「모리파」 → 소노다 스나오(園田直)의 「소노다파」 → 「후쿠다파」에 합류 후 소멸
   나-2) 『정책과학연구소』·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의 「나카소네파」
   다)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의 「와타나베파」
   라) 『시스이카이』(志帥会)·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의 「무라카미파」
    ※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야마사키 다쿠(山崎拓)의 「야마사키파」, 이후 소멸
   마)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의 「에토파」
   바)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의 「가메이파」
   사)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의 「이부키파」

  3) 『화요회』(火曜会)
   가)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의 「이시바시파」
   나) 『니니치카이』·이시다 히로히데(石田博英)의 「이시다파」
    ※ 「미키파」에 합류 후 소멸

 (2) 『개진당』(改進党) : 『정책연구회』·『정책동지회』·『정책간담회』
  가) 마쓰무라 겐조(松村謙三)의 「마쓰무라파」 - 『반초정책연구소』(番町政策研究所)·미키 다케오(三木武夫)의 「미키파」
  ※ 하야카와 다카시(早川崇) 계열은 이후 소멸
  나) 『신정책연구회』(新政策研究会)·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의 「고모토파」
  다) 『반초정책연구소』·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의 「고무라파」


3. 기타

 (1) 구 『세이란카이』(青嵐会)·중간파 계열
  『자유혁신동우회』(自由革新同友会)·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郎) 계열 → 이시바시 신타로(石原慎太郎) 계열 → 「후쿠다파」에 합류 후 소멸

 (2) 구 『보수신당』(保守新党)
  『새로운 물결』(新しい波, 아타라시이나미)·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계열

 그 외에 결당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에는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계열·오아사 다다오(大麻唯男) 계열·기타무라 도쿠타로(北村徳太郎) 계열 등의 소수 그룹이나 단기로 소멸한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의 「히로카와파」가 존재했다.

 1970년대에는 「다나카파」와 「후쿠다파」에 의한 가쿠후쿠전쟁(角福戦争)이 벌어져 다나카파가 승리하였다. 그 정치수법이 금권정치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를 타파하려는 목적으로 젊은 의원을 중심으로 『세이란카이』(青嵐会)가 결성되었다.

 위에 기술한 것 외에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의 『정치공학연구회』(政治工学研究会), 고사카 도쿠사부로(小坂徳三郎)의 『신풍정치연구회』(新風政治研究会) 등 일부 파벌횡단형 정책집단은 대표자를 영수로 하는 신흥파벌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Ⅵ. 현 자민당의 파벌 일람


명칭 통칭 소속 의원수
『세이와정책연구회』
(清和政策研究会)
마치무라파
(町村派)
89인
(중62, 참27)
『헤이세이연구회』
(平成研究会)
쓰시마파
(津島派)
68인
(중45, 참23)
『고치카이』
(宏池会, 굉지회)
고가파
(古賀派)
62인
(중51, 참11)
『근미래정치연구회』
(近未来政治研究会)
야마사키파
(山崎派)
41인
(중38, 참3)
『시스이카이』
(志帥会)
이부키파
(伊吹派)
28인
(중22, 참6)
『이코카이』
(為公会, 위공회)
아소파
(麻生派)
20인
(중16, 참4)
『새로운 물결』
(新しい波, 아타라시이나미)
니카이그룹
(二階グループ)
16인
(중14, 참2)
『반초정책연구소』
(番町政策研究所)
다카무라파
(高村派)
15인
(중14, 참1)



참고자료


  • 「일본 자민당의 파벌에 대하여」, 2008년 12월 18일, 국회사무처.
  • 위 자료는 일본어판 위키페디아를 크게 참고한 것으로 보임.
  1. 예외적으로 「이코카이」<FONT color=#8e8e8e>(為公会, 위공회)</FONT>의 회장인 아소 다로<FONT color=#8e8e8e>(麻生太郎)</FONT>는 총리에 취임하면서 좌장이었던 주마 고키<FONT color=#8e8e8e>(中馬弘毅)</FONT>가 파벌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아소는 여전히 회장이다. [본문으로]
  2. 요시다 시게루의 독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꾸려진 그룹으로, 요시다와 같은 관료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케다 하야토<FONT color=#8e8e8e>(池田勇人)</FONT>나 사토 에이사쿠<FONT color=#8e8e8e>(佐藤栄作)</FONT>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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