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11.14 양주동 (2)
  2. 2007.11.14 오구라 신페이

무애 양주동

무애 양주동

양주동(梁柱東, 1903년 3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한국의 국문학·영문학자이다. 호는 무애(无涯)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에서 태어나 장연에서 자랐다.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원고를 보완하여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펴냈다.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 1950년 2월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1950년 12월에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북조선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행위에 대해 자수한 바 있다[각주:1].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각주:2]은 이 즈음으로 보인다.
  • 양주동은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가리켜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에는,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각주:3]
  •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각주:4]
  •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각주:5]
  •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각주:6]
  1. 부역행위 자수자 증가, 서울신문, 1950년 12월 11일자. [본문으로]
  2.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23310 href="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23310" target=_blank rel=nofollow>법에도 없는 학살지령 - 무법천지의 친일파 세상은 이랬다</A>, 한상범, 데일리서프라이즈, 2005년 5월 24일. [본문으로]
  3.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www.hani.co.kr/arti/happyvil/happyvil_news04/38305.html href="http://www.hani.co.kr/arti/happyvil/happyvil_news04/38305.html" target=_blank rel=nofollow>오대산 탄허선사</A>, 조연현, 한겨레, 2005년 5월 31일. [본문으로]
  4.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9/h2006091919301685150.htm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9/h2006091919301685150.htm" target=_blank rel=nofollow>말들의 풍경 &lt;29&gt; 戱文의 우아함</A>, 고종석, 한국일보, 2006년 9월 19일. [본문으로]
  5. 고종석, 위의 자료. [본문으로]
  6.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amp;office_id=089&amp;article_id=0000083860&amp;section_id=102&amp;menu_id=102 href="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amp;office_id=089&amp;article_id=0000083860&amp;section_id=102&amp;menu_id=102" target=_blank rel=nofollow>우리말과 2인칭 호칭</A>, 신기영, 대전일보, 2006년 10월 11일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2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년 6월 4일 ~ 1944년 2월 8일)는 일본의 언어학자다. 일본어와 조선어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03년에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해 언어학을 전공했으며, 1906년에 졸업 논문 〈헤이안 조의 음운〉(平安朝の音韻)을 썼다. 이후 우에다 가즈토시의 국어학 연구실에서 조수로 있다가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후,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1933년부터 1943년까지는 도쿄 제국대학 언어학과 주임교수로 있었다.

1920년에 《조선어학사》(朝鮮語学史)를, 1944년에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했다. 1929년에 〈향가 및 이두의 연구〉(郷歌及び吏読の研究)에서 삼국유사의 향가 14수와 균여전의 향가 11수 등의 현전 향가 전체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으며, 1935년에 이 책으로 제국학술원 은사상을 받았다.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문화공로상을 받았다.

향가 해석사의 머리에서 후일의 양주동을 비롯한 많은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1942년에 《조선 고가 연구》(朝鮮古歌硏究)로 집대성하였다.

사후에 장서가 도쿄대학 문학부에 기증되어 오구라 문고가 조성되었다.


참고 자료

고노 로쿠로(河野六郎), 《고 오구라 신페이 박사》(故小倉進平博士).

신고
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0